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13:15 그 때에 내가 본즉 유다에서 어떤 사람이 안식일에 술틀을 밟고 곡식단을 나귀에 실어 운반하며 포도주와 포도와 무화과와 여러 가지 짐을 지고 안식일에 예루살렘에 들어와서 음식물을 팔기로 그 날에 내가 경계하였고
[느]13:16 또 두로 사람이 예루살렘에 살며 물고기와 각양 물건을 가져다가 안식일에 예루살렘에서도 유다 자손에게 팔기로
[느]13:17 내가 유다의 모든 귀인들을 꾸짖어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어찌 이 악을 행하여 안식일을 범하느냐
[느]13:18 너희 조상들이 이같이 행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래서 우리 하나님이 이 모든 재앙을 우리와 이 성읍에 내리신 것이 아니냐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희가 안식일을 범하여 진노가 이스라엘에게 더욱 심하게 임하도록 하는도다 하고
[느]13:19 안식일 전 예루살렘 성문이 어두워갈 때에 내가 성문을 닫고 안식일이 지나기 전에는 열지 말라 하고 나를 따르는 종자 몇을 성문마다 세워 안식일에는 아무 짐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느]13:20 장사꾼들과 각양 물건 파는 자들이 한두 번 예루살렘 성 밖에서 자므로
[느]13:21 내가 그들에게 경계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성 밑에서 자느냐 다시 이같이 하면 내가 잡으리라 하였더니 그후부터는 안식일에 그들이 다시 오지 아니하였느니라
[느]13:22 내가 또 레위 사람들에게 몸을 정결하게 하고 와서 성문을 지켜서 안식일을 거룩하게 하라 하였느니라 내 하나님이여 나를 위하여 이 일도 기억하시옵고 주의 크신 은혜대로 나를 아끼시옵소서
느헤미야의 마지막 장을 살펴보면서 우리는 그가 지금까지 해왔던 일은 끝까지 변함이 없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는 처음 예루살렘 성벽이 무너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안타까워 하였고 아닥사스다왕의 허락을 받아서 그 성벽을 다시 세우기 위해서 이스라엘에 돌아왔습니다. 그 후에 그는 성벽만 다시 세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절기를 다시 세웠고 신앙을 다시 세웠으며 절제와 규범이 없던 백성들의 삶도 다시 세웠습니다. 오늘 우리가 보는 말씀에서는 안식일 규례를 다시 세웠고 마지막으로는 혼인 규례도 다시 세우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느헤미야를 보면 그는 백성들의 신앙 뿐만 아니라 생활도 다시 세웠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는 일군이었기 때문이고 하나님 안에서 그 뜻을 행하고 칭찬받기를 바랬던 선한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22절에 그의 마음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느]13:22 내가 또 레위 사람들에게 몸을 정결하게 하고 와서 성문을 지켜서 안식일을 거룩하게 하라 하였느니라 내 하나님이여 나를 위하여 이 일도 기억하시옵고 주의 크신 은혜대로 나를 아끼시옵소서”
느헤미야는 백성들이 안식일을 제대로 지키지 않고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모습을 외면하지 않고 올바르게 안식일을 지킬 수 있도록 감시하고 감독하고 레위 사람들에게는 먼저 모범을 보여서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킬 수 있도록 명령하였습니다. 그 모든 일에는 하나님을 의식함과 하나님께서 자신의 선행을 기억하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을 간구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의 이와 같은 고백속에서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관점으로 그가 일을 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기준으로 어떤 것은 옳고 어떤 것은 옳지 않다고 알아서 분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기준으로 옳고 그른 것을 구별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16,17절에 나오는 말이었습니다.
