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3:14 그들이 회오리바람처럼 이르러 나를 흩으려 하며 가만히 가난한 자 삼키기를
즐거워하나 오직 주께서 그들의 전사의 머리를 그들의 창으로 찌르셨나이다
[합]3:15 주께서 말을 타시고 바다 곧 큰 물의 파도를 밟으셨나이다
[합]3:16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말미암아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썩이는 것이 내 뼈에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
[합]3:17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합]3:18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합]3:19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 노래는 지휘하는 사람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니라
성도들이
전도를 하지 못하는 여러가지 이유 중의 하나는 전도를 하기에는 자기 자신의 믿음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전도라는
것이 내가 믿어보니 좋아서 추천할 만하고 권할 만 하니까 전하는 것이 되어야 하는데 자기 자신이 믿기에도 별로 만족스럽지 못하니까 남에게 권할
것도 못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를 못한다는 것은 그만큼 신앙에 대해서도 뭔가 불만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불만스러운 이유를 생각해 보면 교회 자체에 대한 불만도 있겠지만 하나님께 대한 불만도
큽니다. 불교를 믿는 분들이 절에 대한 불만 보다는 부처님에 대한 불만이 있을 수 있는 것처럼 기독교를
믿는 분들도 역시 교회에 대한 불만 보다는 하나님에 대한 불만이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에 대한 불만 가운데 오늘 성경에 나오는 하박국 선지자는 구체적인 불만의 원인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선지자였습니다. 보통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초신자나
새신자가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믿을 만큼 믿고 알만큼 아는 이 선지자가 하나님께 대해서 갖는 불만은
바로 하나님이 세상에 죄악과 패역을 그대로 내버려두신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박국 1장 2절부터 4절까지의
내용입니다.
“[합]1:2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로 말미암아 외쳐도 주께서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합]1:3 어찌하여 내게 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눈으로 보게 하시나이까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
[합]1:4 이러므로 율법이 해이하고 정의가 전혀 시행되지 못하오니 이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정의가 굽게 행하여짐이니이다”
이것은
다시 말하면 그가 하나님께 대해서 다음과 같이 불만을 제기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강포를 고발하여도 구원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죄악과 패역을 그대로 내버려 두신다.
-하나님은 악인이 의인보다 많게 하셔서 정의가 사라진다.
이러한
불만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이 세상에는 죄악과 불의가
여전히 존재하고 있으니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불신자에게는 불신의 이유가 되고 신자에게는
전도하지 못하는 이유가 되는 이러한 불만은 우리 자신들도 그대로 경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정말로
강포를 고발하여도 당장 조치를 취하시지 않습니다. 죄악과 패역을 그대로 두셔서 더욱 퍼지게 하십니다. 악인이 의인을 둘러싸도록 많아지게 허락하셔서 결국 정의를 이룰 수가 없습니다.
저도 이러한 일들에 대해서 너무나 공감합니다.
얼마전에
저는 어떤 인터넷 신문사의 기자 목사님과 함께 노회행사에 참여하기 위해서 함께 차를 타고 간 적이 있었습니다. 총신대
양지캠퍼스까지 함께 차를 타고 가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는데 그 신문사는 오직 교단관련 사건만 다루는데 교계안에서는 별의 별 사건이 일어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항상 그런 문제는 선악의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항상 그럴 때에는 돈있고 힘있는 사람이 이긴다는 것이었습니다. 올바르게 옳고 그름이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돈있는 사람이 이기고 힘있는 사람이 이기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자신도 처음에는 그걸 몰라서 어떤
악을 행하는 사람에 대한 기사를 썼는데 그 사람이 명예훼손으로 고소를 했다고 합니다. 당연히 진실이고
증거도 다 있어서 국선변호사를 통해서 재판을 받았는데 판사는 결국 자기말이 거짓이고 고소자의 말이 진실이라고 판결을 내렸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고소자의 고소를 전문 변호사가 성심을 다해서 논리를 제기해야 판사가 받아들이는데 자신은 이런일이 처음이고
또 당연히 증거가 있고 진실에 대한 확실함이 있어서 덤덤하게 응했더니 결국 자신이 거짓이 되더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이유로 많은 사람들이 실력있고 유능한 변호사에게 많은 돈을 주고 의뢰를 하게 되고 결국은 그런 식의 대응은 판사로 하여금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말 잘하고 논리 정연한 쪽이 이기게 만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회에
이러한 부조리는 얼마나 많이 퍼져있습니까? 엄격하게 법적용을 하는 재판도 이런 식인데 그보다 더 원칙도
원리도 없는 일반사회에서는 얼마나 부정과 부패와 강포와 패역이 더 팽배해 있는지는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속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있다는 것은 여기에 대한 도우심과 역사하심을 기대하는 것인데 때로 하나님은 우리의 기대에 너무나 못미치는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절망과 낙심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선악의 문제에 대해서 매우 예민해지고 그것에 대해서 깊은 스트레스를 받고 올바르게 선이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에 대해서 분노하고 격분하게
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한번 생각해 봅시다. 그 모든 선악의 문제에 대한 상심과 분노와 절망과 격분
속에는 우리들의 ‘유익’이 숨겨져 있습니다. 선과 악에 대한 감정적인 괴로움 속에는 결국 우리 자신이 아무 것도 얻지 못하거나 혹은 얻어야 할 것을 얻지
못한 것에 대한 상실감이 있습니다. 때로는 선악에 대해서 별로 예민해지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바로 내가 얻은 것이 있을 때입니다. 때로는 악한 방법이나
때로는 불의한 방법이 시행되었지만 그로 인해서 결국 내가 소득이 생기고 유익이 생겼을 때에는 굳이 이의를 제기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로 인해서 괴로움과 불편함과 유익의 상실이나 소멸이 이루어지면 그 다음부터는 거세게 항의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하나님께 대해서 불만을 제기할 때 근본적으로 원하는 것은 선과 악에 대한 간절함이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손해와 불편과 상실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마침내 선을 이루시고 악을 멸하시는 것에 대해서 말씀해 주실 때에도 우리는
쉽게 마음이 사그라들지 않습니다. 결국은 지금 당장의 유익과 변화와 공급을 기대하기 때문에 언젠가 이루어지는
선에 대해서는 심드렁해집니다.
