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력] 16느 9; 1-6 조상의 죄와 다른 삶을 살고자 함 [74경건]Loading the player... .
16느 9; 1-6 조상의 죄와 다른 삶을 살고자 함_2
2022. 11. 13. 주. 주일오후, 영상
*개요: 느헤미야 연구, [74경건]
[느]9:1 그 달 스무나흗 날에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여 금식하며 굵은 베 옷을 입고 티끌을 무릅쓰며 [느]9:2 모든 이방 사람들과 절교하고 서서 자기의 죄와 조상들의 허물을 자복하고 [느]9:3 이 날에 낮 사분의 일은 그 제자리에 서서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낮 사분의 일은 죄를 자복하며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는데 [느]9:4 레위 사람 예수아와 바니와 갓미엘과 스바냐와 분니와 세레뱌와 바니와 그나니는 단에 올라서서 큰 소리로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고 [느]9:5 또 레위 사람 예수아와 갓미엘과 바니와 하삽느야와 세레뱌와 호디야와 스바냐와 브다히야는 이르기를 너희 무리는 마땅히 일어나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신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할지어다 주여 주의 영화로운 이름을 송축하올 것은 주의 이름이 존귀하여 모든 송축이나 찬양에서 뛰어남이니이다 [느]9:6 오직 주는 여호와시라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과 일월 성신과 땅과 땅 위의 만물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시고 다 보존하시오니 모든 천군이 주께 경배하나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나팔절을 보내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었고 그 속에서 초막절의 교훈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초막절의 명령을 순종하였고 이것은 그들에게 큰 기쁨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충성할 수 있을 때 그들은 하나님을 더욱 깨달을 수 있었고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한 이해가 있기에 그들은 자신이 누군지도 알 수 있었고 그로 인해서 그들은 계속해서 선순환을 이루어서 그들의 삶에 커다란 변화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오늘 말씀에 나타나는 그 놀라운 변화는 그들이 우상숭배를 회개하면서 하나님을 경배했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그렇게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은 그들이 지금까지 해오던 일을 다시 하는 것이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과정은 너무나 특별했습니다. 그 의미는 지난 날의 잘못을 자각하면서 앞으로의 의로움을 추구하겠다는 결심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느]9:1 그 달 스무나흗 날에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여 금식하며 굵은 베 옷을 입고 티끌을 무릅쓰며 [느]9:2 모든 이방 사람들과 절교하고 서서 자기의 죄와 조상들의 허물을 자복하고 [느]9:3 이 날에 낮 사분의 일은 그 제자리에 서서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낮 사분의 일은 죄를 자복하며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는데” 그들은 초막절의 즐거움만 누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24일째에 그들이 했던 것은 죄에 대한 자각이었습니다. 특히 명목상의 회개가 아니라 자신의 죄와 조상들의 허물을 자복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조상들만의 죄를 회개한 것이 아니었고 자신의 죄만 회개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이 둘을 모두 회개할 때 죄에 대한 온전한 자각이 있었습니다. 그럴 때 그 다음에 이어지는 하나님께 대한 경배가 의미가 있었습니다. 진심으로 그렇게 회개하면서 하나님께 나아가려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삶에서 이러한 마음 가짐을 가질 때 하나님께 온전히 나아갈 수 있습니다. 자신의 죄와 조상들의 죄를 깨닫는 것이 필요합니다. 어쩌면 그것은 자존심이 상하거나 유쾌하지 않은 마음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힘들어도 그렇게 회개할 때 미래에 대한 소망이 생깁니다. 죄에 대한 단절 속에서 의에 대한 연합이 이루어지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헌 옷을 버릴 때 새 옷을 입을 수 있습니다. 목욕을 할 때 몸이 깨끗해지게 됩니다. 그와 같이 회개를 통해서 우리는 새로운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온전한 회개를 통해서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이후에도 그러한 삶을 계속 해서 살았습니다. 무슨 죄가 있을까 싶지만 작은 죄를 자각하면서 그는 자기 몸을 쳐 복종시켰고 푯대를 향해서 나아갔으며 늘 죄에 대한 경각심을 가지고 두려워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럴 때 그의 모습은 은혜로 충만한 모습이었습니다. “[고전]9:26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 [고전]9: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그가 자신을 복종하게 했을 때 그는 향방 없는 것 같지 않았고 허공을 치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가장 효과적이고 유익하며 구체적인 달음질을 하였습니다. 회개를 통해 진정한 하나님께 대한 경배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회개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갔을 때 하나님께 대한 경배가 특별해졌습니다. “[느]9:5 또 레위 사람 예수아와 갓미엘과 바니와 하삽느야와 세레뱌와 호디야와 스바냐와 브다히야는 이르기를 너희 무리는 마땅히 일어나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신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할지어다 주여 주의 영화로운 이름을 송축하올 것은 주의 이름이 존귀하여 모든 송축이나 찬양에서 뛰어남이니이다 [느]9:6 오직 주는 여호와시라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과 일월 성신과 땅과 땅 위의 만물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시고 다 보존하시오니 모든 천군이 주께 경배하나이다” 주님의 영화로운 이름을 송축하는 이유는 그 이름이 존귀하시고 뛰어나시기 때문입니다. 그 이름이 존귀하시고 뛰어나신 이유는 그들의 죄를 사하시고 회개를 받아주시기 때문입니다. 회개를 할 때 더욱 새롭게 하나님의 은혜를 자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이 얼마나 죄가 많았는지를 알 때 그 죄를 덮어주시고 사해주시며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빚을 탕감받는 경우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 빚을 단순히 갚는다고 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능력을 자각하는 것이겠지만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빚을 갚아 주신다고 한다면 그것은 결코 잊을 수 없는 은혜를 입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 바로 이러한 은혜입니다. 그런데 회개를 하지 않으면 그 은혜를 자각할 수 없습니다. 얼마나 큰 탕감을 받는지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직 회개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비록 반복해서 회개를 하고 여전히 죄 가운데 있더라도 계속해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사모하며 살아갈 때 우리는 용서의 은혜를 얻으면서 살아가는 자들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단순히 용서로 끝나시는 것이 아니라 창조의 은혜로 더 올라가서 만물과 모든 것을 지으시고 보존하시며 다스리시는 하나님이심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경배하고 천군천사가 경배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조상들은 그런 삶을 살지 못해서 모든 우상으로 변질되어 버렸지만 하나님을 온전히 이해하는 자들은 우상으로 마음이 변질되지 않고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삶이 우리에게 펼쳐져 있습니다. 앞으로의 삶 속에서 조상의 죄와 다른 삶을 살아가고자 할 때 그런 마음가짐으로 자신의 과거와 다른 삶으로 나아가고자 할 수 있고 그럴 때 하나님을 온전한 인도하심을 주시는 분으로 따라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면서 살아갑시다. 그래서 우리의 삶 속에서 더욱 하나님을 경배하며 영광을 돌리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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