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저희가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로서 오는 것을 잡아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좇게 하더라 27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오는지라 28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29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수태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30 그 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 31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하시니라
1. 사람들은 주님이 고통당하신 것을 불쌍히 여기기는 하지만 자신들이 죄지은 것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부활절이 가까이 오면 사람들은 예수님을 생각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부활절은 전적으로 예수님에 관한 절기이기 때문입니다. 크리스마스에 예수님을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부활절에 예수님을 생각하게 됩니다. 문화적으로 우리나라는 기독교문화가 아니기 때문에 부활절이 사회적으로 갖는 의미는 그리 크지 않습니다. 어떤 면에서 아직 부활절은 발렌타인데이나 빼빼로 데이보다도 못한 것 같습니다. 반면, 외국 기독교 국가에서는 부활절은 매우 중요한 날입니다. 그 날을 기념하고 의미있게 보내기 위해서 다양한 행사와 활동이 준비되고 홍보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부활절의 예수님에 대해서 생각할 때에 그 생각은 사람마다 다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부활절 전의 예수님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그 고통에 대해서 주목합니다. 그래서 고난주간에 더 큰 의미를 둡니다. 그 고난에 동참하며 함께 아파하고 괴로워합니다. 2000년전의 예수님의 고난이 자신에게도 느껴지기를 원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부활하신 이후의 예수님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그 기쁨에 주목합니다. 그래서 부활절에 더 큰 의미를 둡니다. 고난에 동참하는 분들에게는 부활이란 고난의 끝이라는 의미를 가질 뿐이지만 부활에 동참하는 분들에게 부활이란 새로운 기쁨의 시작이라는 의미를 갖습니다. 그래서 더 큰 희락과 화평과 감사를 갖고자 합니다. 또한 새롭게 시작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에 대한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움과 축복됨을 경험하면서 그 기쁨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데에 주력합니다. 그래서 결국 고난에 동참을 하던, 혹은 부활에 동참을 하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한 자신의 감상과 느낌을 가지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말씀은 우리들에게 전혀 다른 것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고난당하시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위해 슬피 우는 자들에게 해주시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 세상 사람들에게 하시는 말씀이기도 했습니다. 바로 ‘나를 위해서 울지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해서 울라’라는 것이었습니다. “28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그들은 예수님이 채찍에 맞고 가시 면류관을 쓰며 손으로 매맞음을 당한 다음에 골고다 언덕으로 십자가에 박히기 위해서 무거운 십자가를 끌고 가는 것을 보면서 따라오던 여자들이었습니다. 그 여자들은 예수님이 이렇게 불쌍하게 매맞고 고통당하며 결국에는 십자가에 달리는 것에 대해서 안타까워하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렇게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예수님이 불쌍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렇게 불쌍하게 여기는 예수님은 도리어 사람들이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들을 위해서 울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생각하고 기억해 주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왜 예수님은 정반대로 너 자신과 너의 가족들을 생각하라고 하시는 것일까요?
