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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엡 4; 11-16 그에게서 온 몸이 자라난다_1
2025. 3. 16. 주. 주일오전예배. 우림교회.
*개요: #61사랑
[엡]4:11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엡]4:12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엡]4: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엡]4:14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엡]4: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엡]4:16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오늘 우리는 에베소서 4장 말씀을 함께 읽었습니다. 에베소서는 에베소 교회에 보내는 바울의 편지로서 ‘연합과 일치’를 다루고 있습니다. 교회론을 기본으로 하면서 하나님의 예정과 경륜과 그리스도의 구속과 성령의 인도하심을 통해서 교회가 세워지게 되는 원리를 설명합니다. 그래서 성령의 충만하심을 통해서 변화된 삶을 살아가는 모범적인 성도와 교회가 되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읽은 이 말씀을 우리는 거꾸로 16절부터 읽어 나갈 것입니다. 한 주에는 다 다루기가 어려워서 2주간에 걸쳐서 말씀을 볼 것입니다. 거꾸로 읽어가다 보면 마지막에는 11절에 이르게 되는데 그렇게 살펴보면 마지막이 되는 11절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걸 알기 위해서 16절부터 천천히 한 절 씩 묵상하면서 올라가려고 합니다. 16절입니다.
“[엡]4:16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여기서 ‘그에게서’는 이전 구절에서부터 이야기되고 있는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해서 도움을 받고 연결되고 결합됩니다. 그리고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해서 그 몸을 자라게 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이 세워지는 과정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라는 부분을 주목해 보십시오. 그 사랑 안에서 세워지는 그리스도의 몸이 바로 교회입니다. 각각의 성도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통해서 사랑을 통해 그리스도의 몸으로 자라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각각의 성도가 개별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교회를 통해서 그렇게 세우십니다. 교회에 속하게 하셔서 그리스도의 몸으로 자라나게 하는 것입니다. 마치 사과나무를 심을 때 사과나무밭을 만드는 것과 같습니다.
그럴 때 예수님께서는 각 성도가 마디를 통해서 도움을 받게 하셨고 연결되고 결합되게 하셨습니다. 성경원문인 헬라어 성경에서 이 마디에 해당하는 것은 ‘ἐπιχορηγία’이고 의미는 인대입니다. 실제로 인대는 뼈와 뼈를 연결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마디의 역할을 통해서 각 몸이 서로 연결되어져 있습니다. 이런 기관이 있을 때 온 몸인 뼈와 뼈가 서로 연결되고 결합됩니다. 그리고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고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워 나갈 수가 있습니다. 스스로 세운다는 것을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헬라어로 ‘οἰκοδομή’이고‘세운다, 성장한다’ 는 뜻으로 성숙해지고 발전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만약에 그게 없으면 정반대의 일이 일어납니다. 인대나 힘줄이 끊어지거나 상처를 받게 되면 각 관절과 근육은 따로 움직이게 됩니다. 결국은 각 분량대로 역사하지도 못하고 자라지도 못하며 제 역할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마디로 연결되는 것이 무척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면 왜 정상적으로 있던 마디가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게 될까요? 인대가 끊어지거나 상처를 받게 되는 이유는 노화의 경우가 있고 사고의 경우가 있습니다. 아무런 일이 없어도 나이가 들면 오래 썼기 때문에 약화되는 경우가 있고 사고가 있을 때에는 생생하더라도 순간적으로 변형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어떤 경우이든 그 다음에 필요한 것은 그걸 고치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병원에 가서 수술을 받거나 치료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수술을 해 주시거나 치료를 해 주시는 의사선생님의 역량이 나타납니다. 좋은 의사일수록 이런 류의 상처를 잘 회복 시켜주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비유에서 보여주고 있는 본질인 교회의 성도가 다시 연결되기 위해서는 누가 필요할까요? 누가 교회의 성도들이 다시 잘 연결될 수 있도록 수술해주고 치료해 줄 수 있을까요? 그분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왜냐하면 애초에 예수님이 모든 성도들을 불러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교회에서 상처를 입거나 소속이 불분명해지거나 어색하거나 불편해 할 때 그 마음을 안정시켜 주시고 교회를 통해 도움을 받도록 하십니다. 또한 그들이 잘 연결될 수 있도록 예수님은 일군들을 불러서 그들에게 소명을 깨닫게 하시고 부르심을 생각하게 하시며 하나님의 크신 뜻을 깨달아서 작은 것을 보지 않고 큰 것을 보며 현재를 보지 말고 미래를 볼 수 있게 하십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님인 것입니다. 그 예수님이 교회의 마디가 되는 교회의 사역자들을 붙드십니다. 사역자들이 마디가 되어서 뼈와 뼈를 연결하고 교회의 성장하는 일에 애를 쓰는데 그걸 이루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누가복음22장에서 예수님께 대한 충성을 자신하던 베드로는 대제사장의 뜰에 예수님의 상태를 보러 갔다가 한 여종이 베드로에게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다고 했을 때 베드로는 엉겁결에 부인했습니다. 또 다른 사람이 그에게 같은 도당이라고 할 때 역시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또 한 사람이 참으로 그와 함께 있었다고 하자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난 알지 못하겠다고 했고 그때 닭이 울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돌이켜서 베드로를 보셨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했습니다.
