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에브라임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이르되 네가 미디안과 싸우러 갈 때에 우리를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우리를
이같이 대접함은 어찜이뇨 하고 크게 다투는지라
2기드온이 그들에게 이르되 나의 이제 행한 일이 너희의 한 것에 비교되겠느냐 에브라임의 끝물 포도가
아비에셀의 맏물 포도보다 낫지 아니하냐
3하나님이
미디안 방백 오렙과 스엡을 너희 손에 붙이셨으니 나의 한 일이 어찌 능히 너희의 한 것에 비교되겠느냐 기드온이 이 말을 하매 그들의 노가 풀리니라
온유의
모습에 대해서 설명을 한다면 많은 말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삶속에서 그 온유함을
어떻게 나타내느냐는 점입니다. 그 온유한 모습을 삶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낼 수 있을 때에 온유에 대한
모든 설명이 의미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온유에 대해서 계속 설명을 하기만 한다면 그것은 자칫 추상적이고
비현실적인 생각에 그치고 말 것입니다. 이제 현실속에서 볼 수 있는 진정한 온유의 한 장면이 오늘 읽은
말씀속에서 나옵니다. 자신에 대해서 분노하며 다투던 사람들에게 기드온이 보여준 모습은 진정한 온유함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에브라임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시비를 거는 장면에서 시작되고 있습니다.
“삿8:1에브라임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이르되 네가 미디안과 싸우러 갈 때에
우리를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우리를 이같이 대접함은 어찜이뇨 하고 크게 다투는지라”
기드온은
원래 므낫세 족속이었습니다. 원래 므낫세와 에브라임은 요셉의 두 아들로서 므낫세가 장자이고 에브라임이
차자이었습니다.그런데 요셉의
아버지 야곱이 이 두 아들에게 축복할 때에는 손을 어긋맞겨서 머리에 얹으면서 둘째인 에브라임을 첫째인 므낫세보다 더 많은 축복을 해주었습니다. 아마 야곱 자신이 둘째로서 형인 에서보다 더 많은 축복을 받은 것을 생각하고 요셉의 두 아들에게도 동일하게
둘째를 첫째보다 더 우선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에브라임 자손은 늘 므낫세 자손에 대해서 우월감이
있었습니다. 더 많은 영광을 얻고자 했고 오히려 그것을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므낫세 자손이었던 기드온이 처음 미디안을 치러 갈 때에 왜 자신들을 부르지 않았는가에 감정이 상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때에 기드온은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상황이었고 하나님은 온 이스라엘에서 미디안을 대적하기 위해서 모인 3만2천명 중에서 2만 2천명을 돌려보내게 하셨습니다. 또한 그중에서 300명만 남고 나머지도 역시 돌려보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미디안을
이기게 하시기 위해서는 종족이나 지파를 따지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고 기드온에게 충성하는 300명만을
데리고 가게 하셨기 때문에 기드온은 이런 저런 상황을 고려할 입장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정말 하나님의 뜻대로 기드온과 300명의 군사가 미디안을 공격했을 때 미디안 군사들은 밤중에 큰 소리를
내며 밀어닥치는 기드온의 부하들을 대부대로 오해하여서 서로 싸우며 서로 죽이면서 전쟁에서 쫓겨가게 되었습니다. 그때
기드온은 에브라임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삿7:24기드온이 사자를 보내어 에브라임 온 산지로 두루 행하게 하여 이르기를
내려와서 미디안 사람을 치고 그들을 앞질러 벧 바라와 요단에 이르기까지 나루턱을 취하라 하매”
에브라임
지파의 지역은 중부 산악지역에서 해변 평지에까지 이르렀는데 그 지역에서의 미디안에 대한 추격이 필요했었던 것입니다. 미디안과의 전쟁이 대치상태가 아니라 압도적인 승리로 적을 추격하기만 하면 된다는 것을 안 에브라임 지파는 힘을
내어서 미디안 군사들을 뒤쫓아서 커다란 수훈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이전 7장의 끝부분은 이렇게 끝이 납니다.
