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주일] 41막15; 11-15 세상의 악함을 막기 위한 결정_1
41막15; 11-15 세상의 악함을 막기 위한 결정_1
2026. 3. 8. 주. 주일오전.
찬양: 46. 이 날은 주님 정하신, [319장] 말씀으로 이 세상을 [342장] 너 시험을 당해, [516장] 옳은 길 따르라 의의길을
개요: 예수님의 대속하심을 따라가는 성도들의 모습, 64인내 [막]15:11 그러나 대제사장들이 무리를 충동하여 도리어 바라바를 놓아 달라 하게 하니 [막]15:12 빌라도가 또 대답하여 이르되 그러면 너희가 유대인의 왕이라 하는 이를 내가 어떻게 하랴 [막]15:13 그들이 다시 소리 지르되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막]15:14 빌라도가 이르되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하니 더욱 소리 지르되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막]15:15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는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삶 속에서 우리는 많은 선택을 합니다. 어떤 선택은 작은 선택이고 어떤 선택은 큰 선택입니다.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 고민될 때가 있습니다. 그 선택은 개개인이 하는 것이 그 선택은 각자가 책임을 집니다. 내가 한 선택을 다른 사람이 자동으로 책임지는 경우는 없습니다. 내가 한 선택이 다른 사람의 선택으로 이어질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그 선택에서 내가 잘못된 결정을 했다고 해보십시오. 그러면 다른 사람은 내가 한 잘못에 대해서 어떻게 대응을 할 것인가를 선택할 것입니다. 외면할 수도 있고 개입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의 의지적인 선택의 문제입니다. 역시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사람이 행한 실수나 사고에 대해서 나도 외면할 수도 있고 개입할 수도 있습니다. 그 선택은 바로 나의 존재를 보여줍니다. 우리가 현실적으로 이러한 선택상황에 있다는 것을 기억해보면 마가복음 15장에서 빌라도가 경험해야 했던 선택의 문제가 무엇인가를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빌라도는 대제사장들과 예루살렘 백성들이 선택한 악행에 대해서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막]15:11 그러나 대제사장들이 무리를 충동하여 도리어 바라바를 놓아 달라 하게 하니 [막]15:12 빌라도가 또 대답하여 이르되 그러면 너희가 유대인의 왕이라 하는 이를 내가 어떻게 하랴 [막]15:13 그들이 다시 소리 지르되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대제사장들은 예루살렘 백성들 무리를 충동하여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사형시켜달라고 압박을 가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자신들을 비난하고 자신들의 통제에 따르지 않았을 때 예수님을 죽여야 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요한복음 11장에는 그들이 처음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정한 장면이 나옵니다. “[요]11:47 이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 이르되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 [요]11:48 만일 그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그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하니.... [요]11:53 이 날부터는 그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 그들은 여러 가지를 고민했고 그 모든 일들이 다 번거롭고 불편했던 그들은 차라리 예수님을 죽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고 그 다음부터 예수님을 죽일 계획을 세웠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를 살려 주셨고 여러 기적을 통해서 자신이 진정한 메시야, 그리스도이심을 보여주었지만 그 모든 예수님의 기적과 증거를 다 경험하고 체험한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들 자신의 통제력을 상실하게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예수님을 죽이는 선택을 했던 것은 그들의 본질과 악함을 잘 보여주는 구체적인 행동이었습니다. 빌라도는 이러한 악인들의 사악한 행동 앞에서 판단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그럴 때 그가 했어야 하는 행동은 선하고 의롭게 결정을 내리는 일이었습니다. 악에 굴복하지 말고 선을 포기하지도 않아야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자기 자신의 존재와 본질 속에서 나타낼 수 있는 마음의 표현이었던 것입니다.
