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덕행] 66계 2; 18-3; 8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의 모습_6Loading the player...
66계 2; 18-3; 8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의 모습_6
2025. 7. 28. 월. 수련회 둘째 날 저녁예배.
찬양: 찬양팀
개요: 51계획,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뜻 #2 [계]2:18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시되 [계]2:19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계]2:20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계]2:21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자기의 음행을 회개하고자 하지 아니하는도다 [계]3:1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계]3:7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가 이르시되 [계]3:8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
지난 번에 보았던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세 교회의 모습은 지리적으로 해안가에 인근에 위치한 교회들의 다양한 모습이었습니다. 해안가에 위치하다 보니 항구도시로서 발전되고 부요한 도시들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 속에 있으면서 어려움도 많고 유혹도 많았던 것이 특징이었습니다. 교회가 도시 안에서 발전할 수도 있고 상대적으로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세 교회는 내륙 쪽의 세 교회입니다. 하지만 내륙 쪽이라도 여전히 다양한 문제들을 안고 있었습니다.
그 중 네 번째로 보는 교회는 두아디라 교회입니다. 이 교회에 대한 주님의 평가는 18,19절에 나타납니다. “[계]2:18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시되 [계]2:19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그들의 신앙적인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주님은 아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아서 계속 발전되고 있었다고 하셨습니다. 교회가 위치와 환경에 따라서 이렇게 발전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알고 계시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신 귀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문제가 있었는데 그것은 주의 종들이 행음하게 하고 음행을 회개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계]2:20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계]2:21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자기의 음행을 회개하고자 하지 아니하는도다” 자칭 선지자 이세벨을 용납하니 그가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했습니다. 그들이 귀한 신앙적 행위를 발전시켜 나가서 많은 행위를 할 수 있게 된 것은 놀라운 일이었지만 그와 함께 자칭 선지자를 용납하여 음행하게 하고 그런 음행을 회개하지 않는다는 것은 큰 문제였던 것입니다. 발전을 이루기는 했지만 그로 인해서 세속적인 욕심에 쌓이게 되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건 열왕기상 21장에 나오는 아합의 아내인 이세벨이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으려고 거짓 증인을 내세워 그를 죽이는 것처럼 욕심으로 인해 죄를 짓는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나 큰 문제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걸 회개하도록 하십니다. 그걸 회개하고 끊을 때 이전의 발전도 의미가 있게 됩니다. 두아디라 교회 중에는 음행에 빠지지 않고 잘하고 있는 자들도 있었는데 그들은 변하지 말고 있는 것을 굳게 잡아야 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주님은 그들을 환난 가운데 던지시고 각 사람의 행위 대로 갚으신다고 했습니다. 발전을 통해 음행을 극복할 때 비로소 하나님의 칭찬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은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시고 철장으로 그들을 다스리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철장은 강한 권세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새벽 별을 그들에게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음행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다스림도 무의미해지지만 그것을 극복한다면 잘 다스리는 자가 됩니다. 주님을 따라 지혜로운 인도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역으로 생각해 보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권세를 따른 다스리는 자를 찾으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주의 뜻대로 다스리는 자를 만드시기 위해서 두아디라 교회를 선택하시고 그들이 모든 음행 속에서 회개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회개하는 자들과 끝까지 잘 지키는 자들이 주님이 원하신 잘 다스리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주의 방법을 따르는 것이 이래서 중요합니다. 그래야만 주님이 원하시는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섯 번째 교회인 사데 교회는 행위 면에서 살았다는 이름은 가졌지만 죽은 교회였습니다. 3장 1절입니다. “[계]3:1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그것이 그 교회에 대한 평가였는데 동시에 문제이기도 했습니다. 행위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이 아이러니한 모습입니다. 두아디라 교회는 발전은 되었지만 음행이 있었고 사데 교회는 음행은 없었지만 발전도 없었습니다. 어느 한 쪽이 되라는 것이 아니라 그 속의 문제를 극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님의 뜻을 따라야 했습니다. 그럴 때 진정한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이를 해결하는 주님의 방법은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는 것이었고 과거의 은혜를 생각해서 지켜 회개하는 것이었습니다. “[계]3:2 너는 일깨어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계]3:3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 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도둑 같이 불시에 이를 것이고 그날이 바로 그들의 심판날이 될 것이었습니다. 문제마다 방법이 달랐고 행위가 없는 사데 교회에 대한 주님의 방법은 해야 할 행위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문제를 해결할 때 주님의 약속은 분명했습니다. 그들이 흰 옷을 입고 주님과 함께 다니며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고 천사들 앞에서 시인될 것이었습니다. 주님 뜻에 따르는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이렇게 문제 속에서 주님 뜻을 따를 때 온전해 집니다. 두아디라 교회나 사데 교회나 주님이 찾으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세우시기 위해 필수적인 상황과 환경이 있습니다. 그러니 그걸 피하려고 하지 말고 그 속에서 주님의 뜻에 순종하려고 할 때 주님이 원하시는 사람들이 되고 교회생활이 의미가 있게 됩니다.
여섯 번째 교회는 빌라델비아 교회입니다. 어쩌면 많은 교회가 이런 교회에 해당할지 모릅니다. 빌라델비아 교회에 대한 평가는 3장 7,8절에 나옵니다. “[계]3:7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가 이르시되 [계]3:8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 주님은 그 교회 앞에 열린 문을 두었고 능히 닫을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바로 구원의 열린 문을 두셨다는 의미입니다. 그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그 행위 속에서 그들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주의 말을 지키며 주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칭찬만 있는 것인데 문제는 무엇이 될까요? 문제는 능력이 작다는 것이었습니다. 구원에만 이르는 것이었지 많은 일을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에게 적은 능력만 주어진 것도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모두가 많은 능력을 갖게 하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그 적은 능력 속에서 해야 할 일은 분명했습니다. 자신의 면류관을 지키는 것입니다. 어려움이 오겠지만 그 속에서 주님은 그들을 사랑하는 것을 알게 하시고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기는 자에게는 성전의 기둥이 되게 하시고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주의 새 이름을 기록해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계]3:12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능력이 작다면 작은 대로 주님을 붙들 때에 버티는 기둥이 되는 것이고 그 인내와 성실 속에 주의 이름을 기록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와 같이 주의 아름다운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가 주의 교회가 되는 것이 주님의 교회가 되는 것이 의미가 있습니다. 또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주님의 교회로서 분명한 의미를 갖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받을 새 이름을 사모하며 빌라델비아 교회와 같이 든든한 기둥이 되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또한 우리 교회가 그런 하나님 나라의 기둥이 되기로 사모해야 하겠습니다. 능력은 적었지만 그렇다고 면류관이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더욱 귀한 면류관이 적은 능력 속에서 넘쳐날 것입니다. 그렇게 든든한 자들을 찾기 원하셔서 주님은 빌라델비아 교회 속에서 훈련받게 하셨습니다. 능력을 의지하지 않고 주님을 의지할 때 비로소 작은 것에 충성한 자가 큰 것을 맡는다는 말씀을 성취하게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 모두에게는 각자 받은 부르심이 있습니다. 그 부르심이 바로 섬기는 교회요 감당해야 하는 십자가입니다. 그 책임과 소명을 잘 감당해서 하나님 나라의 한 기둥을 감당하고 주님의 나라의 일원이 되는 귀한 성도와 교회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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