“삿7:24기드온이 사자를 보내어 에브라임 온 산지로 두루 행하게 하여 이르기를
내려와서 미디안 사람을 치고 그들을 앞질러 벧 바라와 요단에 이르기까지 나루턱을 취하라 하매 이에 에브라임 사람들이 다 모여서 벧 바라와 요단에
이르기까지 그 나루턱을 취하고
25또 미디안 두 방백 오렙과 스엡을 사로잡아 오렙은 오렙 바위에서 죽이고 스엡은 스엡 포도주 틀에서
죽이고 미디안 사람을 추격하고 오렙과 스엡의 머리를 가지고 요단 저편에서 기드온에게로 나아오니라”
그들은
벧 바라와 요단에 이르기까지 미디안을 추격하였고 나루턱을 먼저 차지하여서 오는 미디안 군사들을 처치하였습니다. 또한
미디안의 두 방백 오렙과 스엡을 사로잡았고 계속 그들을 추격해서 요단 저편까지 갔다가 기드온에게로 왔던 것입니다.
이러한
혁혁한 성과를 거둔 것을 생각해 볼때 에브라임 사람들은 아쉽기 짝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그만해도
잘한 것이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들에게는 그정도면 아주 못한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이정도밖에 안되는 미디안
군사인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자신들이 나가서 싸웠으면 더 큰 승리를 얻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또한
그렇게 되면 단지 미디안에 대한 승리뿐만 아니라 향후 이스라엘 지파 전체에 대해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고작 이미 싸움에 진 잔당들을 소탕하는 정도였으니 이런 성과로는 다른 지파들에게나 이 전쟁을 주관한
기드온에게도 별로 내세울만한 것이 못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기드온에게 오자마자 왜 처음부터 자신들을
부르지 않았으냐고 시비를 걸었던 것입니다. 사실 기드온은 애초에 상대도 안될 것 같았던 미디안과 전쟁을
시작했던 하나님이 세우신 위대한 용사였지만 에브라임 사람들에게는 자신들의 더 큰 공적을 방해한 인물로밖에 생각되지 않았습니다. 또한 처음부터 그렇게 자신이 있었으면 미디안과의 전투에 적극적으로 나섰어야 했지만 그때에는 가만히 있다가 결과적으로
승리하게 되니까 큰소리를 치는 비겁한 자들이었던 것입니다.
우리 삶에도
그런 비슷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정상적으로 생각하면 노고와 수고에 오히려 고마워하고 더 돕지 못한 것을
미안해해야 할 것 같지만 그들에게는 특별한 우월감과 그 모든 수고에 대해서 당연하게 여기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더 자신들을 챙겨주지 못한 것과 자신들 중심으로 일이 진행되지 않은 것에 대한 불편함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로 다른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것입니다.
유명한
동화작가인 앤서니 브라운이 쓴 ‘돼지책’이라는 동화가 있습니다. 거기에는 늘 일만하는 엄마와 늘 부려먹기만 하는 남편, 그리고 늘
의존하기만 하는 두 아들이 있습니다. 남편은 늘 아내를 부리기만 하고 두 아들들은 늘 엄마에게 시키기만
합니다. 그러다가 결국 엄마는 이 말만을 남기고 집을 나가버립니다.
‘너희들은 돼지야’
그 다음부터
남편과 두 아들들은 돼지가 되어서 돼지처럼 아무 것도 못하고 살게 되었습니다. 며칠 후에 엄마가 다시
집에 들어왔을때 남편과 두아들들은 엄마에게 남아달라고 사정을 했습니다. 그리고 엄마는 다시 남기로 했습니다. 그런 뒤에 그들의 모습이 바뀌었습니다. 남편은 설겆이를 하고 다림질을
하고 요리를 도왔습니다. 아이들은 침대를 정리하고 요리를 도왔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돼지가 아니라 인간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엄마는 기뻤습니다.(너무 기쁜 나머지 엄마는 차를 수리하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분들 중에도 여러모로 가정적인 분들이 있습니다. 밖에서는 높은 위치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호령하며
지휘하는 사람이지만 안에 들어와서는 아내의 말에 고분고분 순종하는 가정적인 분들이었습니다. 음식을 가져다
주라면 가져다 주고 상을 피라면 상을 피고 전을 부치라면 전을 부치는 그런 분들이었습니다.(혹시 그분들도
부인께서 한번 집을 나갔다 와서 그렇게 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세상에는
정말 인내의 한계를 시험하게 만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때로 가정에 있습니다. 때로 교회에서 만나기도 합니다. 때로 학교에서 부딪히기도 합니다. 그러한 사람들을 결코 피할 수 없습니다. 직장에서 선후배로 만나기도
하고 주인과 종업원의 관계로 만나기도 합니다. 혹은 여행을 가서 만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만나서 시비를 걸어올 때 우리는 온유함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고 보게 하시는 온유함이 그 모든 불편함과 그 모든 거치는 것들을 일순간에 피해 버리게 만듭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통해 놀라운 승리를 얻었던 기드온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만나며 하나님으로 승리했던 기드온이 그 온전한 온유함을 보여줍니다. 그는
