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주일] 2출 4; 13-17 모세를 복음으로 부르시는 하나님_1Loading the player...
2출 4; 13-17 모세를 복음으로 부르시는 하나님_1
2025. 10. 5. 주. 주일오전.
찬양: 20. 큰 영광 중에 계신 주, [569장] 선한 목자 되신 우리 주 [384장] 나의 갈길 다 가도록, [401장] 주의 곁에 있을때 개요: 하나님이 이루시는 구원, #55동행 [출]4:12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 [출]4:13 모세가 이르되 오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 [출]4:14 여호와께서 모세를 향하여 노하여 이르시되 레위 사람 네 형 아론이 있지 아니하냐 그가 말 잘 하는 것을 내가 아노라 그가 너를 만나러 나오나니 그가 너를 볼 때에 그의 마음에 기쁨이 있을 것이라 [출]4:15 너는 그에게 말하고 그의 입에 할 말을 주라 내가 네 입과 그의 입에 함께 있어서 너희들이 행할 일을 가르치리라 [출]4:16 그가 너를 대신하여 백성에게 말할 것이니 그는 네 입을 대신할 것이요 너는 그에게 하나님 같이 되리라 [출]4:17 너는 이 지팡이를 손에 잡고 이것으로 이적을 행할지니라
우리가 신앙생활에서 율법적인 삶이 아니라 복음적인 삶을 살기를 원한다면 복음적인 삶을 어떻게 살 수 있는가를 생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알게 되었다면 그것을 활용하고 적용하고 실천하면서 사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럴 때 그 은혜가 빛이 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양초를 많이 가지고 있다고 해보십시오. 가지고 있기만 한다면 별로 쓸모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용하려고 한다면 따뜻한 분위기나 필요한 빛을 나타내는데 잘 쓸 것입니다. 다른 것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래 두면 먹을 수 없는 음식들도 기한 내에 사용하면 풍성하게 누릴 수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복음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도 배운 대로 활용 해야지 시간이 지나면 다 잊어버리고 쓸모 없이 버려져서 결국엔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제 구약말씀 속에서 갈라디아서에 나타났던 복음적인 삶이 어떻게 나타났는가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때에는 율법적인 삶이 나타나지도 않았던 때입니다. 그러나 그때 하나님께서는 복음적인 삶을 모세에게 허락해 주셨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출]4:12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 [출]4:13 모세가 이르되 오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불러서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보내셨습니다. 주님이 그의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시고 담대하게 하셔서 바로를 굴복하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이스라엘 민족을 인도하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모세를 부르실 때 모세에게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에게는 오직 하나님이 함께 하심만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적인 삶이었습니다. 인간에게 무엇이 있어서 일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온전한 은혜가 있어서 일을 이룰 수 있는 것이 우리 삶 속에서 나타나는 영광스러운 복음의 삶인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모세도 뭔가 있으니까 부르신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모세가 레위지파였고 바로의 딸에게 입양된 아들이었으며 애굽의 모든 교육을 받은 대단한 학식이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불러 주신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모세의 대답을 보면 그 모든 장점들이 모두 다 사라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절하였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원했던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의 모든 장점들은 사실 그 자신에게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부하기 위해서는 거추장스러운 걸림돌일 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기에 너무 적절할 것 같은 사람을 가상적으로 생각해 보십시오. 좋은 배경에 좋은 학력에 좋은 성품에 좋은 자질에 좋은 조건들이 아무리 많이 있어도 그 자신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을 거부한다면 그런 조건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런 조건들 때문에 하나님을 하지 못하기도 합니다. 어떤 사명과도 같은 특별한 사역에 대해서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복음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좋은 조건이 있다고 해서 그가 복음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한 사람이 복음의 삶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은 조건이나 배경이 아니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자기가 원하기만 한다면 복음적인 삶을 살 수 있을까요? 내가 원하는데 할 수 없는 것이 없지 않겠습니까? 모든 것은 개개인의 원함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닐까요? 또한 하나님의 부르심도 생각해 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부르시는 소명에 대해서 거부했는데 만약 다른 사람은 그것을 간절히 원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 형이 그것을 원하거나 그 동생이 그것을 원한다면 다른 가족이나 친척이 그것을 원한다면 어떨까요? 혹은 그 가족에 속해 있지 않은 전혀 다른 사람이 그 자리를 원한다면 그 자리를 맡을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 자리는 본인이 원한다고 해서 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지도자의 자리는 눈에 보이는 것뿐이었고 사실 진정한 의미는 하나님을 따라가는 것이었습니다. 모세에 대해서도 하나님께서는 그의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쳐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부르시지 않는데 본인이 원한다고 해서 그 자리를 맡을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욕심 대로 할 수는 없었습니다.
