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저희가 가로되 우리가 유대에서 네게 대한 편지도 받은 일이 없고 또 형제 중 누가 와서
네게 대하여 좋지 못한 것을 고하든지 이야기한 일도 없느니라
22이에 우리가 너의 사상이 어떠한가 듣고자 하노니 이 파에 대하여는 어디서든지 반대를 받는줄
우리가 앎이라 하더라
23저희가 일자를 정하고 그의 우거하는 집에 많이 오니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의 일로 권하더라
24그 말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도 있어
25서로 맞지 아니하여 흩어질 때에 바울이 한 말로 일러 가로되 성령이 선지자 이사야로 너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옳도다
26일렀으되 ㄱ)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27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을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와 나의 고침을 받을까 함이라 하였으니
28그런즉 하나님의 이 구원을 이방인에게로 보내신줄 알라 저희는 또한 들으리라 하더라
지금까지 우리는 전도의 과정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일반적으로
전도가 그러할 뿐만 아니라 상담적인 전도는 더욱 이러한 과정을 갖습니다. 일반적인 전도의 과정은 교회로의 초대와 그에 대한 응답이지 않습니까?
이 단순한 2가지 과정을 구체적으로 세분화하면 4가지 과정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각각 교회로의 초대는 [1관계인식]-[2불신이해]로 나뉩니다.
여기서 불신이해의 과정이 있다는 것이 상담전도의 특별한 점입니다. 교회 안다니는 사람의 불신을 이해할 때 비로소 복음을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가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에 초대에 대한 응답을 2가지의 과정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단순히 나온다면 다행이지만 그렇게 단순하게 나오지 않을 때 그 과정을 [3복음적용]-[4신앙결신]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도 복음을 구체적으로
전달한다는 것이 특별한 점입니다. 대개 교회 와서 복음을 전하지만 교회에 오기 전에 복음을 전할 때 처음 복음이 올바르게 증거됩니다. 그런 다음에
교회에 와서 그 복음에 대해서 더 많은 내용을 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복음의 내용을 듣고 나서 마침내 신앙적인 결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생각해 볼 때 그 과정이 성경에 나오는 것과 동일함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전도의 이야기 속에서도 역시 이와 같은 장면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바로 사도 바울이 로마에서 복음을 전할 때의
장면입니다. 21절 말씀입니다.
“21저희가 가로되 우리가 유대에서 네게 대한 편지도 받은 일이 없고 또 형제 중 누가 와서
네게 대하여 좋지 못한 것을 고하든지 이야기한 일도 없느니라
22이에 우리가 너의 사상이 어떠한가 듣고자 하노니 이 파에 대하여는 어디서든지 반대를 받는줄
우리가 앎이라 하더라”
그 이전에 사도 바울이 복음의 내용에 대해서 증거하였을 때 사람들은 거기에 대해서 더 듣고자
하였습니다. 그의 사상이 어떠한지에 대해서 더욱 듣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때로는 반대를 받는 그 복음의 내용에 대해서
때로는 관심을 끄는 그 복음의 내용에 대해서 로마에 있는 사람들은 더 많은 이야기를 듣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바울이 우거하던 집에 많이
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그렇게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복음에 대해서 설명했습니다. 또한 성경에 대해서 가르쳤습니다. 23절입니다.
“23저희가 일자를 정하고 그의 우거하는 집에 많이 오니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의 일로 권하더라”
결국 그들이 관심이 있었던 것은 그 복음의 내용이었고 그 내용을 전하는 것은 사도 바울도 기뻐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증거했습니다.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이란
구약성경을 의미했는데 그것을 가지고 예수님의 사역과 말씀을 풀이하고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그분을 믿도록 권했습니다.
여기서 사도바울이 한 일이 바로 교회가 하고 있는 일입니다. 교회
안에서 하나님 나라가 증거되고 성경을 통해서 예수님의 일을 권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의 최종적인 설명은 교회에 나가도록 권유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어떤 복음에 대한 설명도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것만큼 잘 이루어질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4신앙결신] 단계에서 해야 하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교회에 나오셔서 복음을 좀더 들어 보시겠습니까?”
교회에 나와서 이 복음에 대해서 좀더 들어볼 수 있고 그러한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서 교회로 초대를
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나와야 하는 이유, 교회에 나와보라고 하는 이유는 바로 복음을 더욱 듣기 위해서 인 것입니다.
