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주일] 2출 5; 19-23 복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된다_1Loading the player... .
2출 5; 19-23 복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된다_1
2025. 10. 12. 주. 주일오전.
찬양: 22. 만유의 주 앞에, [552장] 아침 해가 돋을 때, [300장] 내 맘이 낙심되며[180장] 하나님의 나팔 소리,
개요: 복음으로 살아가는 삶의 모습, #64인내 [출]5:19 기록하는 일을 맡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너희가 매일 만드는 벽돌을 조금도 감하지 못하리라 함을 듣고 화가 몸에 미친 줄 알고 [출]5:20 그들이 바로를 떠나 나올 때에 모세와 아론이 길에 서 있는 것을 보고 [출]5:21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우리를 바로의 눈과 그의 신하의 눈에 미운 것이 되게 하고 그들의 손에 칼을 주어 우리를 죽이게 하는도다 여호와는 너희를 살피시고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출]5:22 모세가 여호와께 돌아와서 아뢰되 주여 어찌하여 이 백성이 학대를 당하게 하셨나이까 어찌하여 나를 보내셨나이까 [출]5:23 내가 바로에게 들어가서 주의 이름으로 말한 후로부터 그가 이 백성을 더 학대하며 주께서도 주의 백성을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우리는 계속해서 복음의 원리가 어떻게 삶 속에 나타나는가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이렇게 복음의 원리가 실현되는 것을 보는 것은 정말 중요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복음의 원리를 헛되이 버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원리만 계속 집중하다 보면 마치 우리가 원리에 통달한 사람처럼 생각하게 되고 그러면서 원리에 대한 유익이 다 사라지게 됩니다. 이해하고 깨달은 복음의 원리는 삶 속에서 계속 활용되고 적용될 때 비로소 피가 되고 살이 됩니다. 그러면 실제로 복음에 따라서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복음에 따르는 삶이 어떤 것인지를 성경 속에서 계속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러면 점차 복음적인 생활에 대한 이해와 깨달음이 커지면서 자신의 삶 속에서 복음에 따른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특별히 모세의 삶 속에서 복음의 생활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가 그 복음으로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부르심 속에서 그가 경험했던 하나의 고비가 있었습니다. 그 고비를 넘었을 때 비로소 복음의 생활이 펼쳐지게 되었습니다. 19,20절을 보십시오. “[출]5:19 기록하는 일을 맡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너희가 매일 만드는 벽돌을 조금도 감하지 못하리라 함을 듣고 화가 몸에 미친 줄 알고 [출]5:20 그들이 바로를 떠나 나올 때에 모세와 아론이 길에 서 있는 것을 보고” 복음의 삶의 고비는 하나님의 부르심 대로 살았지만 그 결과는 자신의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복음의 삶은 하나님의 부르심인데 그 부르심을 따라서 살아보니 자신이 예상하고 생각한 결과가 나와야 하는데 그것이 아니라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 부르심을 따라서 살아보니 자신이 생각한 대로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사실 그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통해서 자신의 목적을 이루려고 하는 것 뿐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서 아론과 함께 애굽으로 갔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의 환호를 받고 바로의 허락을 받아서 모든 것이 다 형통하게 진행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경험한 것은 바로의 거부와 그의 보복이었고 그로 인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더 많은 노역을 해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와 아론과 하나님을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출]5:21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우리를 바로의 눈과 그의 신하의 눈에 미운 것이 되게 하고 그들의 손에 칼을 주어 우리를 죽이게 하는도다 여호와는 너희를 살피시고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이스라엘 자손들의 이러한 원망은 단지 기록하는 일을 맡은 자들의 말이기만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로가 명령한 더 많은 노역은 가혹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로 인해서 이스라엘 자손들 전체가 고통을 받을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고통을 겪으면서도 원망과 불평의 말을 하지 않을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원망도 여기에 들어갔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모세와 아론을 하나님께서 다시 살피시고 판단해주시기를 바라는 것은 하나님이 실수하셨거나 뭔가를 잘못 하고 계시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표현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옳고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면 아무 말도 하지 않았거나 오히려 하나님을 의지하는 말을 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어려운 상황은 우리가 복음적으로 살려고 해도 나타납니다. 믿음을 굳게 갖고 신앙생활을 하려고 해도 개인적인 한계나 가정적인 반대나 혹은 교회 생활에서의 문제들에 부딪히게 되면 복음에 따라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온전히 기뻐하면서 살지 못하게 됩니다. 자신에게 찾아온 건강의 문제나 가정에서 부모가 반대를 하거나 형제나 자매에게 문제가 생겼거나 자녀에게 어려움이 있을 때 이런 식의 부르심을 따르기 어려운 반대가 생깁니다. 교회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 있는 어떤 문제도 신앙에 영향을 미칩니다. 분란이나 다툼이나 분위기나 혹은 시설의 문제가 이전에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었지만 그 부르심을 거부하게 만드는 요인이 됩니다. 