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동행] 59약 1; 9-15 시련을 견디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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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약 1; 9-15 시련을 견디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음_1
2018. 11. 11. 주. 주일오전.
*개요: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삶의 모습, 55동행, 6서신서, 1적용 [약]1:9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약]1:10 부한 자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이는 그가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약]1:11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 같이 쇠잔하리라 [약]1:12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 [약]1:13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약]1:14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약]1: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다양한 위치와 다양한 환경에서 살아갑니다. 삶을 살아가는 위치와 환경이 어떠하든지 간에 중요한 것은 그 속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가입니다. 누구에게나 어떤 상황에서나 힘들고 어려움이 있지만 그 어려움을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잘 참으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면류관을 얻느냐 못얻느냐가 중요합니다. 이 세상을 어떻게 살든지 간에 그 생명의 면류관을 얻는다면 이 세상에서의 삶은 그 자체로 커다란 의미가 있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이 세상을 어떻게 살든지 간에 생명의 면류관을 얻지 못한다면 이 세상에서의 삶은 무엇을 했다 하더라도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생명의 면류관을 얻느냐 못얻느냐인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영화나 연극에 출연하는 배우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이 그 영화나 연극에 출연해서 오랜 시간 공을 들여서 열심히 연기를 했을 때 중요한 것은 출연한 것에 대해서 출연료를 받을 수 있는가 없는가 일 것입니다. 만약 열심히 노력해서 자신의 맡은 배역을 잘 감당했다 하더라도 출연료를 받지 못한다면 그 모든 노력은 헛될 것입니다. 그 역할을 하면서 왕이 되기도 하고 귀족이 되기도 하고 이런 저런 높은 사람이 되기도 했지만 출연료를 받지 못하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반대로 그 역할을 하면서 거지가 되기도 하고 노비가 되기도 하지만 출연료를 많이 받는다면 그 자체로 큰 의미가 있습니다. 오늘 성경말씀 12절은 바로 그것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약]1:12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 시험을 참고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복이 있는 이유는 그가 주님으로부터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시험을 참은 자가 이러한 생명의 면류관을 얻는 이유는 단순히 그가 시험을 참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사실은 그가 시험을 참고 견디면서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의 약속을 사모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참음과 인내를 칭찬하시면서 주님께 대한 사랑과 의지함과 사모함에 응답하시기 때문에 생명의 면류관을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에는 시험을 참고 견디는 사람들은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 속에서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의지하면서 그의 도우심을 사모할 때에 비로소 그의 참고 견디는 것이 의미 있습니다. 그냥 참고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갚아 주시기 때문입니다. 영화나 연극에서 출연료를 주는 사람은 그 영화나 연극을 진행하는 주체입니다. 때로는 감독이나 스텝도 그 작품을 준비하면서 보수를 받습니다. 자신만의 의미를 갖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자신에게 수고한 대가를 줄 수 있는 주체에게 어떻게 생각되느냐가 중요합니다. 영화나 연극에서는 자신의 맡은 일을 전문가 답게 최선을 다 해서 완료하면 되지만 하나님께 대해서는 하나님을 어떻게 대했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냥 알아서 자기 일을 진행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 속에서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았는가가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사랑의 대상이며 의지의 대상이고 우리에게 약속을 주실 뿐만 아니라 그 약속을 반드시 이루어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낮은 위치에나 높은 위치에 올라가면 자신의 위치가 전부라고 생각이 듭니다. 낮은 사람은 평생 낮고 높은 사람은 평생 낮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다 보니 낮은 사람은 낮은 사람 대로 하나님을 의지할 생각을 못합니다. 