2. 주님이 죽으신 것은 우리가 저지른 죄와 그 죄의 결과들을 미리 보셨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그 다음에 나오는 구절에서 밝혀집니다. 예수님은 앞을 내다보고 계십니다. 미래에 어떤 일이 있을지를 알고 계십니다. 지금 현재의 일은 예수님이 매맞고 채찍질 당하고 고문당한 뒤 십자가에 달려서 마침내 죽임을 당하시는 것이지만 앞으로의 일은 바로 예수님을 위해서 울고 있던 그들 자신과 그들의 자녀들에게 임하는 고통과 괴로움과 슬픔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과연 그들이 어떤 일을 당하게 된다는 것일까요? “29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수태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30 그 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 31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하시니라”
날이 이르게 되면 그들은 말하게 될 것입니다. 수태를 못한 이가 복이 있다, 수태를 했더라도 출산을 하지 못한 이가 복이 있다, 출산을 했더라도 차라리 젖을 먹이지 못한 자가 복이 있다라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차라리 어려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더 복이 있고 지금보다 더 나았을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그 시간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괴로우면 그렇게 말하겠습니까? 그들은 또 말하게 됩니다. ‘산들이 우리 위에 무너져 내려서 죽었으면 좋겠다, 작은 산들이 우리 위에 덮여져서 죽었으면 좋겠다’고 말하게 됩니다, 사건과 사고로 인해서 죽는 사람들이 오히려 더욱 부러워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그들에게는 어떤 일이 있기에 그런 것을 원하는 것일까요? 뿐만 아닙니다.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다시 말해서 아주 나무가 푸르르고 무성해도 그렇게 원한다면,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즉, 나무가 아주 메마르고 앙상하게 되었을 때에는 얼마나 더 괴롭겠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변 상황이 아주 넉넉하고 편안해도 그렇게 죽고 싶어 할 것이고, 주변 상황이 더 열악하고 척박하게 되면 더욱 그렇게 죽고 싶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상황과 상관없이 그들은 삶을 힘들어 하고 괴로워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보면서 우리는 그분이 얼마나 미래를 정확하게 내다 보시는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그렇게 너희에게 만들어 주겠다, 너희가 그러한 극도의 고통을 겪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미래에 너희가 그렇게 될 것이고, 나는 너희가 그렇게 될 것을 잘 알고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미래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미래에 그들이 얼마나 울고 얼마나 괴로워하며 얼마나 슬퍼할 것인가를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지금 현재에 나의 고통과 괴로움에 대해서 울지 말고 미래의 너희 자신과 너희의 자녀들을 생각하면서 울라고 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고통 당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그들의 자녀들을 위해서 고통당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정말로 바라보시는 것은 예수님 자신이 아니라 앞으로 일어나게 될 고통으로 나아가고 있는 그들과 그들의 자녀였습니다.
3. 사람들은 현재 자신들의 고통으로 인해 괴로워하지만 그 실체는 하나님께 지은 죄였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주님이 말씀하시던 그 ‘보라 날이 이르면’이라는 말씀이 정말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정말로 말하기 시작합니다. ‘만약에 내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만약에 내가 학교에 가지 않았다면, 만약에 내가 입사하지 않았다면, 만약에 내가 결혼하지 않았다면, 만약에 내가 교회에 다니지 않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또한 사람들은 말합니다. ‘산이 무너져 내렸으면, 사고라도 났으면, 눈깜짝할 사이에 이세상을 떠났으면, 전쟁이라도 났으면, 종말이라도 왔으면, 예수님이라도 왔으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주변환경이 넉넉하고 살만해도 그렇고 주변환경이 열악하고 고통스러워도 그렇습니다. 어디에나 세상에 대한 소망과 기대가 사라진 때가 되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예수님이 죽으신지 2000여년이나 지났지만 왜 여전히 우리에게는 이렇게 우리 스스로 괴로워하고 절망하며 좌절하는 삶이 존재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사랑했던 그 무엇때문에 일어난 우리의 죄때문입니다. 그 죄가 우리로 하여금 하지 말아야 하는 일을 하게 만들고, 우리로 하여금 넘어서지 말아야 하는 선을 넘게 만들고, 우리의 죄가 결코 이루어져서는 안되는 일을 이루고 싶어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형제가 형제를 해치고, 자매가 자매를 해치며, 자녀가 부모를 해치고, 부모가 자녀를 해치며, 친구가 친구를, 이웃이 이웃을, 선배가 후배를, 후배가 선배를 해치는 일들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어디에서도 우리 마음 속 깊은 속에서 원하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을 찾을 수 없고, 오직 그 속에 유익과 편안과 쾌락만을 원하게 될 때 우리는 끔찍한 상태에 이르게 되고 그속에서 미워하고 분노하고 절망하며 그로 인해서 자포자기한 나머지 산들에 대해서 우리 위에 무너지라, 작은 산들에 대해서 우리를 덮으라라고 하게 된 것입니다.
