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동행] 24렘 1; 17-19 그들이 너를 이기지 못하는 이유Loading the player... Loading the player... .
24렘 1; 17-19 그들이 너를 이기지 못하는 이유_1
2022. 1. 23. 주. 주일오전.
*개요: 예레미야에서의 신앙의 문제와 목표, 34두렴-55동행, 도피심, 나약함-담대함, 의연함, 관점해석
[렘]1:17 그러므로 너는 네 허리를 동이고 일어나 내가 네게 명령한 바를 다 그들에게 말하라 그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그들 앞에서 두려움을 당하지 않게 하리라 [렘]1:18 보라 내가 오늘 너를 그 온 땅과 유다 왕들과 그 지도자들과 그 제사장들과 그 땅 백성 앞에 견고한 성읍, 쇠기둥, 놋성벽이 되게 하였은즉 [렘]1:19 그들이 너를 치나 너를 이기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할 것임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지금까지 우리는 예레미야 1장에서 예레미야가 가졌던 고민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그는 원래 제사장이었지만 선지자로 부르심을 받았고 그 이후부터 두려움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가졌던 부르심 이후에 가졌던 두려움에 대해서 우리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런 입장이어도 비슷한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익숙하지 않은 일은 어렵습니다. 어려운 일은 두렵기 마련입니다. 예레미야에게 선지자적인 사명은 너무나 익숙하지 않고 어색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그는 두려워하였고 괴로워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불편한 감정을 갖는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수 있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말씀은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어떤 때에는 그 말씀이 꿀보다 달 때가 있지만 또 어떤 때에는 그 말씀이 천근만근처럼 무겁고 어렵게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부르심을 따르기 어려울 때가 바로 그런 때입니다. 우리도 삶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쉽게 따를 수 있을 때에는 좋게 생각되지만 쉽게 따르기 어려울 때에는 어렵게 생각됩니다. 오죽하면 예수님께 나아왔던 부자 청년도 예수님께서 네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하셨을 때 그냥 도망가 버리지 않았습니까! 이런 모습들은 전부 그 말씀을 따르기가 어렵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오늘날 성도들은 이러한 말씀의 딜레마 앞에 서 있습니다. 말씀이 어려우면 사람들이 싫어합니다. 그래서 말씀이 쉽기를 바랍니다. 또한 말씀이 너무 무거우면 사람들이 싫어합니다. 그래서 말씀은 가볍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말씀이 너무 심각하면 싫어합니다. 그래서 말씀이 재미있기를 원합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이 좋아하는 말씀이란 쉽고 가볍고 재미있는 말씀들입니다. 사람들이 읽는 신앙서적은 쉽고 가볍고 재미있는 책들입니다. 그러다 보니 성경도 사람들이 많이 좋아하고 읽고 감상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재미있고 쉽고 가벼워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더 깊고 넓고 높은 말씀을 생각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늘 발전하지 못하는 악순환 속에 있게 됩니다. 그런 성도들에게 예레미야의 모습은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를 새삼 깨닫게 합니다. 바로 이것이 본질적인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렘]1:17 그러므로 너는 네 허리를 동이고 일어나 내가 네게 명령한 바를 다 그들에게 말하라 그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그들 앞에서 두려움을 당하지 않게 하리라” 이 말씀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이끌고 가시는 진정한 길이 무엇인가를 알게 됩니다. 그 길은 두려워하는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게 하는 것이고 미워하는 사람은 미워하지 않게 하는 것이며 분노하는 사람은 분노하지 않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럴 때 놀라운 발전이 일어나고 진정한 하나님의 함께 하심이 형성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좋아하고 좋아하지 않고를 떠나서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을 가지고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일 때에 비로소 온전한 성장과 변화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진리인 이유는 삶의 여러 상황 속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배가 바다로 나아간다는 것은 항구에서 멀어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산 정상에 올라간다는 것은 산 아래에서부터 멀어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다로 나왔는데 항구가 빤히 보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산에 올라갔는데 마을에 가까워질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사실 멀리 가거나 떨어진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떠나고자 했던 그 주변을 맴돌았다는 것을 의미할 뿐입니다.
