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상담]] 44행 22; 3-9 과거에 바울이 주님을 믿지 않았던 이유2Loading the player... Loading the player... [크게보기]
44행 22; 3-9 과거에 바울이 주님을 믿지 않았던 이유2_2e
2020. 11. 22. 주. 주일오후. 온라인 설교.
*개요: 전도비전
[행]22:3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는 자라 [행]22:4 내가 이 도를 박해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니 [행]22:5 이에 대제사장과 모든 장로들이 내 증인이라 또 내가 그들에게서 다메섹 형제들에게 가는 공문을 받아 가지고 거기 있는 자들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어다가 형벌 받게 하려고 가더니 [행]22:6 가는 중 다메섹에 가까이 갔을 때에 오정쯤 되어 홀연히 하늘로부터 큰 빛이 나를 둘러 비치매 [행]22:7 내가 땅에 엎드러져 들으니 소리 있어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행]22:8 내가 대답하되 주님 누구시니이까 하니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라 하시더라 [행]22:9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빛은 보면서도 나에게 말씀하시는 이의 소리는 듣지 못하더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믿지 않았던 시절이 있습니다. 모태신앙이라고 해도 역시 믿음이 없던 시절이 있습니다. 날 때부터 교회에 다닌 사람은 있어도 날 때부터 믿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원죄를 안고 태어나며 그 원죄 속에서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게 되기 때문에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난 뒤부터 예수님이 구세주이심을 믿게 되고 그럴 때 구체적으로 믿음이 생기게 됩니다. 그리고 그 시작은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믿음은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 믿음은 사탄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믿음을 사탄이 가지고 있다고 해서 사탄이 구원받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진정한 믿음이란 단지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더 나아가 예수님이 나의 구세주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믿음입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비로소 그 신앙에 따른 삶이 형성되기 때문입니다. 산타클로스도 있고 하나님도 있다는 식의 존재에 관한 믿음은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를 갖지 않습니다. 해가 있고 달이 있고 산이 있고 물이 있다는 것이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를 갖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분이 우리와 어떤 관계에 있고 우리가 그분에게 어떻게 해야하는가를 생각할 때만이 비로소 의미를 갖게 되는데 그러려면 구원받은 자로서의 관계가 있어야 합니다. 그전의 믿음이란 단지 기대일 뿐이고 그 기대는 맞을 수도 있지만 틀릴 수도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믿음은 바로 하나님이 나의 구주이심을 믿는 믿음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믿음이란 무엇인가를 정의해 놓고 나면 그 믿음을 갖지 않았을 때가 밝혀집니다. 모태신앙인들에게 그런 때란 매우 사소해 보이는 시기입니다. 아무 생각없이 교회에 가는 시절이지요. 교회가는 것을 힘들어하고 교회에 가야 하는 의무를 부담스럽게 생각하는 시기이기도합니다. 아주 사소해보이고 어릴 때이기는 하지만 모든 모태신앙인들에게 하나님을 온전히 믿지는 않는 그런 시기는 분명히 있습니다. 하지만 모태신앙이 아닌 신앙인들에게는 이러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시기는 너무나 구체적입니다. 나이가 들어서 믿게 되었을 때에는 더욱 선명합니다. 그런 시기를 생각해보면 누구에게나 불신의 이유라는 것이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믿지 못할 때, 믿지 않을 때 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이 종류별로 다양하고 그러한 불신의 이유들을 종류별로 이해하고 나면 불신의 이유들이 무척 공감이 갈 것입니다. 이해하기 전에는 공감하기 힘들었겠지만 이해를 하고 난 다음에는 공감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불신에 대해서 공감을 할 때에 비로소 그 불신자들에게 다가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상담전도 과정의 첫 번째로, [1관계인식]을 하고 새로운 사람을 만난다든지 기존의 아는 사람과 전도적인 관계를 갖게 되었다고 한다면 그 다음 단계에서 그 사람의 상태와 만나게 됩니다. 그 사람은 불신자로서 불신의 이유들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이유를 알게 되는 것이 [2불신이해]의 단계입니다. 그 이유들에 대해서 거부감이나 절망감을 갖지 않고 그속에서 하나님의 복음이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을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불신의 이유들을 잘 이해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필요합니다.
