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금요] 44행24; 13-16 그리스도인의 양심의 모습_5
44행24; 13-16 그리스도인의 양심의 모습_5
2025. 10. 17. 금. 금요철야.
찬양: [336장] 환난과 핍박 중에도, 나보다 나를 잘아시는 주님, 비준비하시니, 주의 보좌로 나아갈 때에
개요: 네비게이션 E8, 도덕 [행]24:13 이제 나를 고발하는 모든 일에 대하여 그들이 능히 당신 앞에 내세울 것이 없나이다 [행]24:14 그러나 이것을 당신께 고백하리이다 나는 그들이 이단이라 하는 도를 따라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것을 다 믿으며 [행]24:15 그들이 기다리는 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니이다 [행]24:16 이것으로 말미암아 나도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나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을 생각할 때 양심이라는 주제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또 다른 기준이 됩니다. 그런데 이 양심은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보편적인 양심의 내용이 아니라 성경을 통해 형성된 양심을 의미합니다. 그럴 때 성경에 나오지 않은 더 세부적이고 미묘한 선택의 순간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대로 결정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이 형성됩니다.
일반적인 양심이 아니라 성경에 나오는 양심의 의미를 생각할 때 오늘 성경 말씀은 사도 바울의 고백 속에서 그에게 있던 양심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15절부터 보십시오. “[행]24:15 그들이 기다리는 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니이다 [행]24:16 이것으로 말미암아 나도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나이다” 사도 바울은 사도행전 24장에서 벨릭스 총독 앞에서 재판을 받을 때 유대인들의 고소에 대해서 스스로를 변호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유대인들이나 나나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가졌고 그것은 의인과 악인이 부활할 것이라는 소망이라고 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성경이 보여주는 양심의 기준이 나타납니다. 바로 행동 하나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행동이 나중에 해당 당사자들이 다 부활했을 때 그 의미가 무엇이었는가를 증명하는 기준이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말하는 양심이란 바로 이것입니다. 의인과 악인, 혹은 피해자와 가해자가 하나님 앞에서 전부 다시 부활했을 때 그 때에도 부끄럽지 않은 것입니다. 대개의 일반적인 세상 사람들의 양심이란 의인만 있고 악인이 없습니다. 피해자만 있고 가해자는 없습니다. 그 행동의 대상자가 없으니 어떻게 말을 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어차피 세상 사람들에게는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보여주는 양심은 그렇지 않습니다. 모두가 다 부활했을 때의 의미가 바로 양심의 의미였고 사도 바울은 바로 그런 양심에 기준해서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만약 사람끼리 있다고 해도 그 행동의 선악에 대해서 여전히 이견이 있다고 해 보십시오. 그럴 때 그 행동과 선택에 대해서 누가 옳고 그름을 결정할 수 있겠습니까? 그럴 때 바로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의 다스리심과 심판을 받아들이고 그 심판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기를 원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양심입니다. 하나님을 부정하고 온전한 정의의 개념을 하나님께 두지 않으려고 한다면 그것은 양심에 화인 맞은 사람이 되지만 하나님의 심판과 그 처분을 따르려고 한다면 그럴 때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쓴다고 했던 것입니다. 14절을 보십시오. “[행]24:14 그러나 이것을 당신께 고백하리이다 나는 그들이 이단이라 하는 도를 따라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것을 다 믿으며” 하나님의 도가 있고 하나님의 율법이 있으며 하나님의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그것을 다 믿을 때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다스리심과 심판과 뜻을 따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담대히 그 모든 것을 따른다고 했던 것입니다. 사람에 대해서는 부활을 생각하며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바랬고 하나님에 대해서는 심판을 생각하며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바랬을 때 그 양심은 가장 성경적인 양심이며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주시는 지혜가 됩니다. 사도 바울이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벨릭스 총독 앞에 섰을 때 유대인들의 모든 송사는 무의미한 것이 되었습니다. 또한 그는 단순히 총독의 재판만 받은 것이 아니라 가이사의 재판도 신청했고 그 재판에서도 무죄가 되었습니다. 애초에 유대인들이 바울을 고소한 이유는 유대인들에게 어떤 위해를 가해서가 아니라 바울의 사역 자체를 시기하고 질투하며 증오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서기 58년에서 60년까지의 가택연금 이후에 가이사의 재판에서 고소자인 유대인들이 나타나지 않으면서 바울의 신실함이 증명될 수 있었습니다. 그로 인해 바울은 풀려날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이후 네로의 기독교에 대한 박해와 증오심 때문에 사도 바울은 서기 64년 경에 다시 투옥되었고 그때의 재판도 역시 정말 죄가 있어서가 아니라 기독교 지도자들을 죽이고 기독교를 박해하려는 네로의 악함 때문에 사형을 당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에게 양심에 있어서 거리끼는 일을 했던 것이 아니라 네로의 사악함으로 인해서 피해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네로황제는 성경적인 양심만이 아니라 일반적인 양심도 없어서 잔인한 악인이 되었습니다. 나중에 네로황제는 서기68년경에 원로원으로부터 폐위와 사형을 선고받았고 스스로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양심을 알게 하십니다. 그 양심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며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알게 하십니다. 그 양심을 우리도 마음에 새기면서 이 세상에서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지혜가 우리 삶 속에 풍성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