자신에게 거세게 항의하는 에브라임사람들에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2기드온이 그들에게 이르되 나의 이제 행한 일이 너희의 한 것에 비교되겠느냐 에브라임의 끝물 포도가
아비에셀의 맏물 포도보다 낫지 아니하냐”
기드온은
자신의 행한 일보다 그들의 행한 일을 더 높였습니다. 그래서 나의 행한 일이 너희의 한 것에 비교되겠느냐고
한 것입니다. 사실 기드온이 한 일이 더 큰 일이었습니다. 미디안과의
싸움이 시작되기 전에는 그 어느 누구도 이 싸움이 어떻게 될 지 알 수 없었습니다. 또한 그 당시 이스라엘은
미디안의 세력 하에 있었고 미디안은 세력이 강하여 이기지 못할 상대였습니다. 그로 인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괴로워서 부르짖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자들을 대상으로 엄청난 승리를 거두고 그들을 쫓아가는
입장에 서게 했으니 기드온의 행한 일이 더 크고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나 기드온은 그렇게 말해서 그들과
갈등을 시작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기를 낮추면서 ‘에브라임의
끝물 포도가 아비에셀의 맏물 포도보다 낫지 아니하냐’고 말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아비에셀은 므낫세지파에 속한 기드온의 종족을 의미합니다. 기드온은
에브라임의 결과물을 아비에셀의 결과물보다 더 높임으로써 그들의 분노를 잠재웠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기드온이 더 중요하게 여긴 것은 자신의 높아짐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더 중요하게 여긴 다른 것이 있었던 것입니다.
삼국지에
나오는 고사성어 중에 ‘허허실실(虛虛實實)’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위,촉,오 삼국으로 나뉜 시대에 촉나라의 참모였던 ‘제갈량’은 촉군을 ‘양평관’에
주둔시키고, 위나라 군대를 공격하게 했습니다. 정예군을 모두
공격으로 보내고 성에는 부상병과 늙은 병사만 남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때 위나라의 ‘사마의’가 15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양평관으로 쳐들어 왔던 것입니다. 이 때 제갈량은 군사들로 하여금 성문을 활짝 열어두고
군사 몇 명을 백성처럼 보이게 해 성문 청소를 시켰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성루에 앉아 한가롭게 거문고를
뜯었습니다. 이런 모양을 본 사마의는 제갈량이 분명히 자신을 속이려는 계략을 꾸미고 있다고 생각해 군사를
후퇴시켰던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겉으로는 텅빈 듯하게 보이지만 사실은 실리를 취한다는 의미의 고사성어가
나왔습니다.
기드온에게
진정한 실리는 에브라임보다 자신을 높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허허’일 뿐이었습니다. 진정한
실리는 바로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었습니다. 공적을 따지는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기드온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도우셨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과 하나님께서 행하셨던 일이 아니었다면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러한 고백 속에서 비로소
인간은 사라지고 하나님의 역사하심만이 남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3절에 나옵니다.
“3하나님이 미디안 방백 오렙과 스엡을 너희 손에 붙이셨으니 나의 한 일이 어찌 능히 너희의 한 것에 비교되겠느냐 기드온이 이 말을 하매 그들의 노가 풀리니라”
하나님이
행하게 하신 일은 기드온이 300명으로 해변의 모래처럼 많던 미디안 사람들을 이기게 하신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일은 에브라임 족속으로 미디안 방백 오렙과 스엡을 이기게 하신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일도 행하시고 저일도 행하셨습니다. 그 모든 일을 전부
하나님께서 행하셨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그속에서 자신이 행한 일이 저들이 행한 일보다 더 크다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은 에브라임 지파사람들을 통해 하신 것도 있는데 어찌 그것이 작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말하는 기드온과는 달리 그속에서 자신들의 행한 일의 중요성을 보던 에브라임 사람들에게 기드온의 말은 노를 풀리게 하는 말이었습니다. 사실 그것은 하나님을 높이는 말이었지만 그들은 그것은 아무래도 상관없었습니다.
