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우애] 51골 2; 16-19 우애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서 발전된다Loading the player...
51골 2; 16-19 우애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서 발전된다_1
2024. 4. 21. 주. 주일오전예배.
*개요: #76우애 [골]2:16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골]2:17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골]2:18 아무도 꾸며낸 겸손과 천사 숭배를 이유로 너희를 정죄하지 못하게 하라 그가 그 본 것에 의지하여 그 육신의 생각을 따라 헛되이 과장하고 [골]2:19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받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므로 자라느니라
성도로서 우애를 이루며 살아가는 것은 구원의 열매와 관련되는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래서 우애를 이루지 못하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우애를 이루고자 하면서 풍성한 구원의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야에서 우애를 이루지 못한다고 해서 구원의 은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예수님께서 구원의 은혜를 주시는 의미를 오해하는 것이 됩니다. 구원의 열매는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구원받은 자가 우애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우애하지 않는다고 해서 구원을 못 받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도가 우애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은혜가 더 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보다 성도의 우애가 더 큰 것이 아닙니다. 그 은혜 속에 있기 때문에 은혜로 우애를 이루는 것이지 우애를 안 한다고 해서 은혜가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이유가 있기 때문에 만약 우애를 못하는 상황에서 우애를 해야 하는 신앙적인 부르심을 생각한다면 할 수 있는 일은 가능한 다른 분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모든 분야에서 우애를 못한다는 것은 구원받은 성도에게 상상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어떤 분야에서 우애를 하기가 어렵다면 우애를 할 수 있는 분야로 나아가려고 하고 또한 그렇게 나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럴 때 받은 구원의 의미를 나타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은 성도가 그렇게 할 수 있기 위한 논리적인 근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안 되는 부분은 어쩔 수 없더라도 될 수 있는 부분을 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원리가 오늘 말씀에 나타납니다. 인생 속에서 완벽한 우애를 만들어야만 한다는 속박에 매이는 것이 아니라 우애 그 자체를 포기하지 않을 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다는 의미입니다. 그럴 때 인간의 연약함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16절을 보십시오. “[골]2:16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골]2:17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골로새 교회에는 먹고 마시는 것이나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완벽한 삶을 살아야만 한다는 기준에 따른 생각이었습니다. 골로새 교회는 주변에 라오디게아 교회와 히에라볼리 교회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골로새 교회가 보기에는 완벽한 기준에 미달하는 모습이었고 그런 모습을 비판하다 보니 그들 스스로도 완벽함에 미치지 못할 때 비판하려는 모습이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의 준수여부로 성도를 비판하는 일들이 생겼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런 모습에 대해서 하나님의 뜻은 분명했습니다. 그 모든 기준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기는 하지만 성도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기 때문에 부족한 성도를 비난하고 하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는 것과 그런 방향으로 가지 못할 때 가혹하게 대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방향을 제시하는 것은 옳은 일이지만 그걸 온전하게 따르지 못한다고 해서 비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를 잘 생각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가고자 할 때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말씀을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먹고 마시는 것이나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장래 일을 보여주는 그림자일 뿐이었고 더 큰 본질은 그 모든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것으로 존재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해야 하는 일은 성도로서 해야 하는 일이지만 그걸 못한다고 해서 비판 받거나 그리스도의 것이 안 될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의 약함보다 그리스도의 강함이 더욱 크시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우애가 없다고 해서 그리스도가 아닌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것으로서 계속 우애를 다른 곳에서 찾으면서 살아야 합니다. 개인적인 삶에 우애가 없다면 가정에서 우애를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가정에서 우애가 없다면 학교나 직장에서 우애를 찾으면 됩니다. 학교나 직장에서 찾을 수 없다면 사회생활 속에서 우애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찾아 나갈 때 비로소 우애의 결핍에 얽매이지 않고 하나님의 우애의 풍성함을 이루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15장에서 사도 바울과 바나바는 마가 요한을 데리고 가는 일로 심하게 다투었습니다. 결국 바울과 바나바는 각자 실라와 마가 요한을 데리고 헤어져서 나름의 사역을 진행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돌아왔을 때 그들은 화해를 했고 다시 연합하고 협력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우애가 안 된다고 해서 원수를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우애가 안 된다고 해서 다른 분야에서의 우애를 포기해서도 안 됩니다. 여기에 없는 사람은 우애가 가능한 다른 곳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결국 우애를 포기해 버릴 위기를 잘 넘어갔을 때 우리는 아주 중요한 의미를 발견하게 됩니다. 18절 말씀을 보십시오. “[골]2:18 아무도 꾸며낸 겸손과 천사 숭배를 이유로 너희를 정죄하지 못하게 하라 그가 그 본 것에 의지하여 그 육신의 생각을 따라 헛되이 과장하고 [골]2:19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받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므로 자라느니라” 꾸며낸 겸손과 천사 숭배를 이유로 성도를 정죄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이 말을 영어 성경으로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Do not let anyone who delights in false humility and the worship of angels disqualify you for the prize.’ 이는 거짓된 겸손과 천사 숭배를 좋아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의 상을 잃어버리게 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진정한 겸손이 아닌 거짓된 겸손과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 아닌 천사를 숭배하는 것을 좋아한다면 그런 생각은 오히려 더 큰 시험과 실족함에 빠지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그러한 오해에 흔들려서는 안 됩니다. 우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인데 하나님의 택하심과 부르심을 받은 자들로서 우애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씀이지 그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상급보다 더 큰 기준이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안 되는 우애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되는 우애로 나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모든 인간 관계의 우애를 이루어야만 한다는 기준을 갖는다면 그것은 다른 사람을 정죄하려는 것일 뿐입니다. 불가능을 이루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룰 수 없는 기준을 제시하는 자들의 헛된 과장과 머리를 붙들지 않는 마음이 우애를 이루는 근원이 되는 그리스도를 잃어버리게 만듭니다. 그러면 결국은 자신이 이렇게 선한 행동을 한다는 스스로의 만족감만 있을 뿐입니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헛된 과장을 버려야 하고 머리를 붙들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애가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이고 우애가 되는 분야에서 우애를 하면 됩니다. 그럴 때 우리는 겸손한 모습으로 머리를 붙드는 자들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진리를 이해한다면 어떻게 우애를 해 나가는지도 알게 됩니다. 그것은 자라날 때 가능해집니다. 노력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 안에서 성장할 때 우애할 수 있는 것입니다. 19절을 다시 보십시오. “[골]2:19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받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므로 자라느니라” 진실로 머리를 붙드는 자들은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받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므로 자라납니다. 그래서 우애를 이루어가는 것은 머리의 공급을 받음으로 인해 하나님의 자라게 하심으로 자라나서 생기는 일입니다. 스스로 노력하고 스스로 애를 써서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부터 공급받을 때 예수님을 더욱 알게 되고 그 지식 속에서 자라남으로 비로소 성장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애를 하게 됩니다. 어린 아이들이 서로 친해지는 과정을 생각해 보십시오. 스스로 친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친해 지는 방식을 부모로부터 배워 나가면서 비로소 친밀해집니다. 부모에게서 우애하는 법을 배울 때 비로소 우애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걸 가르치지 않으면 저절로 우애하게 되는 일은 없습니다. 성도로서 우애하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배웠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가 우애할 수 있도록 가르쳐 주시고 그것은 자신이 연약함과 그리스도가 필요함을 깨달을 때 시작됩니다.
오늘도 우리를 우애를 통해 성장시키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하겠습니다. 그것은 장래 일의 그림자입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더욱 온전한 우애로 나아가기를 사모하는 하나님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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