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동행] 64요삼 1; 2-7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삶의 열매Loading the player... Loading the player... *
64요삼 1; 2-7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삶의 열매_1
2019. 3. 10. 주. 주일오전.
*개요: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삶, 51계획-62희락, 2분석, 6서신서 [요삼]1:2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요삼]1:3 형제들이 와서 네게 있는 진리를 증언하되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 [요삼]1:4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 없도다 [요삼]1:5 사랑하는 자여 네가 무엇이든지 형제 곧 나그네 된 자들에게 행하는 것은 신실한 일이니 [요삼]1:6 그들이 교회 앞에서 너의 사랑을 증언하였느니라 네가 하나님께 합당하게 그들을 전송하면 좋으리로다 [요삼]1:7 이는 그들이 주의 이름을 위하여 나가서 이방인에게 아무 것도 받지 아니함이라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면서 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에덴동산에서 살았던 아담과 하와는 한 가지만 하면 되었지만 범죄한 이후 세상에 들어오고 난 다음부터는 해야 할 일이 수백, 수천 가지가 되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그 할 일을 셀 수라도 있었지만 신약시대에서는 셀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본질적으로 마음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려야 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동행의 의미는 행동의 의미가 아니라 마음의 의미입니다. 마음이 있으면 아주 작은 일에서도 동행할 수 있고 모든 시간에서 하나님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일을 해야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일을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것이 동행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것은 단순히 하나님을 생각하기만 하는 것도 아닙니다. 나를 위해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서 생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과 동행하게 됩니다. 우리는 그것을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고 교회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2인3각 경기를 한다고 해보십시오. 자기 걸어가고 싶은 대로 걸어가면 안됩니다. 함께 보조를 맞춰야 합니다. 동반자를 배려해야 합니다. 동반자를 들고 뛰는 것도 아닙니다. 함께 걸어가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그렇게 동행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들고 뛰시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하나님을 들고 뛰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구원을 소망하는 한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그 하나님을 얼마나 의지하고 바라보는가입니다.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을 얼마나 의식하고 생각하며 위하는가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시작됩니다.
어떻게 보면 이러한 신앙의 삶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추상적이고 비현실적이며 모호하게 보일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고 표면적이고 외면적이며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행동에 대한 이야기만을 한다면 그것은 결국 자기 자신의 모습을 만드는 것 뿐입니다. 그렇게 변화되는 자기 자신을 원하는 것 뿐이지 정말로 하나님을 바라고 소망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자기 자신을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이용해서 자기 자신을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채워나가고 그려나가며 만들어가는 것이 자기 자신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하나의 종교인을 만들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서는 별로 소용이 없습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생활환경의 변화와 시대의 변화가 큰 의미가 없습니다. 지역의 차이도 의미가 없습니다. 아무리 시골에서도 아무리 대도시에서도 그 어떤 부자도 혹은 그 어떤 가난한 사람도 동일하게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시간이 흐르면 자연히 발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명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발전하지만 인간은 언제나 처음부터 시작합니다. 여전히 죄성과 악의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항상 중요한 것은 얼마나 그 속에 하나님의 마음을 담는가가 중요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나이를 먹거나 삶의 위치나 환경이 바뀌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동행할 때 비로소 우리는 단순한 인간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이러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의 중요성을 사도 요한은 너무나 중요하게 깨달았습니다. 요한삼서는 장로 가이오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이전 요한이서는 부녀들에게 보내는 편지였습니다. 그리고 요한 일서는 모든 성도들에게 보내는 편지였습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사도 요한 한 사람에게라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에 대해서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말을 보십시오. “[요삼]1:2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사도 요한은 가이오 장로에게 영혼의 잘됨과 범사의 잘됨과 신체의 강건함을 간구하였습니다. 여기서 ‘잘됨’이라는 것은 헬라어로 εὐοδόω이고 영어로는 ‘prosper, 번영하다, 번성하다’의 의미입니다. 영혼이 발전한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범사가 발전하고 신체가 강건해진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이 말은 세속적인 발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혼의 발전이 신앙적인 발전을 의미하기 때문에 삶의 발전도 역시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아가는 삶의 모습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발전이요 잘됨입니다. 이어지는 구절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하는 발전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요삼]1:3 형제들이 와서 네게 있는 진리를 증언하되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 [요삼]1:4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 없도다” 형제들이 장로 가이오의 가지고 있는 진리를 증언하였습니다. 그것은 진리 안에서 행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기뻐하였습니다. 그가 진리 안에서 행하고 있다는 것은 그 속에 진리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 진리가 있다는 것은 그가 발전하고 있다는 것이었고 그럴 때 그는 영혼이 잘되고 삶이 잘되며 몸이 잘되는 삶이었습니다. 영혼과 삶과 몸이 발전하는 삶이었습니다. 