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교육] 15스 9; 1-3 누구를 따를 것인가의 문제2Loading the player...
15스 9; 1-3 누구를 따를 것인가의 문제2_4
2020. 7. 22. 수. 수요예배.
*개요: 에스라 연구. [스]9:1 이 일 후에 방백들이 내게 나아와 이르되 이스라엘 백성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이 땅 백성들에게서 떠나지 아니하고 가나안 사람들과 헷 사람들과 브리스 사람들과 여부스 사람들과 암몬 사람들과 모압 사람들과 애굽 사람들과 아모리 사람들의 가증한 일을 행하여 [스]9:2 그들의 딸을 맞이하여 아내와 며느리로 삼아 거룩한 자손이 그 지방 사람들과 서로 섞이게 하는데 방백들과 고관들이 이 죄에 더욱 으뜸이 되었다 하는지라 [스]9:3 내가 이 일을 듣고 속옷과 겉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으며 기가 막혀 앉으니
에스라는 하나님의 손의 도우심으로 아닥사스다왕의 조서를 받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손의 도우심으로 성전재건에 필요한 사람들을 모았습니다. 또한 그는 하나님의 손의 도우심으로 무사히 사람들을 이끌고 예루살렘에 도착했습니다. 이 모든 일이 다 마쳤을 때 에스라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뻐서 하나님께 번제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이루게 될 모든 선한 일에 대해서 커다란 기대와 소망을 가졌습니다. 모든 일이 다 잘될 줄 알았습니다. 그렇지만 현실은 달랐습니다. 에스라가 당면한 문제는 생각보다 더 깊고 크고 중한 것이었습니다. 단순히 성전만 재건해서 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바로 이스라엘 사람들, 그들 자신에게 있었습니다. 그들이 예나 지금이나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었던 것입니다.
에스라가 예루살렘에 도착해서 좀 숨을 돌리고 앞으로 성전재건에 필요한 일들을 계획하고 있을 때에 방백들은 그에게 나아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스]9:1 이 일 후에 방백들이 내게 나아와 이르되 이스라엘 백성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이 땅 백성들에게서 떠나지 아니하고 가나안 사람들과 헷 사람들과 브리스 사람들과 여부스 사람들과 암몬 사람들과 모압 사람들과 애굽 사람들과 아모리 사람들의 가증한 일을 행하여 [스]9:2 그들의 딸을 맞이하여 아내와 며느리로 삼아 거룩한 자손이 그 지방 사람들과 서로 섞이게 하는데 방백들과 고관들이 이 죄에 더욱 으뜸이 되었다 하는지라” 나라가 패망했다가 다시 돌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과 그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은 여전히 세상 백성들에게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가나안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여부스 사람과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과 애굽 사람과 아모리 사람들이었는데 그들에게는 가증한 일들이 있었습니다. 우상숭배와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관습과 습관 등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과 통혼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들과 혼인함으로써 그들의 우상숭배와 그들의 악한 습관등을 가져오게 되고 그로 인해서 하나님의 분노와 심판을 받게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이스라엘이 멸망하게 된 이유는 하나님께 대한 범죄함 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경고과 금지를 무시하고 계속해서 우상숭배를 하고 이방민족과 통혼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하였고 사람들은 포로로 바벨론에 끌려갔습니다. 그리고 멸망한지 70년만에 그들은 다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돌아온 그들이 이방민족과 다시 통혼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우상숭배로 이어지고 또다시 하나님의 심판과 처벌을 받게 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에스라는 이 모든 일의 내용을 듣고 주저앉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설마 이런 지경일 지는 몰랐던 것입니다. “[스]9:3 내가 이 일을 듣고 속옷과 겉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으며 기가 막혀 앉으니” 어떤 주석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결혼했던 이방민족들은 정상적인 결혼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비록 결혼은 했으나 그 결혼은 후처로 들어간 것이며 그래서 이 문제가 좀더 쉽게 만연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방여인들이 후처로 들어오건 본처로 들어오건 분명한 것이 그 영향력에 있어서는 동일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방여인들을 본처로는 들이지 말고 후처로는 괜찮다고 하신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여러가지 정황을 종합해 본다 하더라도 역시 이 문제는 심각한 문제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에스라는 속옷과 겉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으며 기가 막혀 앉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까지 살펴본 에스라의 이야기가 단지 성경 속의 이야기만으로 들리지 않는 이유는 우리도 그럴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옷을 찢고 머리털을 뜯으며 기가 막혀 앉는 때가 있습니다. 