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금요] 60벧전 2; 11-12 영혼을 거스리는 육체를 제어하라_5Loading the player...
60벧전 2; 11-12 영혼을 거스리는 육체를 제어하라_5
2025. 10. 3. 금. 금요기도회.
찬양: [268장] 죄에서 자유를 얻게 함은 [350장] 우리들이 싸울것은 [428장] 내 영혼에 햇빛 비치니 [412장] 내 영혼의 그윽히 깊은데서
개요: 네비게이토 E6, 그리스도의 온전한 생활 [벧전]2:11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벧전]2:12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모습은 그리스도의 말씀에 따라서 그분의 뜻을 삶 속에 실현하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어떤 원칙과 이론을 설명하는 성경구절만 묵상하면서 그것을 삶 속에서 언급하고 암송하며 가르치는 삶을 살라고 하셨다면 우리는 그것이 최대의 덕목으로 여기면서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성경구절을 통해서 변화된 삶의 모습을 나타내면서 살라고 가르쳐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삶의 모습을 어떻게 하라고 하는 말씀을 사변적으로 이해하고 활용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을 실천하면서 그 실천을 통한 결실을 누리면서 살아야 합니다. 운동교재가 있다고 해 보십시오. 그것을 설명하고 가르칠 때 그 교재는 실제 운동을 할 수 있도록 가르쳐야만 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운동 자체는 하지 않고 단지 가르치기만 한다면 그 내용은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그렇습니다. 그 말씀 자체를 언급하고 인용하고 가까이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말씀 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의 삶이 예수님의 뜻을 나타내면서 그리스도를 닮은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그런 의미를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11, 12절을 함께 읽습니다. “[벧전]2:11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이 말씀은 바로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거류민이나 나그네와 같은 자들인데 왜냐하면 본질은 하나님의 자녀요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는 안식을 얻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진정한 안식과 본향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그 날을 사모하며 기다리고 있는 자들인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영혼을 거슬러서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영혼이 온전해지며 더욱 성장하고 발전될 수 있습니다. 육체의 정욕은 그러한 영혼의 성장과 성숙을 막고 방해하며 억제합니다. 육체를 제어할 때 비로소 영혼의 풍성한 성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여기서 육체를 제어한다는 것이 육체를 고통스럽게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육체가 영혼의 발전을 저해하지 않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만약 육체에만 신경을 쓰면서 온갖 고행과 자해나 어떤 육체적인 목적을 이루려고 한다면 그것은 영혼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 됩니다. 오직 영혼의 성장과 발전에 거스르고 싸우고 부정할 때 육체를 이겨내며 제어하는 노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또한 이 말은 영혼과 육체를 분리해서 영혼만 신경을 쓰고 육체는 등한시하는 것도 아닙니다. 영혼을 거슬러서 싸우는 것은 육체가 아니라 육체의 정욕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전부 마음 속에서 이루어지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신체에 대해서 무엇을 어떻게 하라는 뜻이 아니라 신체의 기능에 집착하게 하는 정욕을 따르지 말고 오직 영혼을 활용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거룩함에 대한 목표를 이루도록 노력하라는 뜻입니다. 삼손은 그 누구보다도 육체가 강한 사람이었지만 들릴라의 꾐에 빠졌을 때 자신의 힘이 비밀이자 하나님 앞에서 지켜야하는 나실인의 약속을 어겼습니다. 그건 어쩔 수 없고 들릴라의 계략은 도저히 이겨낼 수 없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지만 그렇게 육체의 정욕을 따르면서 자신의 나실인의 비밀을 실토한 후 겪어야 했던 고통과 괴로움을 미리 알았다면 절대로 그 비밀을 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차라리 들릴라를 포기하더라도 말입니다. 영혼을 거스리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해야 하는 이유는 영혼의 구원을 위함입니다. 영혼의 구원을 얻지 못한다면 어차피 썩을 육체를 위한 노력은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점차 육체는 약화되어가지만 영혼은 더욱 성화되어갑니다. 그 영혼을 위한 노력을 기울일 때 우리는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숭고한 영혼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을 통해 예수님의 뜻이 이루어집니다. 12절을 보십시오. “[벧전]2:12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이방인 가운데서 그리스도인들이 행실을 선하게 한다면 세상 사람들의 비방을 이기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선함을 보신 후에 이 땅에 오셨을 때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온전한 모습을 세상 사람들이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렇게 그리스도인들을 온전하게 하신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우리는 바로 그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제 이러한 숭고한 목표를 가지고 있을 때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더욱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일입니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의 경건이나 덕행으로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육체의 죄성과 정욕을 막을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 피하는 것뿐입니다. 그럴 때 육체의 영향은 사라지고 영혼의 순수함은 충만해 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셨을 때 그 유혹을 이기신 방법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과 연결되면서 시험을 통과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설사 무엇인가를 하더라도 그것이 의미 있게 되려면 반드시 그리스도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어떤 때에라도 항상 자신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의지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 자체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셨을 때 제자들의 모습은 안타까웠습니다. 그들은 제대로 한 것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모습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묵상하며 찬양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주님의 증인이 되어서 하나님의 일을 행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잘 나서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만난 하나님이 영광스러우시기 때문에 그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이 있을 때 우리의 신앙이 더욱 풍성한 의미를 가지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특별한 것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영혼을 반대하는 육체의 적용을 극복하면서 하나님께 더욱 나아가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