인간의 선택에는 그런 의미가 있습니다. 결과를 알고 결정을 하면 가장 좋은 것을 선택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애초에 선택을 하는 이유는 그 속에서 자신의 존재와 본질이 나타나기 때문에 무조건 좋은 결과만을 선택할 수 없습니다. 과정이 올바를 때 결과와 상관없이 좋은 선택을 할 수 있고 그것이 나중에 결과로 볼 때 가치 있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과에만 집착하면 과정의 의미를 알지 못합니다. 과정을 잘 만든다면 좋은 결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빌라도도 비로 그가 상대해야 하는 사람들이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의 악함이었지만 그 자신이 올바로 서 있다면 사람들의 악함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자신도 악했을 때 그는 선한 선택을 할 수 없었습니다. 빌라도의 문제는 그 자신도 무리에게 만족을 주려는 마음으로 악하여 졌다는 것입니다. 14절을 보십시오. “[막]15:14 빌라도가 이르되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하니 더욱 소리 지르되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막]15:15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는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비록 그는 바라바를 십자가형에 처하고 예수님은 살려주고 싶었지만 무리는 그것을 반대했습니다. 그래서 거세게 저항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군중소요까지 일어날 기세였습니다. 그럴 때 그는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그냥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주었습니다. 그리고 대야의 물을 받아 손을 씻으며 자신은 이 일과 무관하다고 선언했습니다. 사실 이 일에 가장 관계 있는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럴 때 그는 세상의 악함을 막지 못하고 그 악함에 따라서 함께 악화되어 가는 사람이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런 스스로 손을 씻는 행위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기억하고 세상의 악함을 막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만 잘하면 된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건 또 다른 모습의 세상의 악함이 되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악함이란 결국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무리에게 만족이 되기를 바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주었고 대제사장은 자신의 원함을 이루기 위해서 예수님을 죽이기로 모의했습니다. 이것을 기억한다면 우리가 의식해야 하는 것은 세상의 악함을 막기 위한 나의 선택, 나의 결정이 잘 이루어지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잘 기억하는 것입니다. 결과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과정에 집중해야 합니다. 과정으로서 평소에 어떤 사고와 생각을 할 때 세상의 악함에 동조하거나 협력하지 않을 수 있고 필요한 모습과 의지가 있을 때 그 악함을 막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과정의 의미를 생각하기 위해서 빌라도의 모습을 자세히 보십시오. 그가 예수님을 십자가형에 처하게 하는 결과가 나오기까지 과정 속에서 그가 추구했던 것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그는 죄악에 연루되었습니다. 또한 그는 자신의 책임을 거부하고 피하려고 했습니다. 그럴 때 그는 더욱 죄를 짓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죽이려는 과정이 의롭지 않았고 올바르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심지어 대제사장들이 시기로 예수님을 사형에 처해달라고 하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막]15:10 이는 그가 대제사장들이 시기로 예수를 넘겨 준 줄 앎이러라” 그러나 시기로 의인을 죽이는 악한 일을 막고자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그것이 잘못이라는 것을 알면서 무리가 소요를 일으키고 소란이 일어날 수도 있는 상황이 되었을 때 잘못에 타협하고 말았습니다. 결국 그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예수님을 사형에 처하게 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잘 기억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세상의 악함을 막기 위한 노력이 있을 때에 세상의 악함을 막을 수 있는 결정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런 노력이나 과정이나 원함이 없다면 결코 세상의 악함을 막을 수 있는 결정을 내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더 거세고 강하게 세상의 악함은 영향력을 행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이겨낼 힘은 오직 세상의 악함을 막으려는 노력과 바램이 있을 때 가능합니다. 그것이 있다면 우리는 진정으로 세상의 악함을 막으실 수 있는 예수님을 의지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예수님은 어떤 선택을 하신 것일까요? 빌라도는 자신이 결정해서 예수님을 사형에 처한다고 생각했지만 예수님도 예수님 나름 대로 선택을 하셨습니다. 이미 예수님은 이미 사형에 처해지는 것을 스스로 결정하셨고 그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내려오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죄인들을 구원하러 이 세상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막]14:42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그래서 예수님은 빌라도가 사형선고를 내릴 때 그 선고를 받아들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자리에서 박차고 나오실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인해서 대신 바라바가 풀려나는 것처럼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모든 인간들의 죄문제가 사라질 수 있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대속하심을 믿는 자들이 그 죄사함과 구원의 혜택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예수님께서 세상의 악함을 막으셨음을 기억하고 그 예수님께 의지해야 합니다. 그럴 때 예수님은 그 유혹과 핍박을 이길 힘을 주실 것입니다. 베드로도 예수님을 지킨다고 칼을 빼서 휘둘렀을 때 예수님은 그러한 베드로가 칼을 다시 거두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진정으로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은 이 상황에서만 구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이 상황을 통해 구원을 이루기를 원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한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도 세상의 악함을 막음으로 인해 하나님의 구원과 선하심을 나타내려고 한다면 우리는 세상의 악함을 막기 위한 하나님의 놀라우신 결정에 진심으로 따라가는 자가 될 것입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원하시는 일을 이루기를 원하는 마음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선하심에 의지하게 되어서 자리를 지키고 책임을 감당하면서 마침내 세상의 악함을 막을 수 있습니다.
지금도 우리는 선택을 지혜롭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세상에 구원을 전파하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세상 사람들의 악함을 막기 위한 선택과 노력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의 귀한 일꾼으로 굳게 서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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