특별한 사명에의 부르심이나 말씀에 따르는 삶으로의 부르심이나 모두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이 중요하지 그 부르심을 요구하거나 혹은 그 부르심을 자처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부르심을 결코 따를 수 없을 것입니다. 모세는 처음에는 그 부르심을 거부했지만 나중에는 그 부르심에 순종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자가 되었고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원해서 된 것이 아니라 순종함으로 된 것입니다. 그렇게 되는 과정이 다음 구절에 나옵니다. “[출]4:14 여호와께서 모세를 향하여 노하여 이르시되 레위 사람 네 형 아론이 있지 아니하냐 그가 말 잘 하는 것을 내가 아노라 그가 너를 만나러 나오나니 그가 너를 볼 때에 그의 마음에 기쁨이 있을 것이라 [출]4:15 너는 그에게 말하고 그의 입에 할 말을 주라 내가 네 입과 그의 입에 함께 있어서 너희들이 행할 일을 가르치리라” 하나님께서는 모세에 대해서 노하시면서 아론이 있음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는 말을 잘 하는 자였고 그를 보냈으니 그가 너를 만날 때 기뻐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형 아론은 모세와 함께 하려는 자였고 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들일 때 그 부르심을 통해 함께 일하는 자가 될 것이었습니다. 모세는 이렇게 하나님께 형 아론까지 보내시면서 모세를 사용하고자 하심을 깨달았을 때 그 부르심을 받아들였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어떻게 변화되는가 보십시오. 모세는 아론에게 말하고 그의 입에 할 말을 주게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입과 아론의 입에 함께 있어서 그들이 행할 일을 가르치신다고 하셨습니다. 이전에는 모세에게만 함께 하신다고 했을 때 모세가 계속 거부할 때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아론에게 함께 하신다고 하셨고 그럴 때 모세는 더 이상 거부할 수 없었습니다. 모세는 자기 자신과 또한 자신과 함께 한 자들을 위한 부르심인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나라의 의미를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히브리서에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히]3:5 또한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언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종으로서 신실하였고” 그는 단순히 자기 자신만의 부르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온 집,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부르심인 것을 알아서 그 종으로 순종하여 부르심을 감당했습니다. 이와 같이 복음의 삶은 우리에게 자기 자신 만의 사고를 넘어서게 합니다. 율법적인 삶은 기준과 조건과 한계를 내걸고 그 안에서 자신의 영역을 구축하지만 복음적인 삶은 그렇지 않습니다. 자신과 타인과 더 많은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가능성을 따라가는 삶입니다. 그래서 그 어떤 기준이나 조건이나 한계도 넘어설 수 있고 하나님께서 행하는 놀라운 일에 참여할 수 있게 됩니다. 본질적인 인생의 연약함을 극복하게 되는 과정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리는 구원의 의미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나만의 의미가 아닙니다. 나와 연결된 다른 사람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이 나 위에 있든 아니면 내 밑에 있든 아니면 내 옆에 있든 전부 다른 사람과의 연결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들이게 되고 그럴 때 나의 조건이나 제한이 무의미 해집니다. 더 큰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2022년에 세상을 떠난 이어령 교수님은 생전에 자신은 무신론자였는데 마음을 바꿔서 하나님을 믿고 세례를 받았을 때의 소감을 말하면서 세례를 받은 이유에 대해서 말하기를 ‘딸의 신앙체험과 자신의 어린 시절부터 있던 슬픔과 눈물에 대한 소망을 발견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의 회심에는 자기 자신만의 생각만 있지 않았습니다. 딸에 대한 간절함이 컸고 그 간절함이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졌을 때 하나님께 마음 문을 열 수 있었습니다. 복음의 세계가 그렇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한 분 만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위해 보내주신 예수님과 그 예수님의 은혜를 증거하시는 성령님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하나님만 계시되었던 율법의 세계에서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이 온전히 계시된 복음의 세계로 들어갈 때 그곳에서 나 자신의 의미와 나를 도와주고 붙들어 주며 따르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마음을 깨닫게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부르심을 따르는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출]4:16 그가 너를 대신하여 백성에게 말할 것이니 그는 네 입을 대신할 것이요 너는 그에게 하나님 같이 되리라 [출]4:17 너는 이 지팡이를 손에 잡고 이것으로 이적을 행할지니라” 그는 하나님이 주신 지팡이를 손에 잡고 아론을 통해 백성에게 말을 하면서 하나님의 이적을 행하여 그들을 구원하게 될 것이었습니다. 이 놀라운 복음적 세계가 모세의 순종으로 시작되었고 우리가 그 세계를 따르고자 할 때 바로 우리에게도 일어납니다. 그래서 로마서에는 이러한 복음의 삶을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롬]12:6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롬]12:7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롬]12:8 혹 위로하는 자면 위로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이것이 바로 우리 각자에게 나타나는 복음의 삶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복음으로의 부르심이 우리의 신앙생활과 일상생활 속에서 나타나며 여러분 삶이 그로 인한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는 풍성한 신앙생활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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