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덕행] 44행15; 36-41 주의 교회가 어떠한지 살펴봄_1Loading the player...
44행15; 36-41 주의 교회가 어떠한지 살펴봄_1
2025. 8. 3. 주. 주일오전.
찬양: 10. 전능왕 오셔서 [329장] 주 날 불러 이르소서 [401장] 주의 곁에 있을때 [560장] 주의 발자취를 따름이
개요: 주의 교회를 견고하게 함, 75덕행 [행]15:36 며칠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고 [행]15:37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행]15:38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행]15:39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행]15:40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행]15:41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니며 교회들을 견고하게 하니라
7월 마지막 주를 보내고 새로운 8월을 맞이했습니다. 지난 주에는 ‘온전한 교회의 중요성’이라는 주제로 전교인 수련회가 있었습니다. 함께 하는 시간을 통해서 우리의 신앙과 교회됨을 다시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교회가 온전한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중요함을 살펴보았고 그럴 때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주님의 아름다운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교회가 온전해도 성도가 온전하지 않으면 자신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게 됩니다. 또한 교회가 온전하지 않아도 성도가 온전하면 그 자신의 행위대로 상급을 받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성도가 온전해지도록 돕는 환경일 뿐입니다. 그 환경 속에서 성도 각자가 온전한 교회가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럴 때 각 사람이 주님의 약속대로 상급을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은 새롭게 시작되는 8월에 우리의 목표는 각 성도의 온전하게 됨을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배우고 깨달은 것을 그냥 둘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가지고 잘 활용하고 적용해야 우리 자신의 결실과 열매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원리를 잘 보여주는 말씀이 오늘 36절입니다. “[행]15:36 며칠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고” 1차 전도여행을 끝낸 바울은 바나바에게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고 했습니다. 처음 1차 전도여행은 성령께서 시키시는 일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시작하였지만 2차 전도여행은 성령께서 하신 일에 대한 사모함을 가지고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1차 전도여행의 시작이 되는 구절을 보십시오. “[행]13:2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행]13:3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다섯 명이었습니다. 이중에 성령께서는 바나바와 바울을 따로 세우게 하시고 그들로 하여금 금식하며 기도하게 하고 안수를 받게 해서 전도여행을 시작하게 하셨습니다. 그들을 하나님의 복음의 전파를 위한 전도자로 세우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시작된 전도여행을 통해서 많은 교회들과 성도들이 세워졌습니다. AD49년에 그 여행을 마치고 나서 AD51년에 다시 전도여행을 시작했는데 그것이 바로 2차 전도여행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진행된 두 번째 전도여행은 53년까지 이어졌는데 그 결실에 대해서 41절에는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행]15:41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니며 교회들을 견고하게 하니라” 다시 말하면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했던 것은 교회들을 견고하게 하는 과정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주의 성도들이 올바로 설 때 비로소 교회는 견고하게 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견고하게 하려면 구체적으로 해야 하는 일은 바로 성도들이 어떠한지를 살펴보고 그들을 견고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두 번째 전도여행은 바로 이러한 중요성이 있었습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교회를 세워 나가는 것은 성도를 세워 나가는 것임을 다시 깨닫습니다. 성도가 온전히 서야 교회가 올바로 설 수 있습니다. 교회의 겉모습은 성도의 속모습에 따라서 결정됩니다. 성도가 온전해 질 때 교회가 온전해 질 수 있습니다. 또한 교회를 온전하게 만들고자 한다면 성도가 온전해져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바울의 2차 전도여행을 통해서 알게 되는 원리입니다. 우리도 우리 각자의 상황을 살펴보아야 하고 또한 다른 사람들의 상황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럴 때 성도를 세워 나갈 수 있고 교회를 세워 나갈 수 있습니다. 그 성도가 바로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건강과 운동과의 관계를 생각해 보십시오. 