옛날 황해도 신천에 있는 장개교회 오명신 집사라는 분이 있었다고 합니다. 예수 믿고 교회 다닌다는 이유로 남편에게 매를 수 없이 맞았으며, 여러번 집에서 쫓겨났고 성경찬송도 불태워졌었습니다. 그러나
오 집사는 그 남편의 영혼구원을 위해 계속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어느 날 술에 취한 채 집에 들어온 그의 남편은 부흥회에 참석하러 간 아내를 찾으로
갔습니다. 어두컴컴한 예배당 안에 자기 아내라고 생각된 여자의 머리채를 잡고 밖으로 나와 두들켜 팼습니다. 비명을 지르며 쓰러진 뒤에 보니, 그
여자는 자기 아내가 아니고 면장부인이었습니다. 겁에 질린 그는 살려 달라고 애원했습니다. 면장부인인 집사는 두 가지 일을 하면 감옥에 보내지 않겠다고
했답니다. 앞으로 오집사를 때리지 말 것과 교회에 나와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그리하여 그 다음날부터 예수를 믿고 교회를 나가게 되었고 집사까지
되었다고 합니다. 진정한 변화는 교회를 나오면서부터 시작됩니다. 교회에서 복음이 무엇인가를 계속 배워나가는 것입니다. 그럴 때 복음의 내용에 대해서
비로소 올바른 반응을 할 수 있게 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교회에서의 복음의 반응은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사도 바울에게서 복음을 들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은 것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24절을 보십시오.
“24그 말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도 있어
25서로 맞지 아니하여 흩어질 때에 바울이 한 말로 일러 가로되 성령이 선지자 이사야로 너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옳도다”
그들 중에는 믿는 사람도 있었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교회에 나와서 복음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반응은 상이한 것입니다. 그럴 때 사도바울은 이사야 선지자로 예언하게 하신
내용을 기억하였습니다. 그 내용은 복음을 받았다고 해서 다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씀이었습니다.
“26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27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을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와 나의 고침을 받을까 함이라 하였으니”
마음이 완악해졌을 때 그 귀는 둔하여 졌고 그 눈은 감겨졌습니다. 그럴 때 그들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아무리 듣고 보아도 마음 속의 완악함이
있을 때에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 완악함이란 자신의 욕심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욕구입니다. 그것이 너무 강할 때에는 아무리 들어도 아무리
보아도 다 소용이 없게 되어버립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리라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교회에 들어와도 다 믿는 것이 아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낙심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금은 때가 아닐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시 소망하고 기다라고 바라볼 때 또다른 하나님의 길이 열리고 하나님의 때가 준비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자신의 복음증거를
들었으나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 때문에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받을 수 있는 또 다른 사람들에게로 나아갔습니다.
“28그런즉 하나님의 이 구원을 이방인에게로 보내신줄 알라 저희는 또한 들으리라 하더라”
이방인들이 바로 그 좋은 대상이었습니다. 지금까지는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하였으나 이제는 이방인들이 복음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그 복음내용을 들으며 달라질 수 있을 것입니다. 유대인이 아니라면 이방인들에게,
이 나라의 이방인들이 받지 않는다면 저 나라의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은 계속 전해질 수 있습니다. 우리도 이사람이 아직 때가 아니라면 저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렇게 복음을 전하다가 보면 이사람이 또한 복음의 때가 되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복음을 전할 때에 우리는 좀더 듣고자 하는
사람들을 계속 만나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복음에의 열정을 버리지 않는다면 계속 더 나아가 복음을 듣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윌버트 챠프만(Wilbert Chapman) 박사가 4,500명이
모인 집회에서 얻은 통계입니다. 400명은 10살 이전에, 600명은 10-14살 사이에, 600명은 14-16살 사이에, 1,000명은
16-20살 사이에 예수를 영접하였고 겨우 24명만이 36세 이후에 신앙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흥미를 느낀 챠프만 박사는 더 광범위하게 조사하여
다음과 같은 통계를 얻었습니다. 25세 이후에는 천명에 겨우 한 명, 35세 이후에는 5만 명에 겨우 한 명, 45세 이후에는 20만 명에 겨우
한 명, 55세 이후에는 30만 명에 겨우 한 명, 75세 이후에는 70만 명에 겨우 한 명 꼴로 예수를 영접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통계를 볼
때 우리가 구원얻는 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 많은 사람을 만나야만 합니다. 그래야 바로 그 구원얻는 한 사람을 교회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 좀더 복음을 듣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기억하고 교회로 그들을 인도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그들이 복음을 듣고 진정으로 하나님께 반응하고 그로 인해서 영혼의 구원을 얻게
되는 놀라운 열매가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