우리도 에스라처럼 절망할 때가 있습니다. 소망을 가지고 뭔가를 시작하려고 했지만, 또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서 어느정도 모든 것을 잘 이루었다고 생각했지만, 이 모든 일이 한번에 무너질 때가 있습니다. 문제가 있으리라고는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설마 이정도일 줄을 몰랐던 것입니다. 또한 이런 안좋은 일들이 다시 반복해서 일어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정말 완전히 벗어났다고 생각한 안좋은 일들이 다시 찾아왔습니다. 완전히 해결했다고 생각한 문제가 다시 찾아왔습니다. 이젠 됐다고 생각한 모든 일들이 다시 망가져 버렸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주저앉아 버립니다. 기가 막혀 주저앉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어떤 때 좌절합니까? 어떤 때에 절망합니까? 절망이라는 감정은 같지만 절망의 방향에 대해서는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때로 저는 인터넷에 글을 올리다가 잘못해서 한순간에 다 날라갈 때 좌절합니다. 컴퓨터에 가족사진을 모아놓았다가 하드가 망가지는 바람에 그동안 모아놓았던 사진들이 다 사라질 때 좌절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도미노를 장시간 만들다가 한번의 실수로 그 모든 것이 다 넘어졌을 때 좌절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오랜 시간 게임아이템을 모아놓았다가 해킹당해서 그 모든 것이 다 사라졌을 때 좌절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휴가를 계획했지만 그 휴가가 여러가지 사정으로 인해서 취소될 때에 절망합니다. 과연 우리의 절망과 에스라의 절망은 어떻게 다를까요?
에스라의 경우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가 망연자실하고 절망감으로 인해 탈진한 상태에서 했던 것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5절입니다. “[스]9:5 저녁 제사를 드릴 때에 내가 근심 중에 일어나서 속옷과 겉옷을 찢은 채 무릎을 꿇고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향하여 손을 들고 [스]9:6 말하기를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끄럽고 낯이 뜨거워서 감히 나의 하나님을 향하여 얼굴을 들지 못하오니 이는 우리 죄악이 많아 정수리에 넘치고 우리 허물이 커서 하늘에 미침이니이다” 그는 그 절망가운데에서도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손을 들고 자신의 괴로움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은 회개와 사죄였습니다. ‘이는 우리 죄악이 많아’ 하나님께 그 절망감을 드리면서도 ‘하나님, 어떻게 이러실 수가 있습니까?’라고 기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의 죄에 대해서 ‘우리 죄악’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 허물’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편에 서서 하나님께 나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가 왜 이렇게 괴로워하고 있으며 왜 이렇게 절망하고 있으며 왜 이렇게 슬퍼하고 있는가를 다시 한번 생각해 봅니다. 애초에 그가 하려고 했던 일은 무엇일까요? 왜 예루살렘에 왔으며 왜 하나님의 손의 도우심을 입었을까요? 그 이유는 맨 처음에 가졌던 하나의 목표때문이었습니다. “[스]7:10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었더라” 이것이 그의 목표였는데 그것이 정말 자신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을 위한 것인지를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그 진실함은 어려움속에서 나타납니다. 그가 정말로 하나님을 위한 것이었다면 그일을 이루는 데에서 생겨나는 모든 어려움 가운데 하나님께로 갈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그것이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면 어려움이 닥칠 때 그는 그냥 주저 앉아버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도 세상을 따라가 버렸을 것입니다. 이 양단간의 선택 속에서 에스라는 하나님께로 나아왔습니다. 울면서, 가슴을 치면서, 옷을 찢으면서, 그는 하나님께 나아왔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애초부터 하나님께로 나아가고자 했었기 때문입니다. 목표가 있을 때에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문제가 생길 때에도 역시 하나님을 위해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다시 우리가 절망하는 경우로 돌아와 봅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의 문제로 절망합니다. 자신의 습관, 자신의 무능력, 자신의 질병, 자신의 열매없음으로 절망합니다. 또한 가족들로 인해 절망합니다. 아버지, 어머니, 형, 누나, 동생, 남편, 아내, 아들, 딸, 시아버지, 시어머니, 장인, 장모, 이모, 삼촌, 조카, 등등 으로 인해서 절망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 삶속에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로 인해서 절망합니다. 교회상황에서 절망합니다. 목사님,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 전도사님, 새가족 등등으로 인해 절망합니다. 