바로 그
때 하나님께서는 하박국에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단지 악인의 소멸과 심판에 대한 약속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단지 의인에게 임할 축복과 번영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자신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악에 대한 환멸과 의에 대한 낙심 속에서 정말로 하나님이 보여주신
응답은 그 모든 것을 깨끗하게 하시고 세우시고 온전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등장, 하나님의 나타나심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3장14,15절의
말씀입니다.
“[합]3:14 그들이 회오리바람처럼 이르러 나를 흩으려 하며 가만히 가난한 자 삼키기를
즐거워하나 오직 주께서 그들의 전사의 머리를 그들의 창으로 찌르셨나이다
[합]3:15 주께서 말을 타시고 바다 곧 큰 물의 파도를 밟으셨나이다”
여기서
‘그들’은 악인들입니다. ‘나’는 외로운 의인입니다. 악인이며 막강한 권세를 가진 ‘그들’은 의인이며 가난한 자인 ‘나’를 흩으려 하고 삼키려고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현재의 상황이며 처한
어려움입니다. 그런데 그때 ‘주’께서 나타나십니다. 우리를 강하게 해서 우리를 부하게 해서 우리를
능하게 해서 악을 물리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친히 우리에게 오십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그들의
전사의 머리를 그들의 창으로 찌르십니다. 주님이 몸소 우리에게 오셔서 말을 타시고 바다를 밟으시고 파도를
밟고 서셨습니다. 주님은 더이상 멀리 계신 분이 아니요 우리 옆에 계셔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 되십니다.
지난 주
10월 20일(화)에는 총신대 신대원 양지캠퍼스에서 신사참배 회개예배가 있었습니다. 1938년
일제강점기때 한국장로교는 총회를 열고 일제신사에 대한 참배를 가결하였습니다. 일본순사들의 삼엄한 위협속에서
이루어진 신사참배가결은 ‘나 외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제 1계명을 어기는 심각한 우상숭배였습니다. 하지만 그 시대의
암울함은 이것을 거부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미 그당시 우리는 1910년
한일합병으로 국권을 잃었고 1937년 중일전쟁으로 전란에 휩싸여 있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일제에 학병, 징병, 위안부로 끌려가고 경제적,
정치적 수탈이 극대화되던 때였습니다. 그래서 교회도 힘을 잃고 신사참배위협을 이겨내지 못하고
덜컥 가결을 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로부터 77년이 지났습니다. 그동안 이런 저런 이유로 못하고 있다가 이제서야 지난 소래노회 가을정기노회에서 신사참배를 회개하고 취소하는
결의를 하였고 바로 지난 주에 회개예배를 드리게 된 것입니다. 저도 그 자리에 참여해서 그 모든 어리석음에
대해서 하나님께 회개를 드렸습니다.
돌이켜
보면 우리나라에 있었던 비극적인 모든 일들은 우리가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부족한 자들이었는가를 깨닫게 합니다.
그 국가적으로 어려울 때에 믿음을 지키지 못하고 변질되어버린 것은 너무나 안타까운 모습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 민족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민족을 붙들어 주셨습니다. 비록 신사참배 결의는 하였지만 하나님을 버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또한
그 결의에 참여하지 않은 신앙인들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사 우리 민족에게, 우리의 믿음의 선조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분 자신을 나타내 보여주신 것입니다.
