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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동행] 40마2; 16-21 피난계획으로의 동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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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마2; 16-21 피난계획으로의 동행_1

 

 2013.12.15. 주. 주일예배

 

*개요:    2관점, 4복음서신서, 5은혜-7실천

 

16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 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표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17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로 말씀하신바

18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

19    헤롯이 죽은 후에 주의 사자가 애굽에서 요셉에게 현몽하여 가로되

20    일어나 아기와 그 모친을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라 아기의 목숨을 찾던 자들이 죽었느니라 하시니

21    요셉이 일어나 아기와 그 모친을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오니라

 

 

성탄절이 다가오면 늘 등장하는 인물들이 있습니다. 마리아, 요셉, 동방박사들, 목자들 등 이들은 성탄절이 되면 어김없이 등장해서 예수님의 나심의 의미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전부 예수님께 경배를 드리고 그분을 찬양하고 좋은 의미로 나타나는 인물들입니다. 그런데 그에 반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의 기쁨과 즐거움을 완전히 사라지게 만드는 나쁜 인물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서기관들, 바리새인들, 그리고 대제사장들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사람들의 우두머리였던 헤롯왕입니다. 이들은 모두 하나님을 온전하게 섬기지 않으면서 성탄절의 기쁘고 감사하고 영광스러운 의미를 변질시키는 악하고 강퍅하며 나쁜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나름대로는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층이었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하나님의 은혜를 누렸던 사람들이었는데 어떻게 하다가 그렇게 까지 되었는지 안타깝습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 망하고 남유다가 바벨론에 망하고 그리고 70년 후에 다시 포로들이 돌아오고 이렇게 하면서 시간이 오래 흐르고 나니, 왕이 없고 제사장도 없고 선지자도 없는 이스라엘에서 대제사장들, 바리새인들, 서기관들은 기존의 지배력을 대치하는 또 하나의 새로운  지배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로마의 압제를 받으면서 로마가 임명한 이스라엘 지역의 왕으로 온 헤롯왕의 존재는 서로 서로 적절히 타협하면서 누릴 것을 누리는 상부상조, 공생공존의 관계가 되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상황으로 인해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의 오심을 반가워하고 기뻐하였지만 어떤 사람들은 거부하고 싫어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조직문제에서의 충돌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한 조직 내에서 하층에 해당하는 사람은 새로운 왕의 오심을 기뻐하고 반가워하였고 그 조직 내에서 상층에 해당하는 사람은 새로운 왕의 오심을 싫어하고 거부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그 왕을 섬겨야 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는 내가 왕이었는데 이제 새로운 왕이 오고 그 왕을 나도 섬겨야 한다는 것은 지금까지 왕이었던 입장에서는 매우 불쾌하고 화나는 일이었습니다.

 

성경역사에 나오는 이 헤롯왕과 그 뒤를 잇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존재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의 불신의 여러가지 이유 중에는 하나님에게 자신의 왕좌를 내어줄 수 없다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 왕좌를 어떻게 해서든지 지켜내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있습니다. 그래서 제사를 지내게 하고, 종교를 지키게 하고, 신념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하고, 삶의 습관을 바꾸려하지 않으면서 모든 것에서의 변화를 주장하는 신앙을 끝끝내 반대합니다.

불신자 중에서 왕좌를 놓고 쟁탈전을 벌이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신앙인 중에서도 역시 그 삶의 왕좌를 놓고 쟁탈전을 벌입니다. 비록 처음에는 일단 하나님께 굴복하기는 했지만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다시 그 왕좌를 탈환하기 위해서 애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왕좌를 넘겨드린 것은 주일 단 하루 뿐이지 나머지 날에서는 자신이 왕이라고 하면서 여전히 자신의 왕권을 쥐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께 대항하여서 새로운 왕으로 오신 그분의 오심을 거부하며 혹은 외면하며 살아갈 때에 그 모습은 이 시대에 새롭게 형성되는 또 하나의 헤롯의 모습이 됩니다. 그런 모습속에서 그 사람들은 복음을 거부하며 하나님의 주권에 대항하며 어떻게 해서든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 발악하는 강팍한 자가 되어 갑니다. 마치 함께 걸어가다가 갑자기 멈춰버리면 뒤에 오는 사람들이 부딪치게 되는 것처럼, 신앙인 중에서도 그렇게 악을 행하게 되어 버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헤롯이 행한 악한 일은 바로 그일이었습니다. 자기가 계속 왕이 되기 위해서 자신의 왕권을 위협하는 그 동방박사들이 말한 ‘새로운 왕’을 죽이는 것입니다. 애초에 동방박사들이 말해주지 않았다면 원래 미가서에 있는 성경의 예언에는 관심도 없었기 때문에 전혀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와서 미래의 가능성을 이야기한 뒤에는 그대로 살려둘 수는 없었습니다. 그것은 곧 자기 나라와 자기 왕권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빨리 밟아서 그 싹을 없애 버려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동방박사들에게는 꼭 그 유대인의 왕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려달라고 했다가 그들이 다시 돌아오지 않자 헤롯왕은 격노하였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왕에 대한 경배를 위해서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던 그들이 새로운 왕에 대한 공격을 위해서는 즉각적으로 움직였습니다.