그럴 때 안 좋은 선택은 거기서 실망하고 나오는 것입니다. 혹은 거기까지만 하고 더 이상 나아가지 않는 것입니다. 앞으로 나가는 것이 제일 힘들지 그대로 서 있거나 혹은 뒤돌아서 나오는 것은 아주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일이 복음대로 살지 못하는 삶을 보여줍니다. 다른 상황에서도 복음에 따르지 못하는 삶이 어떤 것인지를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어려움으로 인해 믿음을 포기하는 삶입니다. 어려움은 어떤 식으로든지 나타날 수 있습니다. 비난이나 비판이나 훈계나 책망으로도 어려움은 생깁니다. 그렇지만 그런 것이 있을 때마다 그만두고 중단해 버린다면 율법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에는 하나님이 주시는 부르심과는 상관없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 핵심 속에서는 내가 원하는 삶을 살려는 죄악된 이기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율법적인 삶은 세속적인 삶이나 비신앙적인 삶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그 반대로 복음의 삶을 살고자 한다면 모세가 어떻게 했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모세는 그 말을 들으면서 하나님께 나왔습니다. 그것이 진정한 복음의 삶이었습니다. 그렇게 하기가 어렵고 대개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율법적인 삶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삶은 그럴 때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이며 그러면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됩니다. 22절부터 보십시오. “[출]5:22 모세가 여호와께 돌아와서 아뢰되 주여 어찌하여 이 백성이 학대를 당하게 하셨나이까 어찌하여 나를 보내셨나이까 [출]5:23 내가 바로에게 들어가서 주의 이름으로 말한 후로부터 그가 이 백성을 더 학대하며 주께서도 주의 백성을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모세는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왜 나를 이렇게 대하시나이까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 백성이 학대를 당하게 하셨나이까라고 했습니다. 왜 나를 보내셔서 그들로 고통을 겪게 하시나이까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 대해서 나를 괴롭히고 나를 힘들게 하고 나를 슬프게 하는 하나님으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왜 그들에 대해서 빨리 학대를 풀어주지 않으시는지, 그들을 빨리 구원하여 주지 않으시는지를 묻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처음부터 하나님이 학대를 풀어 주시고 그들을 구원하여 주시는 분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생기는 의문이었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복음 안에서만 가능한 생각이었습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과 구원과 부르심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성도는 하나님께 대한 인격적인 의문과 하시는 일에 대한 관심을 갖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질문의 생각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율법에서는 그럴 수 없습니다. 율법 속에서 하나님은 엄격한 분이고 고지식한 분이고 거리가 먼 분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복음 속에서 하나님은 자상한 분이시고 유연한 분이시며 거리가 아주 가까운 분이십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영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 묻고 간구하며 부르짖을 수 있습니다. 베드로도 예수님을 아주 친밀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예수님께 대해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요]21:21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 [요]21:2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베드로의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은 대답해 주셨고 그것은 예수님을 더욱 따르게 하시는 더 큰 부르심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려움이 있고 문제가 있을 때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더욱 우리를 붙들어 주실 것입니다. 모세가 이렇게 하나님께 나아갔을 때 하나님은 역시 그를 더욱 붙들어 주셨습니다. 그것이 복음을 따르는 삶이었습니다.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하나님은 더욱 붙들어 주시고 선한 뜻을 보여주십니다. 6장 1절에 그 말씀이 나옵니다. “[출]6: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제 내가 바로에게 하는 일을 네가 보리라 강한 손으로 말미암아 바로가 그들을 보내리라 강한 손으로 말미암아 바로가 그들을 그의 땅에서 쫓아내리라” 하나님은 모세를 보내셨고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의 강한 손을 보여주실 계획이 있었습니다. 애초에 모세는 단지 말만 전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를 통해서 주님의 강한 손이 나타나게 될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바로의 반대와 더 큰 포악함의 표현은 하나님의 심판을 더 크게 나타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인간의 뜻보다 하나님의 뜻이 더 크고 아름다우며 영광스러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통해 나의 뜻을 이루려고 하면 안 되고 하나님의 뜻을 깨달으려고 해야 합니다. 어려움 속에서도 더욱 주님께 나아가려고 할 때 주님의 영광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복음의 삶은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문제 속에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복음의 삶이니 그렇게 모세처럼 주님께 나아가 주의 응답을 받고 주의 크신 능력을 경험하는 귀한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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