한 사람에게서도 건강을 이루기 위해서는 운동을 해야 합니다. 운동을 하면 건강을 이룰 수 있습니다. 체중조절을 위해서 해야 하는 것은 식사량을 줄이는 것입니다. 몸무게가 음식 먹는 것과 관련 있습니다. 이와 같이 교회는 성도와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배운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의 문제를 해결할 때 비로소 교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또한 교회의 문제를 해결할 때 성도의 문제도 해결할 수 있습니다. 교회를 위해 애쓰는 성도에게 그로 인한 약속도 이루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성도와 교회의 관계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러한 원리가 잘 적용된 사건이 2차 전도여행을 시작할 때 일어났습니다. 37,38절을 보십시오. “[행]15:37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행]15:38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바나바와 바울이 마가 요한을 데려가는 것에 의견 충돌을 일으켰습니다. 바나바는 마가 요한을 좀더 배려해서 이전에 실수했던 적이 있지만 다시 기회를 주자는 입장이었고 바울은 상황을 좀더 고려해서 어려울 때 견디지 못하는 사람은 함께 하기 어렵다는 입장이었습니다. 이러한 두 가지 생각은 각각 의미가 있어서 다시 기회를 주는 것도 맞고 감당하기 어려운 일에는 참여하지 않게 하는 것도 맞는 말이었습니다. 결국 이 둘은 의견차이로 인해서 두 팀으로 나뉘어지게 되었고 결국 사도 바울은 실라와 함께 전도여행을 떠났고 바나바는 마가 요한과 함께 전도여행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이후로도 바울은 3차 전도여행까지 진행했습니다. 성도의 생각과 의견이 어떠한가에 따라서 교회의 모습과 방향이 결정됩니다. 만약 성도의 생각이 기회를 다시 주는 것에 의미를 갖는다면 교회도 그런 식으로 방향이 결정될 것이고 반대로 감당하기 어려운 일은 하지 않는 일에 의미를 갖는다면 교회도 역시 그런 식으로 방향이 결정될 것입니다. 성도를 돌아보고 온전하게 할 때에도 우리가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서 보았던 것처럼 각자의 형편과 상황과 문제의 모습이 각각 달랐습니다. 그래서 그런 상황에 맞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고자 한다면 모든 교회를 소아시아 일곱교회처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내용을 바탕으로 해서 감당할 만한 일을 감당하게 하는 것으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바로 그럴 때 하나님께 대한 의지함이 생겨납니다. 그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행]15:39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행]15:40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각자의 방향이 달랐는데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1차 전도여행에서 첫 번째로 갔던 구브로로 갔습니다. 아마 1차 전도여행을 재현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바울은 실라를 택한 다음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서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갔는데 여기는 1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던 길이었고 그 길을 다시 역행해서 올라가는 방향으로 여행을 시작했습니다. 만약 뜻이 안 맞아서 전도여행을 아예 포기했거나 혹은 뜻이 안 맞아서 이전에 했던 교회를 돌보는 것이 아닌 새로운 스트레스 해소여행을 했었다면 그것은 성도를 세우려는 것도 아니었고 교회를 세우려는 것은 더더욱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 우리가 성도를 세우거나 교회를 세울 때 해야 하는 일은 주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언제든 낙심하지 않고 주님의 일을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잘 해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보았던 일곱 교회에 대한 마지막 말씀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계]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계]3: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성도를 세우고 교회를 세울 때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주님의 음성을 듣고 문을 여는 것입니다. 그럴 때 주님이 들어오십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이기는 것이고 그렇게 이길 때 주님의 보좌에 함께 앉게 해주십니다. 주님도 하나님 아버지를 의지해서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문을 열어야 열리는 것이지 문이 저절로 열리는 것이 아닙니다. 저절로 열리기를 기다리지 말고 문을 열려고 노력을 해서 열리는 대로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그럴 때 주의 교회를 살피셨던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 각자를 세우시며 우리 교회를 세워 주실 것입니다.
주님의 성도를 돌아보시고 주의 교회를 살펴보고자 했던 사도들을 본받아 더욱 주님의 일에 동참하는 귀한 성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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