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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은혜] 42눅15;25-32 내것이 다 네것이로다



42눅15;25-32 내것이 다 네것이로다



* 2008-02-10, 주일오전, 1교회경험

과거에 죄많았던 사람이 은혜받은 후에 돌이켜 하나님의 일에 열심을 내는 모습을 종종 봅니다. 그 런 사람은 과거에 죄많고 괴로움 많았던 사람이었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그 죄가 사함을 받고 혹은 그 괴로움을 씻음받고나서 감사와 감격속에서 하나님께 헌신과 충성을 다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회복은 과거만의 일이 아니라 지금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또한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도 과거에는 주님을 훼방하고 핍박하며 멸시하던 자였지만 주님을 만나고 나서 그분의 놀라우신 사랑과 계획과 영광을 경험하면서 앞으로는 그분의 나라를 위해 살기로 다짐합니다. 이것은 은혜라고 밖에 설명되어질 수가 없습니다. 그럴 만한 아무런 가치와 유익이 없는 우리들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크신 은혜 속에서 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허락하셨던 것입니다.

이는 마치 아버지를 떠났던 탕자가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것과 같습니다. 그 탕자는 집에 돌아올 때 아들이라 인정함을 포기하고 품군 중의 하나로 여김을 받는 것을 각오하였지만 아버지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방탕하였으나 회개하고 돌아온 아들을 보고 불쌍히 여겼고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겼습니다. 그리고 그 돌아온 아들로 인하여 잔치를 벌였습니다.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아들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만큼 아버지가 그 방탕했던 아들을 사랑했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주님도 우리를 그렇게 대하십니다. 그래서 주님의 은혜를 사모하며 나아오는 우리들에게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며 잔치를 벌이십니다. 그만큼 우리가 돌아오기를 간절히 원하셨고 그렇게 돌아왔을 때 너무나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유에서라도 우리는 반드시 우리의 아버지되신 하나님께 돌아와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런 경험이 없는 큰 아들과 같다면 어떨까요? 한번도 큰 죄를 저지른 적이 없는 것 같고 한번도 교회밖을 나선 적이 없는 것 같고 한번도 하나님의 뜻을 크게 어겨본 적이 없는 고분고분하고 순종적이었던 자들이라면 어떨까요?
우리가 은혜를 체험하지 못하는 이유는 어떤 면에서 아직 회개할 준비가 되지 않은 탕자의 모습이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지만 또 다른 이유로서 우리의 모습이 항상 아버지의 집에서 수고하고 봉사하고 있었던 큰아들의 모습이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의 마음은 울고 불고 아버지에게 와서 회개하는 동생을 냉정하게 바라볼 것입니다. 또한 그런 동생을 아버지가 너무 지나치게 환대하며 잔치를 벌이는 모습은 분개를 일으키게 만들 것입니다. 그래서 큰 아들은 분노했습니다. 동생을 위한 잔치가 벌어지고 있음을 알았을 때 그는 소외감을 느꼈고 커다란 상실감을 느꼈습니다. 아무래도 자신의 존재는 너무나 보잘것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불공정하게 대우하시는 아버지에 대해서 분노를 표출했습니다. 이것이 큰 아들의 마음이었고 때로 우리가 느끼는 마음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죽은 아들이 다시 살아나서 기쁘다는 아버지의 마음에 심드렁합니다. 우리는 잃었다가 다시 얻어서 즐거워하고 기뻐한다고 하더라도 아버지의 기쁨에 무덤덤합니다. 그리고 죽은 자녀를 다시 살리도록 잃어버린 자녀를 다시 얻을 수 있도록 노력하라는 아버지의 말씀에 아무런 반응이 없습니다. 우리는 아버지가 아들을 다시 얻고 찾은 즐거움과 기쁨이나 아들을 잃어버리고 갖게된 괴로움과 안타까움에 아무런 연민조차 느끼지 않습니다. 도대체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왜 잃어버린 자녀들과 죽어버린 자녀들에 대해 이토록 무관심할 까요? 우리가 찾는 것은 오직 새롭게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자녀들에게만 관심이 있지 잃어버린 자녀들이나 죽어버린 자녀들에 대해서는 철저히 무관심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를 생각해 보기 위해서 다른 장면을 한번 생각해 봅시다. 아버지의 자녀를 잃은 슬픔에 대해서 눈하나 깜짝하지 않는 자녀들의 모습이라는 측면에서 우리는 요셉의 형들에게서 이와 동일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요셉이 악한 짐승이 찢겨 죽었다는 말을 듣고 오열하며 괴로와하는 아버지 야곱에 대해서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아버지의 슬픔과 괴로움을 비웃었습니다. 