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미움] 19시 1; 1-6 복 있는 사람과 악인의 바라는 것의 차이Loading the player...
19시 1; 1-6 복 있는 사람과 악인의 바라는 것의 차이_1
2021. 2. 7. 주. 주일오전.
*개요: 시편에서의 믿음의 소원, 3도덕적해석, 31미움, 5동행, 3시가서
[시]1:1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시]1: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시]1:3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시]1:4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시]1:5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시]1:6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이 달에 우리는 시편에서의 믿음의 소원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시편은 우리가 아는 대로 하나님께 대한 찬양과 기도를 담고 있습니다. 욥기는 논쟁과 쟁론이라면 시편은 찬양과 기도가 있습니다. 많은 부분을 다윗이 지었지만 그 외에도 족속이나 지파의 기도나 이스라엘의 기도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는 삶 속의 실제적인 어려움 속에서 느끼게 되는 희노애락의 감정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간절한 간구가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거룩한 찬양도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해 보면 시편은 인간의 인생을 보여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인생의 많은 순간 순간의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과 기도와 간구는 하나님과 연결되는 성도의 삶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도가 여러 가지 삶의 경험 속에서 시를 쓸 수도 있고 수필을 쓸 수도 있고 노래를 할 수도 있고 일기를 쓸 수도 있지만 그것이 신앙적이며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하는 것이라면 결국 그것이 찬양이 되고 기도가 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한 찬양과 기도가 한 사람 만의 것이 아니라 다른 성도들에게도 유익한 내용일 때 함께 부르는 찬양이 되고 함께 드리는 기도가 됩니다. 시편은 그렇게 하나님을 믿고 따르며 찾는 자들에게 모범이 되는 놀라운 찬양과 기도를 담고 있습니다. 시편의 내용 속에서 이러한 다양한 의미를 살펴보고 그 속에서 성도가 가질 수 있는 ‘믿음의 소원’은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그 믿음의 소원이 있을 때 성도는 진실하게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고 그 하나님을 통해서 새로운 힘을 공급받을 수 있습니다. 믿음의 소원은 자기의 원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원을 이루는 그리스도의 기도를 닮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편 기자가 단순히 자신의 안전과 평안 만을 바랬던 것이 아닙니다. 다윗을 비롯한 여러 다른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생각했습니다. 그 속에서 담대할 수 있었고 평안할 수 있었으며 인내할 수 있었고 소망할 수 있습니다. 그 모든 믿음의 행동들이 지금도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성도들에게도 모범이 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께 찬양과 기도를 드리는 시편의 본질이 오늘 1장에서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왜 성도는 그냥 삶을 살아가지 않고 하나님께 찬양과 기도를 드리면서 살아가는 것일까요? 왜 성도는 한숨만 쉬면서 살아가지 않고 하나님께 감사와 기쁨을 올리면서 살아가는 것일까요? 왜 성도는 늘 시간에 쫓기면서 살아가지 않고 설사 그렇다라도 하나님을 의지하며 간구하며 살아가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그가 하나님을 따라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1, 2절 말씀을 보십시오. “[시]1:1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시]1: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복 있는 사람이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않고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않고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는 이유는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고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그가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면서 주야로 묵상하는 이유는 본질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따라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분의 율법을 즐거워하고 묵상하는 것입니다. 유명한 아이돌에게는 그들을 따르는 팬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아이돌의 일거수 일투족에 집중합니다. 그래서 공연이나 행사나 다양한 표현에 관심을 갖고 그 모든 일에 참여하려고 합니다. 아이돌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늘 함께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분의 말씀과 뜻을 사랑합니다. 그분의 행하신 일과 이루신 일들을 사랑합니다. 그래서 그분의 길을 따라가고 그분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살아갑니다. 바로 성도들이 그러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사랑하고 그 말씀 대로 살아가고자 하며 그 말씀을 묵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자신을 따르는 자들을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이렇게 자신을 따르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부르기도 하시고 인도하시기도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자신을 따르는 자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들에게 복을 내리십니다. 그들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십니다. 늘 공급하시고 채우십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가 바로 3절입니다. “[시]1:3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그의 모습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 같습니다. 