학교에서 절망합니다. 선생님, 반친구들, 선배, 후배, 직장에서 절망합니다. 사장님, 부장님, 과장님, 상사, 부하, 등등, 이 사회속에서 우리는 절망합니다. 초등학교 친구, 중학교 친구, 고등학교 친구, 대학친구, 군대 동기, 이웃집 사람, 같은 클럽 멤버, 동호회 회원, 등등.. 그 모든 절망 속에서 우리는 그 절망이 정말 나를 위한 것인가, 하나님을 위한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나를 위한 절망은 더큰 절망으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위한 절망은 소망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분명히 경사는 있는데, 그것이 내려가는 때 만나는 경사인지, 아니면 올라가는 때 만나는 경사인지가 다릅니다. 그래서 그 동일한 절망감 속에서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한 사람은 더욱 내려가게 되고, 다른 한 사람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더욱 올라가게 됩니다. 원리는 간단합니다. 내려가는 사람은 원래 내려가려고 하고 있었기 때문이고, 올라가려는 사람은 원래 올라가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 한가지 예외가 있습니다. 내려가던 사람이 절망감에 반대로 올라가게 된다면 어떨까요? 그것은 너무나 좋은 일입니다. 차라리 절망감을 갖게 된 것이 잘됐습니다. 그로 인해서 그는 삶의 방향을 바꾸어서 올라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올라가던 사람이 절망감에 반대로 내려가게 된다면 어떨까요? 그건 안좋은 일입니다. 원래 올라가려고 했던 사람이기 때문에 내려가서는 안됩니다. 그런 일로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다시 올라가야만 합니다. 그러면 원래 하려던 일을 다시 하게 됩니다. 시간이 흐를 수록 애초의 목표는 더욱 분명하게 나타날 것입니다.
제가 어떤 힘든 일로 좌절했을 때의 일입니다. 극도의 절망감에 집에서만 틀어박혀 지내다가 도저히 못 견디겠다는 마음에 기도원에 가야 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오래전 한번 갔던 기도원을 찾아가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아침 일찍 기억을 더듬어서 출발했는데 정확한 기억이 아니었던지 헤매기 시작했습니다. 버스를 잘못 타기도 하고, 정류장을 잘못 내리기도 하고, 우여곡절끝에 해가 뉘엿뉘엿 지고 날이 저물고 있었습니다. 비슷한 장소에 온 것 같기는 한데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에게 물어봐도 잘 모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더 절망스러웠습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기도원에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게 하는가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대로 돌아가야 하나를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버스 정류장에 서서 정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묻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하나님께 진심으로 물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 그때 앞에 그 기도원버스가 지나가는 것이었습니다. 황급히 그 버스를 향해 손을 들고 세웠습니다. 그리고 그 버스를 탔습니다. 알고 보니 마침 그때 기도원에 집에 가는 한 성도를 데려다 주려고 나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아주 감사한 마음으로 기도원에 갈 수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올라간 기도원에 얼마나 큰 은혜를 받았는지는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세상을 향해 나아가다가 겪는 절망감은 오히려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다가 겪는 절망은 더욱 더 하나님을 의지하는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그 절망 속에서 비로소 진정으로 따라야 하는 대상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에스라는 자기 의지와 자기 헌신과 자기 노력과 자기 재주로 그 모든 일을 이루었겠습니까? 그는 하나님을 따라간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의 뿌리깊은 악의 문제도, 그 어떤 삶의 문제일지라도 하나님과 함께 할 때 도움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정말 하나님을 따르는 자였기 때문입니다. 그가 정말 하나님을 따르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의 많은 절망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길을 결정합니다. 절망감으로 더욱 내려가는 자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절망감으로 더욱 올라가는 자들도 있습니다. 그들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하나님을 따르고자 하는 바로 우리들입니다.
에스라가 결국 이러한 예기치 못한 어려움 중에서도 다시 힘을 내어서 성전을 재건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 수 있었던 것처럼 여러분들도 하나님을 따라서 삶을 이루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이루어야 하는 여러분 자신의 삶이 하나님을 따름으로 새롭게 재건되고 새롭게 세워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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