장로 가이오가 그렇게 발전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진리 되신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그 속에 계신 하나님을 따르고 하나님이 주신 진리를 따를 때에 발전하고 잘 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진리 안에서 행할 때 그것은 그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기쁘게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그를 통해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보다도 더욱 중요한 사실은 그가 동행하시는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함께 할 때에 생명나무 열매를 먹으면서 발전될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과 함께 할 때에 은혜를 누리면서 발전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렇게 되기를 기뻐하십니다. 사무엘상17장에 보면 다윗이 골리앗과 싸울 때에 사울은 다윗에게 투구와 갑옷을 씌워주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 모든 것을 벗고 오직 물맷돌만 집어들었습니다. “[삼상]17:38 이에 사울이 자기 군복을 다윗에게 입히고 놋 투구를 그의 머리에 씌우고 또 그에게 갑옷을 입히매 [삼상]17:39 다윗이 칼을 군복 위에 차고는 익숙하지 못하므로 시험적으로 걸어 보다가 사울에게 말하되 익숙하지 못하니 이것을 입고 가지 못하겠나이다 하고 곧 벗고 [삼상]17:40 손에 막대기를 가지고 시내에서 매끄러운 돌 다섯을 골라서 자기 목자의 제구 곧 주머니에 넣고 손에 물매를 가지고 블레셋 사람에게로 나아가니라” 다윗은 사울이 볼 때 전혀 전투에 준비되지 않은 것 같았지만 다윗은 사실 완벽히 준비되었습니다. 그는 물맷돌을 집으며 하나님을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그의 고백 속에 이렇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나타났습니다. “[삼상]17:45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그는 물맷돌을 의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의지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나아갔을 때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승리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삶 속에서 바로 이러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늘 이러한 일에는 먼저 된 사람이 앞서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을까 말까 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과 동행하라는 것은 좀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잘 믿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먼저 앞선 사람들이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으면 그런 분위기가 형성되고 그런 목표의식이 생기며 그 속에서 더욱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항상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는 사람들과 살고 있습니다. 그들의 종착지는 멸망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종착지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의 모습으로 우리가 형성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무엇을 하든지 그러한 삶을 살았습니다. 목축을 하든지 농사를 하든지 상업을 하든지 제조업을 하든지 서비스업을 하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항상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러한 자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하나님을 기뻐할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빌]3:18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빌]3:19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빌]3:20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빌]3:21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이렇게 우리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화시키시기 위해서 지금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우리가 하나님을 따라 행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세마포 옷을 입는다고 해보십시오. 두 팔이 있어야 합니다. 두 발이 있어야 합니다. 몸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세마포 옷을 입을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향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화하게 해주실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발전된 모습을 갖게 되면 가장 크게 달라지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대하는 태도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고자 하는 간절한 바램이 지금까지 다른 사람들에게 했던 태도를 변화시킵니다. 다른 형제, 곧 천국의 나그네 된 자들에게 어떻게 대하는가가 결정됩니다. “[요삼]1:5 사랑하는 자여 네가 무엇이든지 형제 곧 나그네 된 자들에게 행하는 것은 신실한 일이니 [요삼]1:6 그들이 교회 앞에서 너의 사랑을 증언하였느니라 네가 하나님께 합당하게 그들을 전송하면 좋으리로다 [요삼]1:7 이는 그들이 주의 이름을 위하여 나가서 이방인에게 아무 것도 받지 아니함이라” 장로 가이오는 형제들에게 신실하게 행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교회 앞에서 그의 사랑을 증언하였습니다. 그러한 증언은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다는 구체적인 증거가 되었습니다. 우리도 만나는 사람들에게 믿음의 형제들에게 우리의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증거해야 하겠습니다. 그들에게 잘 대해주는 이유는 그들에게서 어떤 이유를 찾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직 우리가 하나님께 대해서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우리가 성격이 이상하고 심성이 안좋다 하더라도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있고 하나님과 동행하려는 의지가 있을 때 그 모든 마음을 억누르고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잘 대해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이 더 크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다른 형제들은 세상으로부터 받지 못했던 사랑을 받게 됩니다.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나갔지만 이방인들로부터는 아무 것도 받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받을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람들로부터 얻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그 당시에는 물질이었고 생활비였지만 지금 우리들에게는 사랑이고 관심입니다. 애정이고 인내입니다. 그러한 은혜의 표현을 해주지 않는 세상에서는 메마르고 괴로워하지만 하나님의 사람들에게서는 풍성하게 받을 수 있을 때 그들은 충만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 우리가 은혜를 전해줄 수 있는 그들은 그리 멀리 있지 않습니다.
삶 속에서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삶의 대상들이 있습니다. 가족들이 있고 이웃들이 있습니다. 성도들이 있고 기타 만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모든 사람들이 세상으로부터 받지 못한 그 사랑을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서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할 때 그 놀라운 사랑을 전해줄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삶의 열매를 바로 우리가 누립니다. 우리의 영혼이 잘되고 범사가 잘되며 강건해 집니다. 그것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가 누리는 축복입니다. 이러한 놀라운 삶을 사모하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귀한 축복의 삶이 펼쳐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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