“16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 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표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헤롯은 속았기 때문에 어린 아이들을 죽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차피 유대인의 왕으로 태어난 아기를 죽이려고 했는데 그가 누군지 모르기 때문에 다 죽였던 것입니다. 처음에는 한 명만 죽이려고 했지만 나중에는 다 죽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헤롯이 이렇게 어린 아이들을 죽인 이유는 그래야 새로운 왕을 죽일 수 있었던 것이고, 또한 그래야 자신이 계속 왕이 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모든 악한 행동의 목적은 자기 자신의 유익에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도 헤롯과 같이 악한 자들이 이렇게 악한 행동을 하는 그 핵심 속에는 자기 자신의 유익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겉으로는 다른 사람을 위한다고 하였지만 속으로는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한 욕심이 있었습니다. 

어떤 남편들은 자신이 열심히 돈을 버는 것이 결국에는 가족을 위하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면서 가족의 간절한 바램을 들어주지는 않습니다. 사실은 정말 가족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서 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그 간절한 바램 하나를 들어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떤 아내들은 자신이 이런 저런 너무 많은 모임들에 참여를 하느라 바빠서 혹은 이런 저런 개인적인 일을 하느라 바빠서 가족의 부탁을 들어줄 수 없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런 모임들에 참여를 하고 여러가지 일을 하는 이유는 자기가 하고 싶었기 때문이었고 자기가 하고 싶은 그 일을 그만 두거나 미루면서 해야 하는 가족의 부탁은 언제나 뒷전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어떤 부모들은 자녀에게 대해 너무 많이 간섭을 하거나 혹은 너무 적게 간섭을 하는 것은 부모에게 좋지 않은 일이거나 혹은 자녀에게 좋지 않은 일이기 때문에  그래서는 안된다고 나름의 원칙을 세워놓고 그것을 강조하지만 사실 정말 원했던 것은 자신의 뜻을 실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자녀들의 정말 중요한 영적인 필요는 그냥 무시되어져 버립니다.

어떤 학생들은 자신이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하지만 정작 하나님이 정말로 기뻐하시는 일에는 소홀합니다. 혹은 좀 휴식을 가지며 즐겁게 시간을 보내는 일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그 일에 너무 빠져 들어서 정작 하나님께 당연히 드려야 하는 시간에는 결석합니다.

 

사실 이러한게 겉다르고 속다른 경우를 이 세상 모든 상황속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경우들 속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보아야 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어리석은 모습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도 이렇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벌써 지금 이런 상황일 지도 모릅니다. 지금은 우리가 약해서 그렇지 나중에 강하게 되었을 때 그 때 앞으로 나타나게 될 어려움을 미연에 방지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 씨앗을 미리 뽑아버려야겠다는 노력으로서 악을 행하게 되지 않는다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가 인간임을 잊지 마십시오. 모든 사람에게는 전부 헤롯왕에게 있었던 바로 그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이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하더라도 나중에는 악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말씀은 이와 같은 일에 대해서 그것이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이루어졌다고 말합니다. 그 내용이 무엇인지를 살펴봅시다.

