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주일] 48갈 4; 15-20 어떻게 율법에서 복음으로 돌아올 수 있는가_1Loading the player...
48갈 4; 15-20 어떻게 율법에서 복음으로 돌아올 수 있는가_1
2025. 9. 28. 주. 주일오전.
찬양: 19장 찬송하는 소리있어, [505장] 온 세상 위하여 [501장] 너 시온아 이 소식 전파하라 [507장] 저 북방 얼음 산과
개요: 참된 복음의 본질을 따르는 삶, #53희생 [갈]4:15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언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라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에게 주었으리라 [갈]4:16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 [갈]4:17 그들이 너희에게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은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시켜 너희로 그들에게 대하여 열심을 내게 하려 함이라 [갈]4:18 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으로 사모함을 받음은 내가 너희를 대하였을 때뿐 아니라 언제든지 좋으니라 [갈]4:19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갈]4:20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언성을 높이려 함은 너희에 대하여 의혹이 있음이라
갈라디아서를 통해서 우리는 율법의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복음의 본질을 붙들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복음의 본질은 갈라디아서 3:6에 나오는 대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고 그것을 의로 여겨 주신 것처럼 행위는 아무 것도 없어도 믿음으로 나갈 때 받아주신다는 것입니다. 또한 3:28에 나오는 대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인 것처럼 주님께 나아갈 때는 제한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복음의 의미는 우리의 모든 삶 속에 다 적용되는 원리입니다. 우리의 가정과 교회와 사회 속에서 우리는 율법적인 삶을 살지 말고 복음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 신앙이 생활 속에 나타날 수 있습니다. 다양한 삶의 모습 속에서 어떻게 신앙을 나타낼 수 있는가를 고민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걸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율법적이지 말고 복음적으로 살면 됩니다. 그러면 아주 신실한 일상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마음과 생각 속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됩니다. 우리가 마음 속에서 율법적으로 사고하기 시작하면 우리의 생활도 율법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자연히 율법이 주는 모든 기준과 범죄와 처벌 속에서 우리의 삶은 언제나 고통스러운 삶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사망과 심판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나 복음적으로 사고하기 시작하면 우리의 생활도 복음적인 삶이 이루어지면서 그 속에서 얻는 기쁨과 감사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용서와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 만을 의지할 때 더욱 풍성해지게 됩니다.
이렇게 율법에서 복음으로 변화되어가는 것이 좋은 것이고 신앙적으로 필수적이라는 것은 분명하지만 문제는 어떻게 복음적으로 변화될 수 있는가 입니다. 복음을 온전히 이해하고 따를 때에만 복음으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복음을 강조하기는 하지만 생활은 여전히 율법적으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율법으로 사는 것은 괴롭기는 하지만 이해하기는 편합니다. 반면 복음으로 사는 것은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화평이 넘칩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복음의 핵심을 이해하고 복음의 방향을 이해한 다음에 복음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 말씀은 갈라디아 교회들이 복음적인 삶에서 율법적인 삶으로 변질되지 말고 다시 복음적인 삶으로 돌아오도록 권면하고 있습니다. 15절을 보십시오. “[갈]4:15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언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라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에게 주었으리라 [갈]4:16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 갈라디아 교회는 과거에 복음을 따라 살면서 복음적인 삶을 살았기 때문에 마음도 평안하고 기뻤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눈이라도 빼어 바울에게 줄 정도로 열정과 감격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율법을 따르라는 거짓 교사들의 선동으로 인해서 이제는 다시 복음으로 돌아오라는 사도 바울의 말에 저항하면서 원수가 될 지경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친구가 원수로 변하는 것이 복음에서 율법으로 변질된 삶의 결과입니다. 복음 안에서 살때의 모습과 율법 속에서 살 때의 모습과 다릅니다. 복음 안에 있을 때에는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었고 하나님의 종도 사랑하며 섬기는 삶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눈이라도 빼어주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거짓교사들에 의해서 율법을 따라 살아갔을 때에는 복음을 따르는 삶에 대한 커다란 반감과 거부와 부정의 마음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에 결국은 육체를 따르는 삶이 되었고 원수와 같은 관계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를 핸드폰의 발전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최신 핸드폰이 나왔을 때 그것은 그 당대 최신의 기술로 만든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최신 핸드폰도 시간이 흘러 더 좋은 핸드폰이 나오고 나면 구식 핸드폰이 되어 버립니다. 그럴 때 최신 핸드폰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구식 핸드폰을 애써서 고집한다면 그것은 결국 과거로 회귀하는 의식이 되고 최신의 상태에 대한 거부감이 되는 것입니다. 복음이 오기 전 율법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유일한 길이었습니다. 그래서 율법이 없던 삶에서 율법이 있는 삶으로 발전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율법 속에서 감사하면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기쁨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복음이 오고 난 다음에도 율법을 주장한다면 그것은 복음에 대한 싫음과 거부감이 더 큰 것이기 때문에 그 속에 하나님께 대한 순종이 없게 됩니다. 그래서 그런 마음으로 인해 생활도 퇴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일이 왜 일어나는지를 다음 구절이 잘 보여줍니다. 17절입니다. “[갈]4:17 그들이 너희에게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은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시켜 너희로 그들에게 대하여 열심을 내게 하려 함이라 [갈]4:18 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으로 사모함을 받음은 내가 너희를 대하였을 때뿐 아니라 언제든지 좋으니라” 그들이란 거짓된 성경교사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열심은 좋은 뜻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로 인도하려는 성경교사들이 아니라 성도들을 기존의 사역자들과 이간질시켜서 그들 자신을 따르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좋은 일에 대해서 열심을 가지고 사모하는 것은 언제든 좋지만 나쁜 일에 대해서 열심을 내는 것은 악한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뜻을 따르게 하는 율법의 거짓된 교훈을 받아들일 때 갈라디아 교회들은 선한 일과 악한 일의 경계선에 있었습니다.
