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역사] 44행 17; 16-21 세상의 철학과 기독교의 진리Loading the player...
44행 17; 16-21 세상의 철학과 기독교의 진리_2
2023. 9. 10. 주. 주일오후.
*개요: 계시론, 기독교역사 [행]17:16 바울이 아덴에서 그들을 기다리다가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하여 [행]17:17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장터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 [행]17:18 어떤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새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냐 하고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부활을 전하기 때문이러라 [행]17:19 그를 붙들어 아레오바고로 가며 말하기를 네가 말하는 이 새로운 가르침이 무엇인지 우리가 알 수 있겠느냐 [행]17:20 네가 어떤 이상한 것을 우리 귀에 들려 주니 그 무슨 뜻인지 알고자 하노라 하니 [행]17:21 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것 이외에는 달리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
기독교 역사 속에서 내부적인 성장과 발전의 과정과 함께 그 다음으로 접하게 되는 것은 세상 학문과의 관계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 기독교 복음이 세상에 전파되는데 전파되면 될수록 접하게 되는 것은 세상의 학문입니다. 그럴 때 그 학문과 기독교가 어떤 관계를 갖는지를 이해하면 접할 때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관계를 이해하지 못하면 매번 관계가 될 때마다 하나님의 은혜가 깎여 나갈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의 학문을 통해 하나님의 복음과 기독교의 의미가 더욱 빛이 날 것인지 아니면 반대로 점차 사라지게 될 것인지는 그 관계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도행전에 나타난 사도 바울의 경우를 통해서 그 관계를 어떻게 정리해 나갈 수 있는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아덴에서 제자들을 기다리다가 그리스 철학자들을 만나게 됩니다. 바울은 베뢰아에서 복음을 전했는데 유대인들이 데살로니가에서 바울을 박해하려고 찾아와서 급히 아덴으로 피신을 했고 그곳에서 실라와 디모데를 만나기로 했습니다. 그들을 기다리던 중 그리스 철학자들과 마주치게 된 것이었습니다. “[행]17:16 바울이 아덴에서 그들을 기다리다가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하여 [행]17:17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장터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 [행]17:18 어떤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새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냐 하고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부활을 전하기 때문이러라” 바울은 아덴에서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그리스도와 부활에 대해서 증거하였고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은 바울이 전하는 것이 새로운 신에 대해서 말하는 것임을 알고 그에 대해서 더욱 듣고자 하였습니다. 에피쿠로스 철학은 쾌락주의 감각주의를 주장하는 철학사조였고 스토아 철학은 금욕주의, 유물주의를 주장하는 철학사조였습니다. 이 둘의 극명한 대조는 그 당시 그리스 철학의 양쪽 극단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도 알 수 있지만 세상의 철학은 언제나 한 부분이거나 한쪽 극단에 속합니다. 그들에게는 자신들에게만 해당되는 논리가 있고 그룹이 있으며 사조가 있습니다. 또한 그들과 반대되는 또 다른 부류가 있고 언제나 부분적일 뿐이며 서로 경쟁하는 입장에 있습니다. 이에 반해서 기독교의 진리는 항상 모든 것에 적용되며 모든 것을 포함하고 모든 것을 다룹니다. 인간의 죽음과 내세의 문제도 어느 일부의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인간에게 동일하게 해당되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하나님은 항상 전세계적이고 전우주적이며 전시대적입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심판과 구원의 길을 주님은 보여주십니다. 이것을 이해할 때 세상의 학문과 철학과 지식은 기독교의 진리 앞에서 항상 부분적이며 일시적이고 유한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 차이와 관계를 생각하면 세상 학문과 접하게 될 때 그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 영향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세계가 세상의 세계보다 더 크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증거하면서 그들에게 그리스도와 그분의 부활과 구원에 대해서 말하였습니다. 그리스 철학자들에게는 한낱 새로운 신에 대한 이야기 정도 일 뿐이었지만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의 구원과 생명을 전하는 일생일대의 가장 중요한 순간이었습니다. 그 차이가 바로 19절부터 나옵니다. “[행]17:19 그를 붙들어 아레오바고로 가며 말하기를 네가 말하는 이 새로운 가르침이 무엇인지 우리가 알 수 있겠느냐 [행]17:20 네가 어떤 이상한 것을 우리 귀에 들려 주니 그 무슨 뜻인지 알고자 하노라 하니 [행]17:21 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것 이외에는 달리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 그리스 철학자들과 시민들은 사도 바울을 아레오바고로 데리고 가서 바울의 새로운 가르침에 대해서 듣고자 했습니다. 그럴 때 그들은 이상한 것, 새로운 것, 신기한 것을 듣는데 관심이 있었을 뿐입니다. 그들의 사고는 항상 쾌락주의든 금욕주의든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이루는 데에만 머물러 있었습니다. 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에 관심이 있었던 것뿐입니다. 하지만 복음을 전하는 사도 바울에게는 전혀 다른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기회였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의 선포였습니다. 그래서 아레오바고에서의 유명한 설교가 나타나게 되었고 그것은 그리스 사람들에게는 별다른 의미 없는 사소한 사건이었지만 기독교 역사 속에서는 하나님께서 그 복음의 세계를 세상 사람들에게 나타내는 영광스러운 사건이었습니다.
우리가 믿는 이 기독교에 대한 이해가 바로 이러해야 합니다. 세상 학문에 압도되는 신앙에 대한 이해가 아니라 세상의 모든 지식과 지혜와 수준을 상회하는 것이 바로 우리에게 계시된 하나님의 세계입니다. 그 세계의 풍성함과 영광스러움을 항상 생각한다면 그것을 증거하고 설명하며 나타내는 것이 우리에게 항상 기쁘고 감사하며 의미 있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세상 학문과 접할 때마다 우리에게는 기회가 생기는 것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는 지금도 그 아레오바고가 성지 순례의 관광명소가 되고 기독교 신앙의 전통이 나라의 문화와 유산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계시를 중요하게 여기고 그 완전하심을 항상 바라볼 때 세상 학문의 한계를 넘어서 하나님 뜻의 풍성함을 항상 기뻐하며 살고 그 속에서 구원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세상 철학자들과 만나고 있는 사도 바울의 입장이라는 것을 생각하고 그 관계 속에서 항상 하나님의 지식의 영광을 생각할 때 더욱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하고 그 나라 속에서 살아가는 한 순간 한 순간을 경험하게 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원리를 기억하고 기독교의 신앙진리의 풍성함을 붙들어야 하겠습니다. 각자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상에 나타내는 온전한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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