[3금요예배] 46고전12; 1-3 신령한 것을 사모하여 나아간다_5Loading the player...
46고전12; 1-3 신령한 것을 사모하여 나아간다_5
2025. 6. 6. 금. 금요철야.
개요: 성령충만한 신앙생활, #56충만 [고전]12:1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고전]12:2 너희도 알거니와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 갔느니라 [고전]12: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사도행전에서 나타난 성령충만은 획기적이고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그 이후부터 성령의 임재는 다양하게 나타났습니다. 성령께서는 이미 이전부터 이 세상에 있었지만 구약에 나타난 예언에 따라 예수님이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시고 주의 권능의 규로 이 세상에 나타나신 뒤로는 다양하고 활발하게 그 역사하심을 나타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성령의 역사는 예루살렘 교회가 시작이었지만 그 이후에 안디옥 교회나 다른 소아시아의 교회들에서도 왕성하게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말씀에 나타난 성령충만의 모습은 마게도니아 지역이었던 고린도교회에 나타난 것이었습니다. 성령의 사역은 그곳에 우상숭배가 있든 없든 상관없이 놀랍게 나타났습니다. 성령의 사역을 통해서 복음이 전파되었고 그 복음에 따르는 삶이 펼쳐졌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모든 사역과 활동은 전부 성령의 역사하심을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그 지역에서 이전에 하나님을 믿는 역사나 문화나 전통이 없다 할지라도 성령의 사역을 통해서 새롭게 모든 신앙적 사역이 일어날 수 있었던 이유는 성령께서 그 모든 것을 알게 하시고 깨닫게 하시며 실행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모든 다양한 사역 중에서 가장 특별한 것은 신령한 사역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그 신령한 사역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고전]12:1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신령한 것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여기에 나타납니다. 신령한 것이란 앞으로 이야기할 은사나 직분이나 사역에 대한 것을 의미합니다. 교회에서의 사역이 단지 신령한 것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봉사나 섬김이나 교육이나 활동이나 다양한 사역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모든 사역과는 차별되는 것이 바로 이 신령한 사역입니다. 신령한 사역을 통해서 성령충만의 의미를 더욱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성령의 사역으로 모든 교회사역이 이루어지지만 특히 신령사역을 통해서는 성령의 사역이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신령사역의 종류에 대해서는 다음 구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고전]12:8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고전]12:9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고전]12:10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신령한 사역은 성령으로 지혜의 말씀을 전하거나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전하기도 합니다. 그럴 때 성령의 일체됨이 있고 지혜와 지식의 말씀이 전하는 자의 인격이나 의지와 협응해서 나타납니다. 다시 말해서 지혜의 말씀이나 지식의 말씀을 전하는 자는 한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 은혜를 나타내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의지와 반해서 어떤 사역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간절히 원하고 순종하려는 사람들이 성령의 사역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각 사람의 마음을 정확히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하나님의 일에 사모함이 있는 자들에게 능력을 주셔서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십니다. 그것은 세상의 일하는 방식과 달랐습니다. 앞서 나타난 2절을 보십시오. “[고전]12:2 너희도 알거니와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 갔느니라”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는 말 못하는 우상이 끄는 그대로 끌려갔습니다. 자기 의지에 반해서 해야 하기 때문에 억지로 했었습니다. 그것은 성령께서 하시는 사역과 달랐습니다. 주님은 올바른 은혜를 주셔서 그 은혜를 통해서 하나님께로 나아가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 안에서 다 은혜를 얻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우상의 종교생활과는 달랐던 것입니다. 주님과 연합해서 이루게 되는 신앙생활은 우리가 자유의지에 따른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갖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종교생활에 흔들리지 말고 오직 신앙생활을 통해서 하나님과 깊은 관계와 교통을 갖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우상이 이끄는 대로만 움직이는 것은 결국 우상이 죄이기 때문에 죄로 나아가는 것 뿐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선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자신의 선을 온전히 나타내도록 하십니다. 그럴 때 주님께 대한 진실한 신앙고백이 나타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도 자기 의지에 반해서 하게 되는 것이라면 그것은 결코 선이 될 수 없습니다. 억지로 세례를 받고 억지로 직분을 받고 억지로 봉사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구원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억지로 하는 것을 원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진실한 신앙은 자신의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신앙의 고백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인격적이고 은혜로우심을 잘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강제나 회유나 협박으로 신앙을 고백하게 하시지 않습니다. 그럴 때 진실한 신앙이 나타나는 모습은 3절이 잘 나타납니다. “[고전]12: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예수님을 욕하지 않습니다. 또한 성령을 통해서만이 예수를 주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그는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요 성령을 따라 예수님을 주인으로 고백하고 따르는 자입니다.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일을 따르는 자인 것입니다. 모든 신령한 일들은 바로 그럴 때 일어납니다. 주님을 비방하려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순종하기 위해서 행하고자 할 때 신령한 일들에 대해서 열리는 것입니다. 주님의 신실한 일에 천사와 사탄의 입장이 완전히 달라지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천사는 주님께 순종하려는 것이고 사탄은 주님께 거역하여 자기의 뜻을 이루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걸 주의해서 하나님을 주로 고백할 때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신령한 사역이 가치를 갖게 됩니다. 지금도 우리는 신령한 것에 이끌려 나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찬양하고 예배를 드리는 것도 온전한 하나님께 대한 고백을 드리고자 하는 마음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렇게 나아갈 때 주님이 이끌어 주십니다. 거부하고 부인하고 부정하는 자를 억지로 끌어 주시지 않습니다. 원하고 바라고 사모할 때 성령께서는 우리를 신령한 상태로 인도해 주십니다. 오늘도 우리가 주님께 대해서 인격적이고 진심을 따르는 사모함을 가지고 나아가서 성령의 충만과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의 충만으로 세워지기를 원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크신 은혜를 부어 주실 것입니다. 이러한 놀라운 축복의 은혜가 오늘 모인 모든 무리에게 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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