“17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로 말씀하신바

18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

이것은 예레미야 31장 15절에서 나온 예언입니다. 이 예언 속에서 라마는 라헬의 무덤이 있는 곳입니다. 그리고 그 라마는 베들레헴 근처입니다. 라헬은 야곱의 아내로서 요셉과 베냐민을 낳았는데 둘째 베냐민을 낳고 죽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식을 놓고 죽는 비통한 어머니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녀는 아들을 낳으면서 그 아들의 이름을 베노니(슬픔의 아들)이라고 불렀습니다. 나중에 야곱이 그 이름을 바꾸어 베냐민(오른손의 아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 예언은 처음 이스라엘 백성이 멸망하여 자신의 자손이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가는 것을 애통해한다는 의미였습니다. 하나님께 악을 행하여 결국 심판받는 이스라엘 자손들에 대한 안타까움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예언은 베들레헴에서 일어난 헤롯왕의 학살사건에서 다시 한번 이루어졌습니다. 한 사람의 욕심의 결과가 이토록 참혹한 일을 일어나게 하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한 사람이 욕심을 부리면 결국 모든 사람의 아픔이 생겨납니다. 그가 욕심을 부림으로써 하나님앞에 범죄합니다. 그 범죄의 끝은 사망입니다. 그 자신에게나 혹은 주변 사람들에게나 모두 사망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러한 어리석음에서 피해야 합니다. 죄로 강퍅하게 됨을 면하기 위해서 우리는 피난을 가야 합니다. 우리 자신이 그렇게 죄인이 되거나 혹은 누군가의 죄악으로 인해 피해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피난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헤롯왕 뿐만 아니라 이세상 모든 사람들의 욕심을 알고 계시고 그들이 그 욕심으로 인해 마침내 무슨 짓을 하게 될 지를 알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피난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을 따르게 하시는 것입니다.

헤롯은 두살 미만의 모든 사내아이를 죽임으로써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님을 죽으려고 했지만, 예수님은 죽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요셉이 아기 예수님을 데리고 그 곳을 피했기 때문입니다. 주의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서 헤롯왕이 아기를 죽이려 하니 애굽으로 피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애굽으로 온 가족을 이끌고 애굽으로 피난을 갔던 것입니다.

“마2:13 저희가 떠난 후에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가로되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하니 일어나 아기와 그의 모친을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여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 하시니 14 요셉이 일어나서 밤에 아기와 그의 모친을 데리고 애굽으로 떠나가”

애초에 피난 계획이 존재했던 이유는 헤롯왕이 아기예수님을 죽이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더 무섭고 끔찍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요셉으로 하여금 가족을 이끌고 피난을 가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아까 살펴본 것 처럼 헤롯왕의 욕심과 그 욕심으로 인해서 하고자 하는 악행이라는 것은 우리 자신이 주인공이 되거나 혹은 우리 자신이 피해자가 될 수 있습니다. 주님이 알고 계시고 안타까워 하시는 그 라헬의 통곡이 바로 우리에 대해서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우리를 피난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피난길이 또다른 헤롯의 모습이 될 수 있습니다. 피난길 그 자체는 문제가 아니었지만 그 길을 가면서 마음이 변질되어 버립니다. 어떤 훌륭한 목사님은 과거에는 너무나 훌륭한 사역과 존경받는 모습이 있었지만 어느 순간에 비상식적이고 비도덕적이고 비신앙적으로 변질됩니다. 그런 일은 보통 성도라도 하지 않을 일을 아니 불신자도 그렇게 하지 않는 일을 그런 훌륭한 목사님이 저지릅니다. 어떤 훌륭한 장로님이 자기 명예와 자신이 받게될 여러가지 책임을 생각하면서 이기적이고 개인주의적이고 세상과 타협적으로 변합니다. 어떤 훌륭한 집사님이 어떤 훌륭한 성도님이 자기가 누리고 싶은 어떤 것이 생겼을 때 그로 인해서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없는 수준으로 떨어져서 악과 타협하고 비진리에 순응해버립니다. 그러면 그 모든 것이 바로 헤롯왕이 했던 일과 정확하게 일치해버립니다. 그런 모습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얼마나 절망적인 모습이 되는지 모릅니다.

 

이제 우리가 요셉처럼 애굽으로의 피난계획에 동참하면서 진정으로 헤롯왕의 악행과 같은 본성적인 악을 본받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진정한 피난의 의미란 무엇일까요? 피난계획을 따르면서 또다른 헤롯왕의 악행을 따르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 뿐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지키기 위한다는 목표를 갖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 지키는 것이라면 결국 그 자체로 헤롯왕의 악행을 따라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지키는 것이라면 그것은 가장 고귀하고 숭고하며 온전한 피난계획에 동참하는 것이 됩니다. 정말 그럴까요? 예수님을 지키기 위한 것이 정말 의미있는 노력일까요? 요셉은 정말 예수님을 지킬 수 있었을까요? 19절을 보십시오.