사도바울은 예루살렘에 들어갔다가 유대인들에게 잡혀서 위협을 받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로마군인들이 애매히 죽게 되는 것을 막아주었고 사람들에게 말할 기회를 얻게 되어서 많은 유대인들 앞에서 바울은 복음을 증거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처음 말한 것은 어떻게 자신이 불신자였다가 신자가 되었는가를 설명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처음 복음을 믿지 못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행]22:3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는 자라” 그는 말하기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자라고 배워서 율법의 엄한 교훈을 따르는 바리새인이었으며 하나님께 대해서 열심을 갖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율법을 잘 따르는 자였고 하나님께 대해서 열심을 갖고 있었던 것이 무엇이 문제였을까요? 하지만 그가 가지고 있던 율법의 엄한 교훈과 하나님께 대한 그자신의 열심이 바로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로 인해서 그가 행한 일은 믿는 자들을 핍박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행]22:4 내가 이 도를 박해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니” 그 모든 율법의 엄정함과 하나님께 대한 열심이 그리스도를 믿는 도를 핍박하고 사람을 죽이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기는 것이 되어진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섬기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뜻을 따르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럴 때 그가 죽인 사람은 스데반이었는데, 스데반이 하나님과 예수님을 바라본다는 증거를 하였어도 바울의 마음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의 마음으로 꽉 차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바라보려고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의 문제는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자신이 최고의 선생으로부터 교육받았다는 자부심, 율법의 엄한 교훈을 따랐다는 자존감 속에서 다른 사람들이 구원에 대한 것을 알지 못하게 하겠다는 자신의 욕심이 결국 예수님을 핍박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는 이방인들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믿고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을 싫어하였고 그래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사도 바울이 ‘욕구’에 해당하는 불신의 이유가 있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은혜를 나타내 주셨습니다. 친히 나타나셔서 그 자신이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임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구원해 주시면서 복음에 대해서 알려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서 바울은 그 불신의 이유를 버릴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절대로 바울에게 억지로 믿게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에게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그의 불신의 이유가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 하는 것을 말입니다. 사도 바울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은 핍박받으시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그에게 증거된 희생하시는 예수님에 대한 복음의 내용이었습니다. 그것을 깨달았을 때 바울은 자신의 무지를 깨달았고 즉시 눈이 멀어서 앞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까지 바로 그렇게 앞을 보지 못하는 자였음이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아이러니 하게도 그는 구원을 받아 자기가 그렇게 싫어하던 복음의 전파를 앞장서서 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또한 그렇게 싫어하던 사람들의 구원을 이방인에게까지 가서 증거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불신의 이유 속에 있는 그 어리석음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맞는 복음을 증거해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 속에서 그에게 복음이 전달 되어질 수 있고 이해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에게 말씀해 주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럴 때 그의 삶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완전히 변화됩니다. 진정으로 구원받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 정말 중요한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그 말씀을 통해서 그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구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6,7절을 보십시오. “[행]22:6 가는 중 다메섹에 가까이 갔을 때에 오정쯤 되어 홀연히 하늘로부터 큰 빛이 나를 둘러 비치매 [행]22:7 내가 땅에 엎드러져 들으니 소리 있어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바울은 예수님이 거짓 선지자라고 생각했지만 그분은 참된 선지자이셨고 그를 부정하는 것은 그를 박해하는 것임을 알게 되었을 때 그는 주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 믿음이 그를 회개하게 하였고 변화되어서 생명을 얻을 수 있게 하였습니다. 그러지 않았다면 그는 예수님을 박해했던 죄를 결코 용서받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불신의 깨달음을 이제도 전도를 통해서 말해줄 수 있습니다. 그럴 때 각 사람에게 놀라운 구원의 열매가 이루어집니다.
사람들의 불신의 이유 속에 바로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신 이유가 있습니다. 그렇게 불신이 있고 악한 마음이 있기 때문에 예수님이 죽으실 수 밖에 없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게 어리석고 모자라며 추하기 때문에 예수님이 대신 죽으셨구나라는 이해를 하게 됩니다. 그 죽으심의 은혜와 희생을 전하기 위해 그의 악함과 추함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그럴 때 복음은 의미를 갖고 예수님이 깨끗한 자를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병든 자를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을 실감하게 됩니다. 그런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바울도 구원을 얻을 수 있었고 바로 나도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 은혜 속에 사람을 변화시키시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섭리를 깨닫게 됩니다. 불신자에게 있는 이 불신의 이유를 이해하고 복음을 전하는 과정을 통해 상담전도의 은혜를 누려보시기 바랍니다. 주변의 어느 누구에게든지 그의 안타까운 불신의 이유가 사라지고 온전히 구원의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또한 그러한 불신의 이유를 바라보면서 나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을 기뻐하며 감사할 수 있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전도의 삶이 이번 주에도 놀랍게 펼쳐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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