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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계22; 16-21 말씀하신 대로 나타나시는 예수님_1
2025. 1. 26. 주. 주일오전예배.
*개요: 83성숙,
[계]22:16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언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 별이라 하시더라
[계]22:17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계]22:18 내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계]22:19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계]22:20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계]22:21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2025년 시작은 신년을 통해서 그리고 음력 설을 통해서 우리에게 나타났습니다. 이제 그 다음으로 해야 하는 것은 이 한 해를 어떻게 보낼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시간이 오고 가는 것은 어떻게 할 수 없지만 그 시간 속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는 할 수 있는 일이 많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일을 하다 보면 시간의 흐름 속에서 보람 있고 결실이 많은 연말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연말의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 연초의 고생을 감수하려고 한다면 왜 고생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해답을 찾게 됩니다. 이와 같이 우리 인생도 하나님이 종말에 이루실 일을 생각한다면 그 전까지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 인생의 끝이자 신앙생활의 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끝을 만나게 되기 위해서 우리는 현재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 끝이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살펴보십시오.
“[계]22:16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언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 별이라 하시더라
[계]22:17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최종 마지막에 일어나는 일은 예수님 자신을 만나는 일입니다. 그전까지 예수님은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증언하게 하셨습니다. 이 내용들은 바로 예수님을 믿고 상급을 얻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부인하다가 형벌을 받는 것입니다. 심판을 통해 상급을 받는 천국으로 가게 될지 형벌을 받는 지옥으로 가게 될지를 증언하게 하셨습니다. 그걸 증언하게 하신 이유는 그 내용이 확실하고 예수님 자신이 그 일을 이루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맨 마지막에 예수님은 친히 나타나셔서 모든 것을 확인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요 광명한 새벽 별이셨습니다.
다윗의 뿌리이자 자손이라는 말씀은 다윗이 존재하게 하신 근원이자 다윗을 통해 나타나신 구세주라는 의미였습니다. 호크마 주석에서는 ‘영적으로는 그분에게서 다윗이 나셨으며 혈통적으로는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영원한 나라의 왕’이시라고 했습니다. 진정으로 참 하나님이시자 참 사람이신 예수님이었습니다. 또한 광명한 새벽 별은 모든 존재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시는 근원이심을 보여주는 말씀이었습니다. 호크마 주석은 이 광명한 새벽 별에 대해서 ‘종말론적인 새 시대의 여명이 되시는 예수님’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까지의 세상을 통해서 새로운 세상을 여시는 시작이 되시는 분이셨습니다. 앞으로는 예수님을 통해 구원받은 자들과 함께 새로운 세상을 시작하시는 것입니다.
그 새로운 세상으로 하나님은 우리를 초대하셨습니다. 성령과 신부는 말씀하기를 ‘오라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중보하시는 성령과 그 은혜를 얻은 신부 되는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모든 성도들에게 생명수를 받으러 오라고 부릅니다. 그 거룩한 부르심을 생각하며 예수님께로 나아가고자 할 때 우리는 최종적인 승리를 얻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인생의 마지막이자 신앙생활의 완성이 됩니다.
모든 이야기의 마지막이 있습니다. ‘그들은 행복하게 오래오래 잘 살았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의 마지막도 이와 같습니다. 그런 결말을 바라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생명수로 오라 하실 때 기쁨과 소망을 가지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모든 영화나 드라마에서 사람들은 바로 그런 엔딩을 소망하지 않습니까? 우리 인생이 바로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해피 엔딩으로 인생이 끝이 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해피 엔딩이 바뀌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바랬는데 갑자기 새드 엔딩으로 변화됩니다. 또는 오픈 엔딩으로 끝이 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해피 엔딩을 마련해 두셨지만 우리가 그러한 결말을 사모하고 노력할 때 비로소 우리는 그 결말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우리는 잘 기억해야 합니다. 18절을 보십시오.