아버지의 안타까움과 괴로움에 대해서 그들은 눈물 한방울 흘리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그 이유는 그들이 아들을 죽었기 때문입니다. 짐승에게 물려 죽었다는 것은 그들이 만들어낸 거짓말이었습니다. 사실은 그들이 미디안 상인들에게 팔아넘겼습니다. 자신들의 유익에 따라 눈엣가시와 같았던 존재인 요셉을 없애버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앞에서 그들은 아버지의 슬픔에 전혀 동참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사실 기뻐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의 모습을 요셉의 형들에 비추어봅니다. 우리는 그들과 같습니까, 다릅니까? 우리는 그들과 똑같습니까, 아니면 최소한 그들과는 다릅니까? 우리가 그들과 같은지 다른지의 최소한의 기준은 아버지의 슬픔에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과 달라서 아버지 하나님의 기쁨과 즐거움에 동참하는 자입니까, 아니면 아버지 하나님의 기쁨과 즐거움에 냉담한 자입니까? 또한 자녀를 잃어버린 아버지의 고통과 괴로움에 동참하는 자입니까, 아니면 아버지의 괴로움을 외면하는 자입니까?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기쁨과 즐거움, 그리고 고통과 괴로움에 동참하는 자라면 우리는 요셉의 형들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는다면 우리는 요셉의 형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다시 한번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요셉의 형들과는 달라서 아버지의 슬픔, 하나님의 슬픔에 동참할 수 있다면 그래서 정말 구원받아야 할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와 구원을 얻고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게 되기를 원한다고 한다면 우리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이 큰 아들이 백번 양보를 해서 작은 아들이 돌아오고 아버지가 돌아온 아들을 기뻐하는 것을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이 큰 아들에게 있는 문제는 무엇입니까?
여기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는 동생에 대한 시각의 문제이며 다른 하나는 자기 자신에 대한 정체성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문제는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의 말을 다시 한번 들어봅니다.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는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순서적으로는 첫 번째가 자기 자신의 문제이고 두 번째가 동생의 문제이지만 순서를 바꾸어서 첫 번째로 동생에 대한 문제를 먼저 보고 두 번째로 자신의 문제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 번째로 형은 동생을 아주 안좋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동생을 가리켜 그는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재산을 축낸 자요 향락과 쾌락 속에서 자신의 삶을 황폐화시켰던 자였습니다. 그리고 큰 아들에게는 바로 그것이 문제였습니다. 왜 그런 아들을 다시 받아주며 이전에 행한 모든 악한 일에 대해서 대가를 치르게 하지 않느냐는 것이 불만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바로 그런 아들을 위해 살진 송아지를 잡았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 아들이 돌아왔을 때 품군 중의 하나처럼 취급했으면 그의 마음은 편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해온 모든 수고와 노력이 의미를 가졌을 것입니다. 작은 아들은 하나님없이 편하고 즐겁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살다가 하나님께로 돌아왔는데 만약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전의 지위를 한번에 회복해버린다면 그일은 큰아들에게는 평생 흔들림없이 수고하고 봉사한 그의 처지와는 너무나 비교가 되게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두 번째 문제는 자기 자신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첫 번째 문제와도 연결이 되는 것인데 그 자신은 여러 해 아버지의 명을 어긴 적이 없었는데 아버지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서 즐기게 했던 적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그에게는 못내 섭섭한 일이었습니다. 왜 작은 아들에게는 살찐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베푸시면서 자기에게는 염소 새끼 한 마리 잡아주신 적이 없었을까? 작은 아들이 돌아온 그 순간에 큰 아들에게는 심각한 정체성의 혼란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나는 무엇인가? 나는 왜 이런 대접 밖에는 받지 못하는 것인가? 이것이 바로 큰 아들의 불만이었습니다.

