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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요10; 14-17 선한 목자로서 목숨을 버리심_4
2025. 6. 4. 수. 수요예배.
개요: 성도의 신앙생활, #53희생
[요]10:14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요]10:15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요]10:16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요]10:17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성도들이 신앙생활을 할 때 기억해야 하는 것은 항상 하나님 말씀을 통해서 신앙생활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럴 때 그에 근거해서 새로운 발전과 성장이 이루어집니다. 1517년에 일어난 개신교의 종교개혁도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해서 이루어진 것이지 어떤 이념이나 주의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 말씀에 가장 합당하고 온전한 종교개혁이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삶의 성장과 발전도 바로 하나님 말씀에 근거해서 이루어져야 우리 자신이 복되고 하나님의 복된 은혜를 풍성하게 누릴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우리 신앙의 모범이신 예수님이 어떻게 신앙생활을 말씀하시는가를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말씀 속에서 신앙생활의 의미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14절입니다.
“[요]10:14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요]10:15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켜 선한 목자라 하셨습니다. 또한 선한 목자이시기 때문에 양을 돌보시며 그 양을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셨을 뿐만 아니라 제자들에 대해서는 그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그리스도로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도들을 진심으로 사랑하셨습니다. 그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보여주는 것이 바로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라는 말씀입니다.
아버지와 예수님의 친밀함처럼 목자이신 예수님이 양이 되는 성도들을 알고 계신다고 했으니 얼마나 사랑하시면 그렇게 많은 관심과 이해를 하고 계시는 것일까요? 그 친밀하심이 바로 그 다음에 나타나는 예수님의 사랑하심의 이유가 됩니다. 예수님은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라고 하셨습니다. 그 사랑하심의 희생은 양을 너무나 잘 아시기 때문에 행하시는 거룩한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을 보면서 예수님이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 사랑인가를 깨닫습니다. 우리는 그 사랑을 다 따를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을 마음에 새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그 사랑의 아주 작은 모습이라도 본받고 따라가려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 사랑을 따라가지 않으려고 한다면 우리는 양을 위해서 우리의 무엇을 버리려고 하기 보다는 그냥 양을 버리려고 할 것입니다.
애완동물을 키우다 보면 버려야 할 것이 많습니다. 사실 그 버리는 것으로 인해서 얻는 것도 있습니다. 그 얻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버릴 것을 아까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만큼의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 귀한 가치를 보셨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목숨보다 성도가 더 귀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목숨을 버리고 성도를 살리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주저하지 않고 성도를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그것은 영원 속에서 단 한번에 이루어진 온전한 죽으심이었습니다. 그 다음엔 그 죽으심은 날마다 기억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기억을 다시 재현하는데 주저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면 예수님 자신은 그렇게 하신 이유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실까요? 그에 대해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10:16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요]10:17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예수님은 그 양들 뿐만 아니라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도 내가 인도하여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이신 예수님께 있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현재 있는 성도만 보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미래에 있을 성도도 보시는 것이었습니다. 그 성도들은 사실 계속해서 나타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생명만큼이나 많은 것이 바로 그 성도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목숨도 영원하지만 나타나게 될 성도들도 역시 영원했습니다. 앞으로 미래에 끊임없이 생겨날 성도들을 위해서 예수님은 자신의 목숨을 버리십니다. 왜냐하면 그들을 한 목자이신 예수님 자신에게로 인도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예수님의 끊임없는 죽으심과 계속해서 목숨을 버리시는 것에 대해서 예수님은 그 목숨을 다시 얻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성도를 위해서 죽으시고 그들의 죄를 사해 주십니다. 그리고 성도를 위해서 다시 살아나셔서 그들을 의롭게 하십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죽으심과 다시 살으심의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을 계속해서 반복하심으로 예수님이 나타내시는 것은 영원한 사랑하심입니다. 예수님은 죽으심의 기억을 쉬지 않고 반복하시면서 사랑하기를 지속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의 삶 속에서 다시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희생의 사랑을 과거의 성도들이나 현재의 성도들 뿐만 아니라 미래의 성도들을 위해서 하시는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영원한 사랑을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그로 인해서 아들 되신 예수님을 사랑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도 역시 그렇게 세상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역사는 계속 창조되며 계속 유지되며 계속 발전합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 때문에 그렇습니다.
부모님은 능력만 된다면 계속해서 자녀들을 사랑할 것입니다. 그 사랑은 중단되지 않을 것입니다. 나이나 체력이나 노화나 어떤 식으로든지 오는 그 사랑의 한계 속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영원한 사랑을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결코 쇠하지 않으시기에 그 사랑은 영원합니다. 그 영원한 사랑을 사모하면서 우리도 예수님과 같이 그 영원한 사랑의 표현에 함께 하기를 원합니다. 천국에서 이어질 놀라운 사랑의 표현을 우리는 지금 이 세상에서 연습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에서 예수님을 사랑을 나타내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비록 한계는 있겠지만 예수님의 사랑을 묵상하고 본받고자 한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한계에 이르기 전까지는 주님의 사랑을 나타낼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닮아가는 놀라운 사랑의 표현이 되는 이 신앙생활 속에서 더욱 예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거룩한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주님의 사랑이 우리 속에 풍성하게 임할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넘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