이렇게 선으로 가는 길과 악을 가는 길이 분명할 때 어떻게 좋은 뜻과 좋은 일로 다시 열심을 내어 사모하며 나아갈 수 있을까요? 그 방법은 바로 복음의 본질을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무조건 복음을 따르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의 방법을 따를 때 복음의 수준이 이루어지면서 복음적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직 이러한 복음의 방법 만이 복음의 기쁨과 감사와 은혜를 다시 누릴 수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보여주는 그 방법이 19절에서 나타납니다. “[갈]4:19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갈]4:20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언성을 높이려 함은 너희에 대하여 의혹이 있음이라” 복음은 단지 복음을 생각하는 것만으로 복음의 기쁨과 감사를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복음의 본질은 단순히 복음의 지식과 내용을 묵상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복음의 본질은 바로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하는 것이었고 그렇게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은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 위해 성도들을 위한 해산의 수고를 아끼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언성을 높이는 것은 영어로 changing tone 인데 그렇게 소리를 높이면서 간절히 그들이 율법으로부터 돌아오기를 바랄 때 율법적인 삶이 아닌 복음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복음적인 방법은 마치 뛰는 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 교회들이 원래 복음 안에 있다가 율법적인 삶으로 변질되었을 때 그 모습은 도망가거나 혹은 물러가는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기존의 의식에 대한 거부나 대항이 생겼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율법적인 생각이 어리석은 것임을 알게 되었다면 다시 복음으로 돌아오는 의식은 예수님 안에서 다시 뛰려는 마음입니다. 그렇게 뛰는 모습이 바로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 위해 해산의 수고를 아끼지 않으며 하나님을 의지하여 소리를 높여 부르면서 선한 것을 가르치려는 복음적인 삶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이런 모습이 바로 복음으로 돌아오게 하는 방법이었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을 구조해 내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물에 빠진 사람을 앞에 두고 편안하게 느긋하게 구조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속하고 정확하게 물에 뛰어 들어서 허우적대는 사람에게 다가가서 힘차게 그를 물 밖으로 이끌어 냅니다. 그럴 때 구조과정이 안전할 수 있습니다. 물 속에 들어가기는 했지만 같이 물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면 오히려 더 큰 피해가 생길 뿐입니다. 복음의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절박한 마음으로 성도를 붙들려고 할 때 그것이 바로 복음의 본질이었습니다. 그것이 모든 율법적인 사고를 벗어나서 복음적인 사고로 돌아오는 모습이며 원래 복음적인 사고방식을 다시 굳건히 하는 모습입니다. 이와 같은 복음의 가장 최고의 핵심적인 본질은 예수님의 모습 속에서 나타납니다. 요한복음 19장에서 예수님은 복음을 이루시기 위해서 모든 것을 다 쏟아 부으셨습니다. “[요]19: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온 힘을 다해서 신 포도주까지 받으시고 나서 ‘다 이루었다’ 하셨습니다. 그렇게 신 포도주까지 받으시는 것이 예수님께서 하셔야 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모든 힘을 다 끌어내어 그것까지 이루시고 영혼이 떠나신 것입니다. 그 정신이 바로 복음 속에 있습니다. ‘하면 좋고 안 하면 말고’식의 느긋한 마음이 복음의 정신이 아닙니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식의 우유부단한 마음이 복음의 본질이 아닙니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를 바라고 그것을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으려는 희생과 헌신이 복음의 본질이었습니다. 그걸 따를 때 우리도 복음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과 진실을 본받게 됩니다.
지금도 우리의 복음적인 삶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율법적인 삶이 아닌 복음적인 삶을 살아가려고 할 때 하나님은 도와 주시며 예수님은 힘을 주시고 성령님은 함께 하십니다. 그로 인해 풍성한 삶을 살게 됩니다. 그 복음의 소망과 열심을 다시 마음에 품으면서 갈라디아서를 힘입어 더욱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는 신앙생활을 누려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의 신앙은 더욱 성장하며 우리의 삶은 더욱 풍성해 질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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