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하]10:8 암몬 자손은 나와서 성문 어귀에 진을 쳤고 소바와 르홉 아람 사람과 돕과 마아가 사람들은 따로 들에 있더라
[삼하]10:9 요압이 자기와 맞서 앞뒤에 친 적진을 보고 이스라엘의 선발한 자 중에서 또 엄선하여 아람 사람과 싸우려고 진 치고
[삼하]10:10 그 백성의 남은 자를 그 아우 아비새의 수하에 맡겨 암몬 자손과 싸우려고 진 치게 하고
[삼하]10:11 이르되 만일 아람 사람이 나보다 강하면 네가 나를 돕고 만일 암몬 자손이 너보다 강하면 내가 가서 너를 도우리라
[삼하]10:12 너는 담대하라 우리가 우리 백성과 우리 하나님의 성읍들을 위하여 담대히 하자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시는 대로 행하시기를 원하노라 하고
오늘 우리가 보고자 하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목표주제는 ‘협동심’입니다. 신앙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갈 때 협동심을 갖는 것은 어쩌면 선택사항에 해당된다고 생각될지 모르겠습니다. 협동심이라는 주제가 되는 사람은 되지만 안 되는 사람은 안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주제를 신앙인의 모습 속에서 찾으려고 한다면 성격상 협동이 안 되는 사람에게는 힘들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협동심의 주제는 흔히 나타나는 주제입니다. 왜냐하면 그 협동심 속에서 자기 중심적인 생각이 사라지고 하나님 중심의 생각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그리스도의 생활 목표로서 ‘협동심’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 마음을 갖는 것이 오히려 신앙의 모습을 더욱 빛낼 수 있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자기 중심적으로 살아갈 때에는 신앙의 모습을 부끄럽게 만들 뿐입니다. 그래서 협동심을 단순히 개별적인 성격으로 단정짓지 말고 그리스도인이 가질 수 있는 생활의 목표로 생각할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사람에게 칭찬을 받는 모습으로 발전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그 협동심의 의미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기 중심적인 생각이 아닌 하나님 중심의 생각이 있을 때 협동의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구체적인 상황은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 백성을 공격했을 때의 일이었습니다.
“[삼하]10:7 다윗이 듣고 요압과 용사의 온 무리를 보내매
[삼하]10:8 암몬 자손은 나와서 성문 어귀에 진을 쳤고 소바와 르홉 아람 사람과 돕과 마아가 사람들은 따로 들에 있더라
[삼하]10:9 요압이 자기와 맞서 앞뒤에 친 적진을 보고 이스라엘의 선발한 자 중에서 또 엄선하여 아람 사람과 싸우려고 진 치고”
암몬 자손이 공격한다는 소식을 듣고 다윗은 요압과 용사의 온 무리를 보냈습니다. 애초에 다윗은 암몬의 나하스 왕이 죽고 그 아들 하눈이 대신해서 왕이 되었을 때 조문단을 보내서 나하스왕의 죽음을 안타까워하였지만 암몬의 관리들은 그걸 오해해서 정탐하러 왔다고 말해서 하눈은 조문단의 수염을 깎고 의복을 잘라서 수치스럽게 한 다음에 돌려보냈습니다. 거기에 더해서 아람 자손 3만 3천명을 고용해서 암몬 자손과 함께 이스라엘을 공격하였던 것입니다.
이 모든 상황이 암몬 자손의 어리석은 판단과 결정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기 때문에 다윗은 요압과 용사들을 보내면서 그들의 공격을 막게 하였습니다. 그럴 때 요압은 아우 아비새에게 군사를 맡기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삼하]10:10 그 백성의 남은 자를 그 아우 아비새의 수하에 맡겨 암몬 자손과 싸우려고 진 치게 하고
[삼하]10:11 이르되 만일 아람 사람이 나보다 강하면 네가 나를 돕고 만일 암몬 자손이 너보다 강하면 내가 가서 너를 도우리라”
요압은 자신이 한 무리를 이끌고 아우 아비새가 다른 한 무리를 이끌게 하면서 암몬 자손과 아람 자손을 대응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협동심을 발휘해서 전쟁을 치르자고 하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아람 자손이 나보다 강하면 네가 나를 돕고 암몬 자손이 너보다 강하면 내가 가서 너를 도우리라는 말이었습니다. 협동의 모습은 각각 자신이 맡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분리하는 것이 아니라 합쳐서 함께 대응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럴 때 요압 쪽이 약하면 아비새 쪽이 돕고 아비새 쪽이 약하면 요압 쪽이 도우면서 서로 연합하기로 하였던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이러한 협동심의 모습은 지금 우리의 삶 속에서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습니다. 협동심은 각각 알아서 하는 것이 아니라 저쪽이 잘하고 있는지를 살펴서 부족하면 돕는 것입니다. 또한 이쪽이 부족하면 도움을 받는 것입니다. 이렇게 도움을 주기도 하고 도움을 받기도 할 때 분명한 목표가 있었습니다. 협동심 속에서는 이러한 구체적인 목표를 생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야만 표면적인 모습에 의존하지 않고 본질적인 가치를 의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도우심이었습니다.
“[삼하]10:12 너는 담대하라 우리가 우리 백성과 우리 하나님의 성읍들을 위하여 담대히 하자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시는 대로 행하시기를 원하노라 하고”
그들은 담대했고 담대하려고 했는데 그 이유는 백성과 하나님의 성읍들을 위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를 하나님께 맡기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시는 대로 행하시기를 원하노라고 했던 것입니다. 협동심의 본질은 그로 인해서 결과가 좋았는가 나빴는가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과정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것이었는가를 생각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나아갈 수 있고 하나님께서 감당하기 하시는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협동심의 가장 좋은 모습은 하나님과 연합하는 것입니다.
협동심을 단지 성격의 모습으로 돌리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신앙적인 삶은 하나님과 연합하는 삶입니다. 하나님과 연합하려고 할 때 사람과도 연합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혼자서 하지 못하는 일을 하게 됩니다. 그로 인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총독 스룹바벨(1차 성전 건축), 학사 에스라(2차 신앙 개혁), 총독 느헤미야(3차 성벽 건축)도 전부 협동심을 발휘해서 성전의 재건과 성벽의 재건을 이루었습니다. 혼자서는 할 수 없었던 일들을 협동심이 있을 때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협동심을 가질 때 혼자서는 할 수 없는 많은 일을 잘 해 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협동심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지하면서 현재의 사람들과 연합하여 협동심을 나타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축복이 넘쳐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