자신의 낮음 때문에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높은 사람은 높은 사람 대로 하나님 사랑할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자신의 높음이 더 크고 중요하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낮은 사람이나 높은 사람에게 야고보 사도가 말하는 것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그리고 특히나 이 이야기를 야고보 사도가 이야기 했다는 것은 더 의미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자신이 가장 낮은 자에서 가장 높은 자로 변화되었기 때문입니다. “[약]1:9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약]1:10 부한 자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이는 그가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약]1:11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 같이 쇠잔하리라” 낮은 형제는 자신의 높음을 자랑하라는 말은 육체적으로나 세상적으로는 낮은 위치에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 대한 믿음에 있어서는 누구보다도 더 풍성함을 기뻐하고 감사하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난한 자가 헌금 할 때에 그는 자신의 생활비 전부를 넣었다고 칭찬해주신 것처럼 여러 가지 면에서 낮은 위치에 있을 때에는 상대적으로 하나님께 더욱 의지하며 사모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자신의 전부와 같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또한 이와 반대로 부한 자는 자신의 낮아짐이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또한 자랑하라고 했습니다. 돈이 많고 부하기 때문에 믿음에 있어서는 가난한 자들의 비율을 절대 따라갈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그것을 자랑하고 기뻐하며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가진 모든 부귀와 영화는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갈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부요함으로 인해서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낮아짐으로 자랑해야 하고 그러면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부요함은 한낱 풀의 꽃과 같이 사라질 것으로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꽃은 피었을 때에는 그 어느 것보다도 아름답지만 시간이 지나 떨어져 버리는 아름다움은 사라지고 그 의미와 가치도 다 없어집니다. 부요함과 높음의 의미를 이렇게 깨닫는다면 오히려 그는 낮아짐을 자랑해야만 합니다. 자신이 붙드는 것은 꽃이 아니라 줄기요 부귀가 아니라 상대적으로 작은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말씀을 전하는 야고보 사도는 사실 부침(浮沈)이 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동생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처음에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에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게 되었고 그 다음에 교회의 기둥이 되었고 전승에 의하면 주후62년에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에 의해서 순교를 당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가장 낮은 믿음이었다가 가장 높은 믿음을 갖게 되었으며 그와 동시에 가장 높은 자신만의 위치에 있다가 가장 낮고 겸손한 데에까지 이르렀던 야고보는 낮은 자들이 무엇을 기뻐하고 감사해야 하며 높은 자들이 역시 무엇을 기뻐하고 감사해야 하는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이 모든 경우 속에서 우리가 깨닫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는 낮아짐이나 높아짐은 무의미하다는 것입니다. 오직 그가 무엇을 의지하고 사모하는가가 중요합니다. 그 사람이 자신을 의지하고 자신을 사랑한다면 하나님으로부터 얻을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다른 것에는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면 그는 자신이 의지하고 사랑했던 하나님에게서 온전한 생명의 면류관을 얻게 될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 자신이 그러한 삶을 살았고 하나님을 의지했기 때문에 바로 이것을 우리에게 말하였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간 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사랑하며 사모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내가 가지고 있는 낮아짐도 시간이 지나면 사라질 것입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내가 가지고 있는 높아짐도 사라질 것입니다. 오직 남아있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것이고 하나님은 바로 그것을 갚아 주십니다. 그래서 나의 낮아짐 속에서 하나님께 대한 높음이 자랑스러운 것이고 나의 높아짐 속에서 하나님께 대한 낮음이 자랑스러운 것입니다. 항상 하나님께 대한 그 무엇 만이 좋은 것이지 그것을 제외한 것은 어떤 것도 좋은 것이 아닙니다.