“[느]13:16 또 두로 사람이 예루살렘에 살며 물고기와 각양 물건을 가져다가 안식일에 예루살렘에서도 유다 자손에게 팔기로
[느]13:17 내가 유다의 모든 귀인들을 꾸짖어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어찌 이 악을 행하여 안식일을 범하느냐”
안식일에 예루살렘에서 유다 자손에게 팔고 있는 두로 사람을 보면서 유다의 모든 귀인들을 꾸짖었습니다. 그런 두로 사람을 허용하고 있는 유다의 귀인들이 문제였습니다. 그들이 안식일을 범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안식일 규례는 자신이 만든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명령이었습니다. 그것을 어길 때에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짓는 일이었음을 자각했습니다.
“[느]13:18 너희 조상들이 이같이 행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래서 우리 하나님이 이 모든 재앙을 우리와 이 성읍에 내리신 것이 아니냐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희가 안식일을 범하여 진노가 이스라엘에게 더욱 심하게 임하도록 하는도다 하고”
그가 안타까워했던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조상들의 죄로 나라가 망하였고 70년 만에 새로운 기회를 얻었는데 그 죄를 다시 반복하여 또 다시 나라가 망하는 시간을 겪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과 처벌의 의미가 중요함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느헤미야는 안식일 규례이든 아니면 혼인 규례이든 하나님께서 죄라고 하시는 일들을 하지 않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혼인 규례에 대한 느헤미야의 판단과 결심은 분명하였습니다. 23절부터 보십시오.
“[느]13:23 그 때에 내가 또 본즉 유다 사람이 아스돗과 암몬과 모압 여인을 맞아 아내로 삼았는데
[느]13:24 그들의 자녀가 아스돗 방언을 절반쯤은 하여도 유다 방언은 못하니 그 하는 말이 각 족속의 방언이므로
[느]13:25 내가 그들을 책망하고 저주하며 그들 중 몇 사람을 때리고 그들의 머리털을 뽑고 이르되 너희는 너희 딸들을 그들의 아들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 아들들이나 너희를 위하여 그들의 딸을 데려오지 아니하겠다고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하라 하고”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방 여인들과의 결혼이 온전한 연합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그 결혼을 하나님 앞에서 죄로 여겼습니다. 이방 여인이라도 완전히 이스라엘 백성으로의 동화라면 허락되었지만 그렇지 못하면 불허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이전에 솔로몬 왕이 이방여인들과 결혼을 많이 해서 우상숭배가 생기고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죄가 되었던 것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원하시는 것과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고 또 설사 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하심과 심판하심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다음부터는 그러지 말아야 하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을 또 다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자취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안타깝게 부르짖었던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기준을 생각하면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고 진노하시는 일을 하지 않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단지 행위에 관한 규례가 아니어서 그 기준을 생각하고 그 기뻐하심을 생각하면서 살려고 할 때에 더욱 풍성해질 수 있습니다. 그럴 때 담대하게 하나님께 축복을 요청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는 22절과 30, 31절에서 동일하게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느]13:22 내가 또 레위 사람들에게 몸을 정결하게 하고 와서 성문을 지켜서 안식일을 거룩하게 하라 하였느니라 내 하나님이여 나를 위하여 이 일도 기억하시옵고 주의 크신 은혜대로 나를 아끼시옵소서
[느]13:30 내가 이와 같이 그들에게 이방 사람을 떠나게 하여 그들을 깨끗하게 하고 또 제사장과 레위 사람의 반열을 세워 각각 자기의 일을 맡게 하고
[느]13:31 또 정한 기한에 나무와 처음 익은 것을 드리게 하였사오니 내 하나님이여 나를 기억하사 복을 주옵소서”
우리에게 이러한 간절함이 있을 때 죄를 막고 의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아무리 의가 많아도 하나님께 대한 진실함과 간절함이 없다면 더 이상 죄를 막을 수 없습니다.
느헤미야서는 이것으로 마치려고 합니다. 끝까지 안식일 규례와 혼인 규례를 지키면서 더욱 하나님을 따르고 경외했던 느헤미야처럼 우리도 하나님 앞에서 더욱 성심껏 하나님을 따르고 선한 일과 악한 일을 구별하면서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은혜가 넘칠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가 있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