어차피 기드온이 한 일보다는 자신들이 한 일이 더 대단하다는 말이 듣기 좋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분노가 사라졌습니다. 그들의 노가 풀렸습니다. 자기들이
원하는 대답을 들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자신들이 기드온보다는 낫다는 대답을 들었습니다. 사실 기드온이 그렇게 대답한 것은 그가 자기 자신이나 혹은 에브라임 보다도 더 높으신 하나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낮추고 고개를 숙일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었다면 고개를 숙이지 못했겠지만 어차피 하나님 앞에서는 겸손할 수 밖에 없으니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머리를 숙였던 것이고 그것이 에브라임
사람들에게는 모든 분노를 가라앉게 만드는 겸손함이 되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을 격동시키는 모든 상황에서 오히려 더 강하게 나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기가 죽게
되고 억압받게 되고 평생 그러고 살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구부려지기 보다는 오히려 부러지는
편이 낫다고 말합니다. 그로 인한 결과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오직 그 순간의 자신의 자존심과 자신의
평가와 자신의 입장과 자신의 위치만을 생각하게 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에게 그 순간에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생각하게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누가 이 모든 것을 너에게 주었느냐고 물으십니다. 누가 이 모든 일을 행하였느냐고 물으십니다. 그 물음 앞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정을 주셨고 남편과 아내를 주셨으며 아들과 딸을 주신 것입니다라고 말씀드리게 됩니다. 사실
진정으로 영광받으셔야 하는 분은 바로 하나님입니다. 그 속에서 나의 위치가 1순위가 아니라 2순위로 내려올 때에 비로소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럴 때 그 다음부터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추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 다음이 내가 되던 다른 사람들이 되던 상관이 없게 되어버립니다. 하나님이 이루신 성공이요 하나님이 이루신 승리이니까 미디안 군대를 처음 대면하던 기드온 자신의 공적이나 미디안
군사들끼리 서로 싸우면 패하게 된 그들을 쫓아갔던 에브라임의 공적이나 그 어느 것도 중요한 것이 아니게 됩니다.
에브라임 사람들은 그 속에서도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들이 그래도 두번째는 된다는 것이 위안을 얻으려고 하겠지만 진정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그 속에서 제일 위대하신 하나님만 바라봅니다. 그것으로 만족하고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온유하게
대할 수 있습니다.
다시 앤서니
브라운의 ‘돼지책’으로 돌아와봅니다. 이책에서의 가장 놀라운 점은 남편과 아이들의 변화이지만 엄마의 측면에서 진정한 온유함이란 어떤 것일까요? 그것은 돼지같은 남편과 돼지같은 아이들을 내버려 두고 집을 떠나가는 것일까요?
진정한 온유함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남편과 아이들을 주신 것에 감사하며
그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가지고 남편과 아이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들을 시종들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들을 사랑하면서 온유하게 대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남편이 남편으로서
역할을 할 수 있게, 아이들이 아이들 자신의 해야할 일을 할 수 있게 만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온유함으로 성도가 성도로서 설 수 있게, 그리고 직분자가
직분자로서 설 수 있게, 그리고 교역자가 교역자로서 설 수 있게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것을 전혀 하지 않다가 갑자기 터져 버리는 것이 문제이지 더 중요한 것은 지금 그것을 행할 수 있도록
격려해주는 것이 필요한 일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온유함을 가지고 다시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해야하는 일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기드온이
에브라임으로 하여금 미디안을 쫓게 하였고, 또한 그 공적을 자랑하며 자신에게 시비를 걸 때에도 그들을
추켜 세우면서 계속 열심히 행할 수 있게 하였던 것처럼, 온유함을 가지고 사람들이 하나님의 일을 행할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그럴 때 그들로 인해 바로 우리들이 하나님의 승리를 누리며 그 승리로 인해서
기뻐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진정한 온유함을 가지고 분노를 사라지게 하며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귀한 일을 이룰 수 있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