주님은 이 모든 일을 미리 아셨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죄를 인해서 주님이 행하시는 일은 미리 용서해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되어질 일을 안다면 왜 막지 않으셨느냐구요? 그것을 막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다만 귀찮아질 일을 미리 ‘예방’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행하신 일은 바로 앞으로 죄악가운데서 고통하게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해서 죽으시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의 죽으심은 온전히 죄악으로 인해 스스로 살기를 포기하고 스스로 선하게 될 의욕을 상실해 버린 그 불쌍한 세상 사람들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나’를 위해서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해서 울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들이 참된 주님의 용서하심을 받을 수 있도록 말입니다.
4. 우리는 그 죽으심의 의미를 기억하며 주님의 십자가 밑으로 들어가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부활절을 어떻게 보내는 것이 무엇이 중요하겠습니까? 주님의 고난을 기억하며 고난에 참예하던, 아니면 주님의 부활을 기억하며 부활에 참예하던, 아니면 이도 저도 아닌 그냥 4월의 첫 번째 주와 두 번째 주를 바쁘게 보내던 그 모든 것이 무엇이 중요하겠습니까? 어떻게 시간을 보낸다 하더라도 우리의 죄를 위해 미리 피흘리신 주님의 용서하심을 깨닫지 못한다면, 그 시간이 다 지나간 다음에, 아니 그 시간이 진행되고 있을 때에 우리는 여전히 죽고 싶어 하고, 죽이고 싶어 하면서 눈물을 흘리지 않을 것입니다. 단 한방울의 눈물도 흘리지 않을 것입니다. 아무런 미련도 후회도 없을 것입니다.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으면서 죄악을 저지를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진심으로 우리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사랑하고 우리 자녀를 사랑한다면 겉으로만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에 대해서 눈물을 흘리고 끝내지 않을 것입니다. 진심으로 그리스도께서 이루어 놓으신 죄사함이 우리에게 부어지기를 또 다시 눈물을 흘리며 간구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대로 우리 자신을 위해서 울어야 합니다. 우리의 죄를 위해서 그토록 피흘리시며 고통당하시며 죽으셨지만 여전히 죄가운데 있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 울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진심으로 우리 자녀를 위해서 울어야 합니다. 그들의 죄를 위해서 주님은 몸버려 피흘려 죽으셨지만 전혀 그 용서하심으로 나아오지 못하고 자신의 죄를 깨닫지 못하고 있는 그 어리석은 자녀들을 위해서 우리는 울어야 합니다. 또한 그 모든 기대와 소망에도 불구하고 그에 미치지 못하는 그들을 위해 울어야 합니다. 주님은 그들을 포기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오래 전에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렇게 죄지으리라는 것을 아시고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우리 때문에 죽으신 것입니다. 주님 자신의 죄나 잘못으로 죽으신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 죄와 그 죄악의 결과를 용서해 주시기 위해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을 바라보면서 우리 자신의 죄를 보아야 합니다. 조금의 용서도 없이 가혹하고 매정한 우리 자신을 보아야 합니다. 주님은 바로 그런 나를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이 고난 주간, 그리고 다가오는 부활절에 우리가 받은 죄사함을 기억하는 시간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안타까운 형편을 미리 아시고 흘리신 그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와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여러분 자신과 여러분의 자녀를 위해서 울며 주님이 주신 온전한 죄사함의 감격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여인들이 단지 예수님을 불쌍히 여기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을 때, 구레네 시몬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좇았습니다. “26 저희가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로서 오는 것을 잡아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좇게 하더라”
우리도 주님을 불쌍히 여길 때가 아니라 주님의 길을 따라가고자 할 때 그 십자가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저 주님을 불쌍하게만 쳐다 보며 안타까워하는 여자들이 아니라 담대하게 그 십자가 안으로 들어와 함께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그 죄사함의 은혜를 누리며 살아가는 자들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가 이시간 우리 모두에게 넘치게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