악인에
대한 억울함과 의인의 비참함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것은 하나님 자신을 깨닫게 하시고 하나님 바로 그분으로 인해서 소망을 가지고 기뻐하게
하신 것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바로 이것을 깨달았습니다.
“[합]3:16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말미암아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썩이는 것이 내 뼈에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
지금 당장
선악이 온전해지고 악인과 의인이 적절한 처분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정말로 우리를 기쁘게 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셔서 우리를
붙들어주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온전히 마음속에 모시고 하나님과 진정한 연합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박국 선지자는 고백했습니다.
“[합]3:17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합]3:18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그는 자신의
어떤 상황 속에서도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기뻐하리라고 하였습니다. 그 하나님은 자신과 함께 하는
하나님, 자신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그가 기뻐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단지 미래에 악인을 심판하겠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제 곧 의인들을
구원해주시겠다고 하시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지금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대답하시고 그에게 응답하시고 그 모든 고통을 아시고 그 모든 울분을 받아주시고 그러면서 소망을 주시고
생명을 주시고 버틸 수 있게 하시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붙들 때 우리에게는 놀라운 은혜가
있습니다. 큰 기쁨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 죽은 지
사흘 만에 홀로 남은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오셨을 때에 그들에게 기쁨이 있었던 것과 같습니다. 이미 나사로는
죽었고 장례도 치렀고 어쩌면 나중에 오신 예수님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았지만 예수님이 오셨다는 그 사실 하나 만으로 마르다와 마리아는
기뻐했습니다. 그들의 고통과 슬픔 속에서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눈물을 흘리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와 함께 분노하시고 우리와 함께 슬퍼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을 아시고 우리의 심령을 헤아려 주십니다. 당장
달라지는 것은 없더라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소망하고 바랄 때 우리에게는 커다란 기쁨이 있습니다. 무화과가
없고 포도열매가 없고 감람열매가 없고 밭소출이 없고 양이 없고 소가 없어도 있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을
붙들 때에 바로 그 하나님을 모시게 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모시게 될 때에 우리는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하박국은 이러한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합]3:19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 노래는 지휘하는 사람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니라”
주님과
나와의 관계는 ‘나의 힘’이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어로 חַיִל chayil 이라고
합니다. 그 의미는 ‘나의 능력, 근원, 부귀, 권능’ 등입니다. 내 능력이 나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의 능력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에 있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놀라운 일들을 이루어주십니다. 하나님이 나의 힘이 되셔서 놀라운 일들을 경험하는 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경험하고서 그분이 나의 힘이 되시는
것과 다릅니다. 전자는 이로 인해서 더욱 하나님과 깊어지지만 후자는 하나님과 더욱 멀어질 수 있습니다. 신앙은 조건적이 되고 관계는 멀어지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먼저
기뻐하면서 하나님을 붙들 때에 주님은 마침내 놀라운 일들을 이루십니다.
1938년의 굴욕적인 신사참배결의 이후에 하나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3년뒤인1941년에 미국과 일본간의
대동아전쟁, 태평양전쟁이 발발하고 마침내 1945년에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하면서 우리나라는 자유를 찾게 되었습니다. 정말 그런 방법이 아니었다면 우리민족은 꼼짝없이
그대로 사라질 뻔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나라를 강하게 만드시는 것이 아니라 미국을 들어
일본을 치심으로써 우리나라를 자유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행하심은 신기합니다. 지금은 하나님께 대한 불만이 있을 지라도 그 하나님을 붙들고 그 하나님으로 인해서
소망을 갖는다면 주님은 여러분으로 만족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여러분으로 하여금 여러분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십니다. 여전히 전도하기에는 부족한 믿음과 전도하기에는 너무나 큰 불만을 하나님께 대해서 가지고 있다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오직 하나님을 붙들고 그분을 버리지 않고 그분을 소유하고 받아들이고 그래서 그분으로 인해 기뻐하는 것임을 기억하십시오. 그러면 언젠가는 하나님으로 인해서 정말 기뻐하는 자들이 되실 것입니다.
사람과의
관계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지금은 맘에 안들어도 버리지 않고 잘 견디다 보면 시간이 지난 다음에 정말
진가를 알게 되고 큰 의미를 알게 되는 그런 관계가 있습니다. 지금 당장 실망스럽고 도움이 안된다고
해서 관계를 다 끊어버리면 나중에 후회하게 되는 때가 있습니다. 그 모든 관계 중의 가장 중요한 관계가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그분에 대해서 어렵고 힘들때가 있더라도 좀더 견디며 그분을 바라보십시오. 하나님은 반드시 놀라운 은혜를 부어주실 것입니다.
우리에게
전도는 여전히 부담스러운 것이지만 하나님을 붙들고 살아감으로 그 하나님을 기뻐하고 감사하게 되는 날이 오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진심으로 감사하고 기뻐하게 될 때에 진정으로 의미있고 가치있는 전도를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전도의 날들이 여러분에게 넘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