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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시 18; 1-3 바위 안으로 피하는 성도들_2
2023. 7. 2. 주. 주일오후. 온라인설교.
*개요: 성지순례-메테오라
[시]18:1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시]18:2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시]18:3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성지순례 여정에서 델피 신전 유적에서 그 다음으로 방문한 곳은 메테오라 수도원이었습니다. 이곳의 특별한 점은 바위산 위에 동굴이 있고 그 다음에 수도원이 건설되었다는 것입니다. ‘메테오라’라는 뜻은 ‘공중에 매달려 있는’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만큼 이 지역의 바위산들은 웅장하며 장엄했습니다. 정말 공중에 매달려 있는 바위산과 같았습니다. 처음 이 지역에 수도사들이 들어온 것은 11세기 부터 였다고 합니다. 이슬람 투르크족의 종교박해를 피해서 들어와서 바위산 속에서 수행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것도 놀랍지만 더 놀라운 것은 14세기 부터는 아예 바위산 위에 수도원을 건축했습니다. 16세기에는 24개의 수도원까지 있었지만 지금은 6개 만이 남아있고 그 중에서 한 곳인 바를람 수도원을 방문할 수 있었습니다. 차에서 내려 계단을 걸어 올라갔는데 원래 이곳은 계단이 없고 도르래로 줄을 내려서 사람과 물건을 옮겼었다고 합니다. 1920년에야 비로소 계단이 생겨서 출입이 편리해졌지만 그 전에는 철저히 외부와 차단된 장소였습니다. 이 수도원 안에는 그리스 정교회와 비잔틴 양식의 예술작품과 진기한 유물, 그리고 프레스코 성화(이콘)가 그려져 있습니다. 프레스코 성화는 회반죽을 벽에 바르고 수분이 있는 동안 채색하여 완성하는 회화기법입니다. 사진을 찍지 못하게 해서 자료는 없지만 이 성화가 아주 웅장했습니다. 높은 꼭대기에서부터 온 사방에 이 벽화가 그려져 있고 그 안에는 기독교 전파의 역사와 학대와 고문의 사건들과 성경의 내용들이 세밀하게 그려져 있었습니다. 그런 내용을 생각해 보면 수도원은 단순히 거주를 위해서 지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복음의 내용을 기록하고 묵상하며 간직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수도사들이 바위 동굴 틈에 들어가서 기도하거나 고행을 하거나 혹은 수도원을 짓고 그곳에 살던 모든 일들은 나름대로 박해의 시대에서 하나님을 찾는 신앙의 행동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도 그러한 신앙의 고백과 간구가 나타나 있습니다. “[시]18:1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시]18:2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시]18:3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시편 말씀에 나오는 것은 시편 기자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의지하면서 바위요 방패가 되시는 하나님께로 나아갔던 신앙의 고백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께 나아갔을 때 그는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었고 그러한 믿음과 신앙 속에서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의지한다면 우리도 주님이 우리의 반석이시요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의지하면서 왜 반석이 아니시고 요새가 아니시고 건지는 자가 아니시고 하나님이 아니시냐고 의문을 갖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주님이 우리를 붙드시는 자임을 믿고 의지해야만 주님을 올바르게 고백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도 주님을 나의 피할 바위시요 방패시요 구원의 뿔이시요 산성이시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정말로 그렇게 주님께 피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 피하기 위해서 바위 산을 찾고 그 바위 산 위에 수도원을 지었던 수도사들처럼 우리도 우리의 삶 속에 주님을 찾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러한 삶 자체가 우리의 역사가 되고 유적이 되며 결실과 열매가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신앙생활을 했다는 것을 스스로 자각할 수 있습니다.
지금도 우리의 삶 속에는 주님께 피할 수 있는 많은 장소가 있습니다. 바위 산이나 바위 위 수도원을 꼭 찾아갈 필요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그런 분이시라고 고백하고 의지하기만 하면 우리가 있는 모든 곳에서 하나님의 도우심과 힘주심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왜 원수가 나타나며 왜 박해가 생기고 왜 고통이 찾아오는가를 주님께 항변하려고 한다면 주님을 의지할 수 없습니다. 이미 생긴 모든 어려움 속에서 주님을 찾고자 할 때 그 속에서 주님의 도우심과 힘주심을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메테오라 수도원을 나오면서 주변의 여러 절경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수도원도 멋진 관광지였지만 주변 자연환경도 역시 훌륭한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어떤 아름다운 자연 광경보다 그곳의 자연은 더 경건하고 은혜롭게 느껴졌습니다. 이미 그곳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간절함으로 수세기 동안 묵상과 고행과 기도가 이어졌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도 고통과 어려움이 있지만 그럴 때 어떻게 하는가가 그 시기의 의미를 결정합니다. 힘들고 어려워서 나름의 즐거움을 추구하려고 했다면 그곳은 너무나 타락한 장소가 되고 부끄러운 시기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힘들고 어려울 때 은혜의 도우심을 간구했다면 나중에 그곳과 시기는 너무나 경건하고 자랑스러운 장소와 시기가 될 것입니다. 현재 우리의 삶을 바로 그렇게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서 남긴 그림이 놀라운 것이 되고 그럴 때 했던 일들이 기념할 만한 일이 될 것입니다. 수도사들이 고통과 박해의 시기를 묵상과 찬양으로 바꾸었던 것처럼 시편 기자가 원수로부터의 고통을 하나님께 대한 간절한 사모함으로 바꾸었던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삶을 더욱 은혜로운 것으로 바꿔 나가야 하겠습니다. 그럴 때 커다란 결실과 상급이 넘칠 것입니다. 이러한 깨달음과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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