그랬던 베드로를 예수님은 다시 찾아오셨습니다. 요한복음21장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갈릴리 바다로 고기 잡으러 떠난 베드로와 제자들을 찾아오셨습니다.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지만 고기를 잡지 못한 그들에게 예수님은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고 하셨고 정말 제자들이 그대로 했을 때 많은 고기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주님을 알아보고 해변가로 나아왔을 때 예수님은 숯불에 생선과 떡을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드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고 그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주님이 아시나이다라고 했을 때 내 양을 치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을 세 번 반복하시면서 예수님은 이전의 세 번의 부인에 대한 죄책감을 씻어 주셨습니다.
이렇게 세 번의 부인을 세 번의 시인으로 바꿔 주시는 분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하던 도마에게 자신의 상처를 만져보고 믿으라고 하셨던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자신을 부인하고 거짓 선지자로 생각하던 사도 바울에게 빛가운데 나타나셔서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고 말씀하시고 제자 아나니아를 통해 그의 눈을 다시 뜨게 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우리가 이러한 예수님을 바라볼 때 온 몸이 자라나는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마디가 있다는 것만으로는 저절로 자라나는 것이 아닙니다. 본질적인 그리스도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어떤 프로그램이나 시스템이나 상황이나 환경이나 시설이나 조건으로 자라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건 그냥 옷이나 장신구처럼 치장용품일 뿐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통해서 자라나는 것입니다. 15절을 보십시오.
“[엡]4: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여기서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한다는 것은 원문 헬라어성경으로 보면 ‘ἀληθεύω’이고 ‘진리를 가르치다, 설명하다, 말하다’의 뜻입니다. 그걸 사랑 안에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고 한 것입니다. 자란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진실을 말하고 가르치면서 그 진실을 행하는 것을 본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럴 때 머리 되신 그리스도를 닮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완벽한 진실을 말하거나 행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말하면서 예수님에까지 자랄 수는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과정이 바로 예수님을 생각하고 그 예수님을 의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는 경험이 있었지만 그러나 자신을 용서해주시고 자신의 진실한 마음을 알아주시는 예수님 덕분에 다시 예수님을 시인할 수 있게 되었던 것처럼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발전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익숙하지 않던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행하는 일이 점차 익숙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성도를 교회에 두신 이유입니다. 교회에서 바로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교회라는 새로운 사회적 환경 속에서 여러 세대가 공존하고 다양한 의견이 섞여 있는 이 사람들 속에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생각하며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말하고 행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14절을 보십시오.
“[엡]4:14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그렇게 성장할 때 어린 아이처럼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지지 않게 됩니다.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자기 자신을 위해서 좋고 또한 함께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좋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시고 천국으로 부르신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 됩니다.
오늘 우리는 함께 교회에 모여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렇게 함께 예배를 드리게 되기까지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었음을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이 교회에 모여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이러한 시간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게 하심이 바로 그렇게 우리 각자가 그리스도의 몸으로 성장하고 발전하게 하시려는 것을 잘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이 말씀의 인도함을 통해서 예수님을 의지하면서 나아간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도와 교회로 성장하고 발전될 수 있을 것입니다.
아직 남은 말씀은 다음 번에 이어서 살펴보겠습니다. 에베소서 4장의 말씀을 통해서 교회의 의미를 깨닫고 그 가치를 온전히 이해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교회로 부르신 부르심이 얼마나 감사한지를 알게 되는 거룩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