시냇가가 바로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성도가 그렇게 물을 공급받고 햇빛을 공급받으니까 열매를 맺고 잎사귀가 마르지 않고 하는 일이 다 형통한 것입니다. 시냇가에 심긴 나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니까 엉뚱한 일을 하지 않고 안좋은 일을 하지 않고 애초에 정직하고 성실한 일을 하니까 모든 일이 다 형통해지게 됩니다. 시편은 바로 이와 같은 자들의 찬양과 고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가뭄에도 어떻게 열매를 맺는지 뜨거운 여름에도 어떻게 잎사귀가 마르지 않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시편 속에 나타난 성도의 기도와 간구의 모습입니다. 그 속에 하나님과 함께 있기를 바라고 하나님을 따라가기를 바라니까 귀한 열매를 거두게 됩니다. 나무는 영원토록 지속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어진 시간 동안 어떤 열매를 맺느냐가 중요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은 유한합니다. 시간은 제한적입니다. 기회는 한정적입니다. 있는 시간과 기회 속에서 열매를 맺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을 따라야 열매를 맺습니다. 무엇이 진짜 열매였는가를 생각해 보면 하나님을 따랐는가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따라갈 때에 삶의 진정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욥도 그의 진정한 열매는 아내가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할 때 ‘하나님께 복도 받았으니 화도 받지 않겠는가’한 것이 그의 열매였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바라고 의지해야만 합니다. 그게 아니라면 어떨까요? 악인의 모습을 보십시오. 하나님을 미워하고 거부하며 싫어할 때 악인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시]1:4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시]1:5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악인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따르고 의지하고 하나님 안에서 열매 맺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바람에 나는 겨처럼 다 날라가 버립니다.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의지하는 것이 아니니까 바람이 불면 한번에 사라집니다. 악인이 원하는 것이 자신의 꾀를 내서 이기고 악한 길을 통해서 승리하고 오만한 자들의 자리를 통해서 우월하게 되기를 바라니까 그것이 옳고 그른 것을 구별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지도 않습니다.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날리는 것이 아니라 바람을 이용해서 날라가는 것입니다. 가뜩이나 울고 싶은 데 뺨 때려 주는 격입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바람의 겨처럼 떠나가 버릴 것입니다. 결국은 심판을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받게 되며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합니다. 악인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따라 간 것인데 그것은 의인들의 원하는 것을 사실 그들은 싫어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를 악인들은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삶 속에서 추구하는 것이 악인의 것이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악인의 바라는 것을 함께 바래서는 안됩니다. 그것이 복 있는 사람의 목표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추구하는 것과 얻고자 하는 바에 대한 열정이 없는 자들입니다. 그러니까 복 있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얼마 전 제가 햄스터 케이지를 정리해 주려고 햄스터 집과 놀이기구를 들어 보았는데 그 밑에서 햄스터가 그동안 쟁여 놓았던 먹이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매번 새로운 먹이를 주는데도 햄스터는 항상 그렇게 먹이통의 먹이를 자기가 원하는 곳에 쟁여 놓고 먹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 먹이는 얼마든지 줄 수 있으니까 자리를 정돈하려면 지저분해서 다 모아서 버리고 다시 새 먹이를 주었습니다. 햄스터가 애써서 모으기는 했지만 그때 그때 먹지 않았다면 때가 되면 다 버릴 수 밖에 없습니다. 더 좋은 것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늘 하나님을 따라갈 때 얻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주는 자이시고 가져가는 자이십니다. 복도 주시지만 화도 주십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얻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사용되는 것이지 평생 먹고 살라고 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깨달으면 주신 시간과 능력과 체력과 달란트를 올바르게 사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모르면 죽을 때까지 바쁘게만 살다가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마지막 6절을 보십시오. “[시]1:6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의인들의 삶은 힘들고 괴롭고 두렵고 슬퍼도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삶이었습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악인들의 길은 어떻게 살았든 전부 망하는 삶입니다. 그 힘들고 괴롭고 두렵고 슬픔 속에서 더 큰 악으로 빠져들어갔기 때문입니다. 시편의 고백과 증거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받아주시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럴 때 우리의 한 순간 한 순간이 가치있고 보람되며 의미있고 소중한 시간들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복 있는 사람이 되어서 항상 하나님을 모셔 섬기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구성 1. 복 있는 자들은 악인들의 길에 서는 것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자들이다. 2. 그들은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항상 모든 일에 지혜롭고 온전하게 행한다. 3. 반대로 악인들은 자기 중심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심판 받을 일을 하고 그런 일로 인해서 실족하게 된다. 4. 우리는 복 있는 자들과 악인의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하나님을 사모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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