“19    헤롯이 죽은 후에 주의 사자가 애굽에서 요셉에게 현몽하여 가로되

20    일어나 아기와 그 모친을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라 아기의 목숨을 찾던 자들이 죽었느니라 하시니

21    요셉이 일어나 아기와 그 모친을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오니라”

때가 되었을 때에 주의 사자는 요셉에게 나타나서 다시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가게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아기의 목숨을 찾던 자들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더이상 아무런 위협이 안되었습니다. 그때 그는 다시 돌아왔습니다. 계속 그곳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때가 되었을 때에는 아기와 모친을 데리고 다시 돌아왔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는 예수님을 위해 애굽에 갔고 예수님을 위해서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것이 그가 동참했던 피난계획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녀를 잃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나사렛 사람이 되리라는 예언을 성취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 자신의 보호를 받았습니다.

 

사실 생각해보면 이 모든 일의 시작은 예수님이 그들에게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그들에게 오셨습니까? 예수님은 바로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 구원이 가장 먼저 예수님의 어머니였던 마리아에게, 그리고 아버지였던 요셉에게 임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이후에 태어난 그 가족들에게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의 동생이었던 야고보는 처음 예수님을 믿지 않았지만 나중에는 예수님을 온전히 믿게 되고 야고보서를 쓰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그리고 마리아는 예수님을 지키면서 예수님의 구원하심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꼭 요셉이나 마리아가 아니더라도 하나님 자신의 온전한 보호를 받으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 그들을 위해서 하나님은 그들이 예수님을 지키게 하셨고 그로 인해서 온전하게 예수님의 지키심을 받았습니다. 마치 엘리야시대에 사르밧 과부에게로 나아갔고 엘리야가 그 사르밧 과부의 도움을 받으면서 또한 사르밧 과부가 엘리야로 인해서 구원을 받았던 것처럼 말입니다.

지금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지키는 것 같지만, 예수님이 우리를 지키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드리는 것 같지만 사실은 예수님이 우리를 믿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위해 오신 예수님을 통해 바로 우리가 구원을 받았고 우리가 변화를 받았고 우리가 영생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정말 많은 것을 얻은 사람은 바로 우리들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예물을 드리고 물질을 드리고 시간을 드리고 정성을 드리는 것 같지만 사실은 우리가 예수님으로부터 생명을 받고 구원을 받고 도우심을 얻고 인도하심을 받고 축복을 받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으로 인해 의미있고 가치있는 삶을 살아가게 되었으며 영원을 사모하며 살아가게 된 자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없었다면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되었을뻔 하였습니까? 어쨌든 쓰게 되는 돈이고 어쨌든 보내게 되는 시간이고 어쨌든 지나게 되는 인생이지만 예수님 안에 있었기 때문에 이것이 이생과 내생에서 약속을 받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예수님의 오심 자체가 우리에게는 피난계획의 시작을 보여줍니다. 더 큰 구원을 얻는 것도 있지만 다가오는 재앙을 피하는 의미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구원계획이면서 동시에 피난계획인 것입니다. 그리고 피난계획의 의미속에서 그것이 얼마나 우리가 커다란 위험을 피하였는지를 깨닫게 합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따름으로써 그 피난 계획에 동행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우리의 본성이 얼마나 악하고 우리가 얼마나 나쁜 일을 저지를 수도 있는 자인지를 절감하면서 이 피난계획에 동참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또한 우리가 이 세대의 악함과 죄악에 얼마나 희생될 수 있는가를 생각하면서 그 피난계획에 따르시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리고 바로 우리에게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의 가치와 의미를 기억하면서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 피난계획에 함께 오르시지 않겠습니까?

그것은 요셉처럼 예수님을 지키기 위해서 움직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준비하며 예수님을 생각하며 예수님을 따르기를 결심함으로써 그 피난계획은 실행됩니다. 우리 모두가 이 놀라운 피난계획을 통해서 진정으로 예수님을 지켜내는 자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진정으로 예수님을 통해 보호받는 자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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