“[계]22:18 내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계]22:19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증언하셨는데 누가 이것들 외에 다른 것을 더하면 여기에 나온 재앙을 그에게 더하신다고 했습니다. 또한 이 예언의 말씀에서 누가 무엇이든 제하면 하나님께서 그를 제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이 예언의 말씀을 그대로 전하는 것이 중요하지 그 내용에 무엇을 더하거나 혹은 제하거나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시는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처음과 끝의 일치를 이루는 심판도 보았습니다.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되는 사람들도 보았습니다. 그러면 그런 내용들에 대해서 더하는 것과 제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성도의 관계인데 그런 관계에 더해지는 것은 또 다른 신앙의 대상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흐려지고 약해집니다. 그러니 그런 더함을 이루어서는 안됩니다. 공적이나 행위를 중시한다거나 이단이나 이교를 따라간다거나 하나님 이외의 다른 사주나 팔자나 운을 섬긴다거나 해서는 안됩니다.
왜 성도는 어린양이신 예수님의 생명활동을 중요하게 여겨야 하고 눈물을 닦아 주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생각해야 합니까? 그럴 때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가 굳세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런 친밀함이 없다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중단됩니다. 흔히 이야기하는 사람 때문에 혹은 상황 때문에 하나님을 버리는 경우를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 보다 더 중요해진 사람이나 상황이 결국은 하나님을 잃게 만듭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에서 무엇인가를 더하지 않도록 우리는 주의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에서 무엇인가를 빼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이 부분은 너무 오래된 일이라서 빼고 저 부분은 너무 문화가 다르다고 빼고 비과학적이라서 빼고 근거가 없다고 빼고 기분이 나쁘다고 빼고 이렇게 빼고 저렇게 빼면 결국 자기도 빠집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제하면 그가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함을 제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되는 궁극적인 이유는 하나님이 거기에 직접 나타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만날 준비를 해야 하고 예수님을 직접 보게 될 일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걸 생각하니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함을 아는 것이고 예수님께 감사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에게 예수님께 처음 나타나셨을 때 ‘왜 나를 핍박하느냐’고 하셨습니다. 그동안 바울이 열심히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핍박했기 때문입니다. 그걸 예수님이 직접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도마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셨을 때 내 상처를 보고 나를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도마가 그 전에 열심히 예수님의 부활을 부인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직접 나타나셔서 말씀해 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전에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 부인하고 거부하고 핍박해서는 안 됩니다. 살아계신 예수님을 다시 만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대제사장의 뜰에서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후에 통곡하면서 후회했지만 이미 늦었습니다. 자신은 그곳에서 무사히 빠져나왔지만 예수님은 십자가형을 받으시고 죽으셨습니다. 이후에 베드로는 고기를 잡기 위해서 갈릴리 바다로 떠났는데 바로 그곳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다시 나타나셨습니다. 자신이 예수님을 세번이나 부인했었는데 그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찾아오셨다는 것은 무척 어색한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를 조반에 초대해 주셨고 그에게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번 물어보셨습니다. 베드로에게 그것은 기회였고 다시 주님을 사랑한다는 고백을 했을 때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양을 치고 먹이도록 명령을 내려 주셨습니다.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을 만나면서 베드로는 다시 회복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는 예수님을 두 번 다시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한해를 시작하면서 다시 오실 예수님을 만날 것을 준비하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그럴 때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또한 해야 할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마지막 절은 이렇게 끝이 납니다.
“[계]22:20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계]22:21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예수님이 오신다고 했을 때 사도 요한은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했습니다. 그런 대답이 주님을 기다리는 모든 성도들의 동일한 대답입니다. 주님과 깊은 관계가 있을 때 주님 오시는 것이 기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오실 것을 기다리며 오실 예수님을 준비할 때 우리는 주의 말씀을 지키며 살아갈 것입니다. 그럴 때 올해가 놀라운 은혜로 넘칠 것이며 연말에는 풍성한 결실로 넘칠 것입니다.
이러한 소망을 가지고 더욱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