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쾌활함] 48갈 2; 16-21 성도가 살아가는 목적2_5Loading the player...
48갈 2; 16-21 성도가 살아가는 목적2_5
2020. 2. 14. 금. 금요철야.
*개요: 갈라디아서 연구 [갈]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갈]2:17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드러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갈]2:18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갈]2:19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갈]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2:21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갈라디아서에는 바른 복음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복음을 만드는 가장 큰 근원은 율법에 대한 생각입니다. 율법적인 규칙이 복음에 따라서 사는 삶에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율법과 복음의 관계는 서로 겹치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이 종결되고 그 다음부터 복음이 시작된 것이기 때문에 율법이 끝나는 곳에 복음이 시작됩니다. 그것을 적용하면 바른 복음이 이루어집니다. 예를 들면 만약 우리가 새로운 지역에 가서 살게 된다면 거기에서는 여러가지 규칙들이 주어지게 됩니다. 이곳에서는 이렇게 살아야 하고 저렇게 행동해야 하며 이런 점은 조심해야 한다는 식의 규칙들이 제시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규칙들을 지키는 것은 그 환경에서 살아가는 삶을 결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환경에서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제한일 뿐이지 그 규칙을 지키기 위해서 살아가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마치 골절을 고치기 위해서 기브스를 하다가 풀고 치아교정을 하기 위해 보철기를 착용하다가 빼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신앙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 규칙의 존재를 알게 됩니다. 하지만 신앙생활의 목표가 규칙을 지키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더 크고 귀하고 놀라운 일을 이루기 위해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규칙에 얽매이고 그 규칙을 지키는 것에 집중하다 보면 진정한 본질을 잃어버리게 되고 그로 인해서 원래의 목적을 이루지 못하게 되고 맙니다. 이러한 규칙이 바로 율법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가져야 하는 본질은 복음의 은혜입니다. 사람들은 율법을 지켜야 의롭게 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율법은 우리를 죽음에 이르게 할 뿐입니다. 16절에 말하는 것처럼 율법적인 행위로 우리가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의로운 행위이지 율법을 지키는 것이 의로운 행위가 아닙니다. 16절을 보십시오. “[갈]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율법은 원래부터 우리가 십자가에 못박히게 하는 것입니다. 율법 속에서 십자가에 못박히지 않을 사람이 없습니다. 무엇이 잘못인지를 드러내어서 벌을 주게 하기 위해서 율법이 존재합니다. 율법은 살리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죽이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율법으로는 살릴 수가 없습니다. 오직 은혜로 인해서 우리는 살게 됩니다. 그 은혜는 우리 대신에 십자가의 형벌을 받은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대신에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 귀한 은혜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단지 나의 행위로 그 예수님의 은혜를 덮어버리고자 할 때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를 폄하하는 것입니다. 은혜를 따라서 의로움을 이루려고 하다가 죄를 짓게 된다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직 의로움을 이루려고 했던 것 뿐이고 그리스도께서는 의를 이루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갈]2:17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드러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갈]2:18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과거에 주일에 상행위의 금지나 교회에서의 드럼연주 등은 전부 과거의 규칙이었고 그 속에서는 죄가 되었지만 더 적극적인 신앙생활을 위해서 그 규칙을 어기는 것은 죄를 짓게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율법을 극복하게 하는 복음이 율법에 대해서 죄를 짓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복음에서 집을 떠났다가 돌아온 탕자가 아버지 앞에서 자신을 죄인으로 봐달라고 했습니다. 돌아와서 자신을 정당화하려고 했다면 그 자체가 오히려 어리석은 일이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율법을 지켰기 때문에 의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때문에 의인이 되었습니다. 죄인은 크던 작던 전부 죄인일 뿐이며 그 속에서 어떻게 해서든지 스스로의 공적으로 자신을 의롭게 하려는 모든 시도는 무지하고 미련한 일일 뿐입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산다는 것, 우리가 그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산다는 것의 의미를 알지 못하면 죄인이 된다는 것이 무거운 짐처럼 여겨지지만 그 의미를 알면 온전한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율법을 통해 죽음에 이르게 되지만 은혜를 통해 다시 살아나게 됩니다. 우리가 율법을 배우고 지키는 것은 결국 우리를 의롭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죽이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죄인인 것과 구제불능의 절망적인 인간인가를 알려주기 위해서 율법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율법에 대해서 죽을 때에만 비로소 하나님께 대해서는 살 수 있습니다. “[갈]2:19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그리고 이것은 정반대의 결과를 갖게 합니다. 우리가 율법을 알고 그속에서 자신이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임을 알때 비로소 하나님께 대해서 항복합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때 그렇게 죽은 것 같이 된 우리들을 살리십니다. 율법으로 죽은 자가 되고 은혜로 살아나는 자가 되어야 온전히 살아나게 됩니다. 동물구조대가 위험에 빠진 동물을 구해주려고 할 때 그 동물은 필사적으로 도망갑니다. 하지만 그가 비로소 잡힐 때에 그 동물은 살아날 수 있습니다. 잡고자 하는 것은 죽이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살리고자 함이었던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우리가 이러한 감격을 통해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하나님을 위해 살아가게 하십니다. 그래서 이렇게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새로워진 그리스도인들은 그 은혜를 기뻐하고 감사하고 고마워하면서 하나님을 위해 살려고 노력하게 됩니다. “[갈]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그의 삶은 180도 완전히 변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사신 것이 되었습니다. 육체 가운데서 살아가는 삶의 목적은 나를 사랑하셔서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위해서 사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느 신앙심 깊은 성자의 고백이 아니라 우리 모든 믿는 자들의 고백입니다. 소요리 문답의 제 1번에서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생의 목적이 바로 이것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율법을 통해 의로워지려고 하지 말고 은혜를 얻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이 원리를 여러분이 믿든지 안 믿든지 간에 여기에 대한 분명한 증거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괜찮은 사람들이었다면 우리를 위해 굳이 죽으시지 않아도 되셨을 것입니다.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고 이제 인생의 목적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폐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 은혜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갈]2:21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주님의 은혜를 폐하지 말고 그 은혜를 받아들이시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살아가는 목적이 유익을 위해서도 아니고 편안을 위해서도 아니고 쾌락을 위해서도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리고 그를 즐거워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삶에 복을 주시고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오늘 기도할 때에 이러한 그리스도의 은혜를 사모하며 기도합시다. 그럴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진정으로 구세주가 되어주실 것입니다. 이미 그러하셨지만 진심으로 내가 그리스도로 다시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은혜로 채워질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를 누리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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