이 문제는 우리에게도 마찬가지 입니다. 회개한 자들의 이전 과거의 문제에 대해서 우리는 그리 관대하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교회를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우리는 냉담합니다. 행한 대로 갚으리라는 원칙에 따라 다시 돌아왔을 때에도 품군부터 시작해야만 한다는 원칙 같은 것이 있습니다. 혹은 한번 떠나면 다시는 돌아와서는 안된다는 마음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많은 자들에 대한 경시와 멀리함이 있습니다. 비록 다시 돌아오고자 한다 하더라도 그 일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닌 것입니다. 옷을 입히고 가락지를 끼우고 신을 벗기는 일이란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일입니다.
두 번째 문제는 더더욱 심각합니다. 우리는 새로운 사람들이 오면 심각한 정체성의 상실을 느낍니다. 기가 죽고 어깨를 펴지 못하며 더욱 어려운 사람들이 되어갑니다. 스스로 숨어들어가는 모습 속에서 우리의 존재의미는 과연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혼란 속에 빠집니다. 그러다가 상심하는 일이 생기면 그냥 스스로 자녀됨을 포기해버립니다. 스스로의 정체성이 없기 때문에 쉽게 실족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아버지의 타이름과 설득을 들어보십시오. 아버지는 어떻게 큰 아들을 위로하고 돌이키게 했는지를 보십시오.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것이로되”
아버지는 큰 아들에게 말합니다. 내것이 다 네것이다. 큰 아들은 항상 아버지와 함께 있으면서 일을 하였고 그 댓가는 염소새끼가 아닙니다. 그 댓가는 모든 것이었습니다. 큰 아들은 자신에게 염소 새끼 한 마리 주시지 않았다고 투덜대었지만 그것은 너무나 어리석은 생각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가진 것이 모두 자신의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염소새끼로 잔치를 벌이지 않은 것은 그럴 수 없어서가 아니라 큰 아들이 자신이 그러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 작은 아들에 대한 환대는 오직 한 가지 이유때문입니다. 그것은 그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자였기 때문입니다. 또한 잃었다가 다시 찾은 아이였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그의 귀환을 그토록 기뻐했던 것입니다. 큰 아들은 작은 아들이 그저 창기와 함께 자신을 즐기다가 온 줄로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에게 있어서 작은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자였습니다. 잃었다가 다시 찾은 자였습니다. 그러니 그 기쁨과 즐거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죄많은 자들의 방탕한 삶을 그저 자신을 즐겼겠거니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잃어버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다시 찾은 것입니다. 이 관점을 깨달을 때 우리는 큰 아들이 가졌던 작은 아들에 대한 미움과 분노를 다 씻을 수 있습니다. 또한 꼭 씻어야만 합니다. 그 삶이란 너무나 헛되고 무익한 삶이었고 그 삶의 대가는 탕자 자신이 이미 충분히 치루었습니다. 이제 그는 다시 살아날 수 있고 다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런 순간에 송아지 한마리는 그를 위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기쁨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또한 그 기쁨에 동참하고자 하는 모든 자들을 위한 것입니다. 큰 아들은 이런 작고 사소한 일에 어떠한 섭섭함이나 연약함도 가져서는 안됩니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모든 것을 받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먼저된 우리는 이미 모든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일에 이미 배가 불러 있습니다. 더 이상 끊임없이 배고파하고 더 추구하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것이 다 네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은혜는 바로 먼저된 우리의 것입니다.
돌이켜 보면 항상 무엇인가를 새롭게 하려고 하면 기존의 성도들의 섭섭함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것이 증폭이 되어 항상 교회를 떠나는 단초를 일으키곤 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이러한 연약함에서 자유롭게 되어 하나님의 교회를 지켜나가는 자들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계속적으로 새로운 사람들을 모아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는 자들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럴 때에 진정으로 기쁜 마음으로 아버지의 기쁨에 동참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그 기쁨에 등을 돌리는 자들이 아니라 아버지의 기쁨에 진정으로 기뻐하며 함께 즐거워할 수 있는 우리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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