그렇다면 원래 사람들이 원하는 선지자상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사람들이 원하는 말을 해주는 선지자입니다. 듣고 싶은 말을 해주고 하고 싶은 말을 해주고 전하고 싶은 말을 전해주는 선지자가 바로 사람들이 원하는 선지자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지자는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원하지 않는 선지자가 사실은 진정한 하나님의 선지자였다는 것은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입니까? 하나님은 예레미야가 바로 그렇게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렘]1:18 보라 내가 오늘 너를 그 온 땅과 유다 왕들과 그 지도자들과 그 제사장들과 그 땅 백성 앞에 견고한 성읍, 쇠기둥, 놋성벽이 되게 하였은즉” 온 땅의 사람들과 유다 왕들과 그 지도자들과 제사장들과 그 백성 앞에서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견고한 성읍, 쇠기둥, 놋성벽이 되게 하셨습니다. 분명 그들이 원하는 선지자는 그런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선지자는 허술한 성읍, 물기둥, 솜성벽 등이었습니다. 그래야만 그들은 안심하고 편안하고 유쾌하고 즐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속에서 그들은 자신들이 원하던 우상숭배를 마음껏 즐길 수 있었을 것입니다. 죄인들의 모습은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죄를 짓고 다같이 죄를 짓게 만들어야 그 동질감 속에서 안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같이 지각하고 다같이 낙제하고 다같이 어려움에 빠져야 다들 그렇게 산다고 생각하면서 안심할 수 있습니다. 더욱 의롭고 경건하며 신실한 사람은 그냥 내버려 둘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압박하고 괴롭히고 외면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사람들의 반응과 관점에 흔들리지 말고 하나님의 기준에 굳게 서야 하겠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척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고 그 하나님 앞에서 계속해서 새로운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면 진짜 바다 한 가운데로 들어가는 것이고 정말 산 꼭대기에 이르게 됩니다. 그 속에서 진정한 신앙의 풍성함이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영광 안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이를 위해서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그것은 그냥 하시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구체적이고 분명한 이유가 있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 분명한 이유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이었습니다. “[렘]1:19 그들이 너를 치나 너를 이기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할 것임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사람들은 예레미야를 칠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가 사람들로부터 전혀 공격을 받지 못하도록 하시지는 않았습니다. 공격은 받을 것이지만 그들이 이기지는 못할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이미 이런 저런 공격을 다 받았다면 그 다음에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것이 의미 있습니다. 사실 그것이 정말 중요한 부분입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할 것임이니라’ 하나님은 그를 구원하신다고 했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통해서 구원을 얻는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에서 우리는 사도들이 얼마나 놀라운 주님의 구원을 얻었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틀림없이 베드로를 옥에 가두었지만 옥문이 열리면서 그는 밖으로 나올 수 있었습니다. 바울에게 돌을 던져 죽였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돌 무더기 속에서 다시 일어났습니다. 바울을 죽이기 위해서 사람들이 몰려가서 그를 찾았지만 그는 형제들의 도움으로 광주리에 담겨 도망쳤습니다. 수많은 위협과 위기가 있었지만 그때마다 주의 사도들과 제자들과 성도들은 그 위기를 넘어설 수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어떤 경우는 빠져나가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야고보가 죽임을 당했고 베드로도 바울도 열 두 제자들도 모두 순교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또 다른 의미에서의 구원이었습니다. 그들은 천국으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든 구원의 일은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의지하고 순종하며 따라갈 때 일어납니다. 그것이 신앙의 발전과 성장을 가져옵니다. 베드로를 옥문 밖으로 인도할 때 베드로가 따라갔기 때문에 그는 나올 수 있었습니다. 바울이 돌에 맞을 때 그가 두 번 다시 복음과 상관없는 삶을 살려고 하지 않고 계속 해서 주님을 따라가고자 할 때 그는 사라지는 자가 되지 않았습니다. 광주리에 담겨 도망갈 때에도 그렇게 하려는 제자들에게 자신을 맡길 때 그는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신앙의 문제와 목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약점을 깨닫고 이해하고 따라가려고 할 때 우리 신앙은 성장합니다. 그 길이 바로 우리의 구원의 길입니다. 그런 구원의 길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생기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다면 그냥 내버려둘 것입니다. 그런 무기력하고 아무 변화 없는 삶을 사탄은 좋아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벗어버리기 위한 하나님의 길을 따라 나갈 때 우리에게는 진정한 구원이 이루어집니다. 바로 옛 모습으로부터 구원입니다. 새로운 모습으로의 구원이 형성됩니다. 자신이 천국에 가는 것이 구원의 전부는 아닙니다. 그렇게만 생각한다면 성경을 읽을 필요가 없겠지만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에 우리의 구원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 뜻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함께 하시며 어떻게 구원해 주시는가에 초점을 맞출 때 우리는 진정한 이 세상에서의 구원과 하나님 나라로의 구원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그들이 너를 이기지 못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예레미야가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원하시기 때문입니다.그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은 계속해서 신앙의 문제와 목표를 깨닫게 하십니다. 그 의미를 잘 이해하고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신앙의 문제와 목표를 해결하고자 하실 때 그분의 계획에 순종하면서 잘 따라 나가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럴 때 늘 주님과 동행하면서 그들이 너를 이기지 못하리라는 말씀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동행하심과 구원하심의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구성 1.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예레미야는 사람들 앞에서 두려워하였고 괴로워하였다. 2. 사람들은 그가 연약하고 심약하여 고분고분한 선지자가 되기를 바랬다. 3.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담대하게 전하게 하셨는데 그것은 함께 하셔서 그를 구원하심으로 이루어졌다. 4. 신앙의 문제와 목표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고 그것을 따를 때 진정한 구원이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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