풍선에 바람들어가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바람 빠진 풍선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풍선에 바람이 들어가 있을 때에만 풍선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할 때 우리는 의미가 있고 그것이 이 세상에서 우리가 이루어야 할 목표입니다. 인간은 이 세상에서 풍선일 뿐입니다. 멋진 풍선, 혹은 볼품없는 풍선입니다. 이러한 풍선으로서 결코 우리 스스로는 무엇인가를 이룰 수 없습니다. 결국은 썩게 되고 없어질 존재입니다. 이러한 인간에게 하나님은 영원한 존재의 의미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 하나님과 함께 할 때 비로소 우리는 우리 속에 하나님은 담은 자들이 되어서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게 됩니다. 그 나라에서 우리는 결코 썩지 않는 영원하신 하나님과 함께 거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속에는 하나님이 함께 계셔야 합니다. 우리는 그 영원하신 하나님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먼저 해야 할 것은 우리 속에 있는 모든 욕심을 빼내는 것이 필요합니다. 인간에게는 하나님이 들어가시기 전에 먼저 인간 자신의 욕심이 들어 있습니다. 그것을 빼내고 하나님을 모셔 들여야 합니다. 이것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13절입니다. “[약]1:13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인간이 자기 마음 속에 있는 욕심을 빼내고 하나님을 집어 넣는 것을 ‘연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기 마음 속에 욕심이 있는데 거기에 더 큰 욕심을 집어넣는 것은 ‘시험’입니다. 욕심이 더 자극되어서 그 욕심의 화신이 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시험에 빠지는 일이 됩니다. 이렇게 시험에 빠지는 경우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않으시고 아무도 시험하지도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시험은 악을 자극하고 악을 선동하며 악을 자행하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격장에서 총을 들었다고 해서 그 총구를 동료나 옆 사람을 겨누라는 말은 아닙니다. 부엌에서 칼을 들었다고 해서 그 칼날이 가족이나 자기 자신을 향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총은 연습과 훈련을 위해서 드는 것이고 칼은 요리와 각종 효율적인 사용을 위해서 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선을 이루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맞지만 그것으로 악을 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시험에 빠지게 되는 모든 상황들이 항상 보통 상태보다는 특별한 면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은 선을 위한 것이지 악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 둘의 차이는 매우 분명합니다. 기억해야 하는 것은 모든 특별한 상황이 악으로 치닫는 것은 항상 그 악에 이끌린 자유의지를 가진 각 개인의 잘못일 뿐입니다. 14,15절을 보십시오. “[약]1:14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약]1: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만약 자신의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을 마음에 모셔 들이고자 했다면 시험에 빠지지 않았겠지만 원래 있던 욕심에 이끌려서 더 욕심을 추구하게 되었을 때에 죄에 미혹되었습니다. 그래서 욕심이 커져서 잉태하여 죄를 낳았고 그 죄가 더욱 커지면서 사망을 낳게 된 것입니다. 마음 속에 욕심이 커지면 그로 인해서 죄를 짓게 되고 그 죄가 더 심해지게 되면 결국에는 죽는 자가 되고 맙니다. 이것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모셔 들이기 위해서 그 전에 반드시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그럴 때 비로소 하나님을 모셔 들일 수 있습니다.
가룟 유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망의 결과에 이르기까지 그에게는 죄의 단계가 있었습니다. 그 죄 속에서 그는 예수님을 대제사장들에게 팔았습니다. 그렇다면 그 죄를 저지르기 전에는 무엇이 있었을까요? 바로 욕심이 있었습니다. 처음 그가 보여준 욕심은 한 여인이 예수님께 나아와서 향유 옥합을 부었을 때 나타났습니다. 그러한 욕심의 시작이 결국은 그 스스로의 죄로 이어졌고 나중에는 사망으로 귀결되었습니다. 이러한 일들이 우리에게 있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맨 처음 그 욕심부터 버려야 합니다. 그 욕심을 버리는 것이 죄를 버리는 것보다 훨씬 쉽습니다. 사망을 버릴 수는 없으니까 오직 욕심을 버리든지 죄를 버리든지의 두 가지 선택이 있습니다. 좀더 쉽게 욕심을 버릴 때에 그냥 욕심만 버리고 말면 안됩니다. 시험은 단순히 참고 인내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속에서 복을 받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복을 받기 위해서는 그 시련을 견디어 내면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해야 합니다. 그럴 때 그 모든 일들이 지나서 하나님께서 자기를 사랑한 자들에게 맹세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주실 것입니다. 결국 마음 속에 자신의 욕심을 버리면서 참고 인내하고 견디는 것이고 하나님을 마음에 모셔 들이면서 사랑하고 의지하며 따르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일을 행할 때에 우리는 단순한 피조몰로서의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자녀들이 됩니다.
육신의 자녀들도 두 번의 성장 시기를 겪습니다. 첫 번째는 태어나서 겪는 성장시기이며 두 번째는 성숙해지면서 겪는 성장시기 입니다. 첫 번째느 몸이 자라는 것이고 두 번째는 마음이 자라게 됩니다. 이 마음이 자랄 때 유혹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을 섬기고 따르고자 할 때 비로소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성장한 자녀가 됩니다. 우리의 삶은 그러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이 세상에서 태어났지만 이 세상에 속하지 않고 새롭게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서 떠난 자들이 되고 그들의 자녀들이 복을 받게 됩니다. 우리가 생명의 면류관을 바라는 것이 이러한 의미가 있습니다. 복을 바라는 것이 아니니 걱정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주시는 이러한 축복을 온전히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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