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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은혜] 43요14;6-11 예수님은 하나님을 나타내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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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요14;6-11 예수님은 하나님을 나타내신다_1



2010.12.5. 주일오전예배

2010년에 드디어 우리는 성탄절이 있는 12월을 맞이하였습니다. 이 12월을 맞이하기까지에는 지난 1월부터 11월까지의 인내와 기다림이 있었습니다. 12월은 결코 1월부터 11월이 없었다면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기다림과 간구속에서 12월 한 해의 마지막 달을 맞이하였고 그 마지막 달에 우리는 성탄절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성탄의 의미는 우리 모두가 다 잘 아는 대로 예수님의 오심이라는 의미를 갖습니다. 말 그대로 성스러울 성과 태어날 탄, 그리고 마디 절로 이루어진 성탄절은 성인의 탄생을 축하하는 명절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는 것이지요. 쉽게 말하면 예수님의 생일입니다. 늘 우리가 성탄절에 예수님의 생일을 축하합니다 하면서 케익을 자르는 것처럼 말입니다. 성탄절도 역시 예수님에 대한 오랜 기다림 이후에 다가온 놀라운 하나님의 선물인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사람의 생일을 지켜주면서 그 사람을 한번 더 기억하는 것처럼, 예수님의 생일을 생각하는 것은 예수님을 한번 더 생각해 보는 기회를 갖습니다. 우리가 일년 내내 기다렸던 예수님은 어떤 분인가요? 우리를 일년 내내 붙들어 주셨던 예수님은 또 어떤 분인가요? 그분에 대해서 우리는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분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느냐고 묻는 질문에 답하기란 너무 막막할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모두에게 각각의 특별한 의미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구원자이기도 하시고, 대속자이기도 하시며, 친구이기도 하고, 스승이자 선생님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각 사람은 자기가 느낀 대로 예수님을 이렇게 혹은 저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켜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은 자신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길이다, 예수님이 진리다, 예수님이 생명이다, 표현은 멋있지만 언뜻 이해되지는 않습니다. 무슨 길이라는 것일까요? 어떤 진리일까요? 왜 생명이라고 하신 걸까요? 여러분은 이해가 딱 되십니까?

어느 철학도가 인생은 무엇일까를 늘 고민했다고 합니다. 삶은 무엇일까? 그는 그것에 대한 답을 얻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어느날 기차를 타고 여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기차 속에서 삶이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얻었습니다. 어떻게 그 답을 얻었는지 아십니까? 기차내 판매원이 음식물을 가지고 오면서 이렇게 외쳤기 때문입니다. ‘삶은 계란이오!’바로 삶은 계란이라는 깨달음을 얻은 것이지요.

우리가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는 말을 수없이 반복하지만 정작 그 의미를 모른다면 삶은 계란이오라는 수준 밖에는 안될 것입니다. 그 진정한 의미를 알아야 예수님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할 때에 마음이 뜨거워지고 결심이 굳게 서며 더욱 예수님의 중요성을 알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그 의미를 설명해 주십니다. 주님은 무슨 선문답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알 수 없는 오묘한 말을 던져주면서 알아서 해석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그 말을 설명하시고 또 설명하십니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이해해서 다른 사람에게도 설명할 수 있을 정도로 알려주십니다.

그래서 곧 이어 그 의미를 풀어주십니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바로 이것이 예수님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의미를 알기 위한 열쇠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에게로 가는 길입니다. 그 길을 통해서 아버지에게로 갈 때 유일한 진리가 되십니다. 그리고 그 진리를 지지하는 생명을 공급해 주십니다. 우리가 아버지에게로 가는 것이 구원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아버지에게로 가야 합니다. 아버지에게로 갈 때 그곳에 거처가 있고 그곳에 모든 희락이 있습니다. 예수님 자신도 아버지에게로 가고자 하셨고 우리도 아버지에게로 가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구원자가 되시는 이유는 바로 아버지에게로 가는 길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과 하나님의 관계에 대해서 뭔가 커다란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제가 만났던 어떤 성도님은 예수님은 믿는데 하나님은 안믿는다고 했습니다. 왜 그러느냐고 하니까 구약의 하나님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신약의 예수님은 사랑이 많고 희생적이어서 마음에 들고 좋지만 구약에서의 하나님은 너무나 무자비하고 가혹한 것 같다는 것이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이와 정 반대의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능력이 많고 소유도 많고 모든 것을 가지고 계셔서 좋지만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셔야 하고 희생하셔야 하고 연약해보이고 그래서 별로 좋지 않다고 합니다. 또 믿을 수가 없다고 합니다. 이렇게 예수님에 대해서 의심을 가지고 있거나 혹은 하나님에 대해서 의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혹시 그런 사람이 여러분 중에 있지는 않습니까?

이러한 오해는 가능한 빨리 해결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는 결코 한분을 무시한다고 해서 무시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목적지와 그곳으로 가는 길의 관계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에게 제주도에 아주 멋진 별장이 있다고 해보십시오. 그리고 그곳에 가는 수단은 배로 가거나 비행기를 타고 가는 두 가지 방법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배를 두려워하거나 비행기를 타는 것을 무서워한다면 제주도에 갈 수 있을까요? 그 별장의 멋진 시설을 이용할 수 있을까요? 그림의 떡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배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며 비행기의 두려움을 이겨내야 합니다. 그러면 제주도에 있는 멋진 별장에 도착해서 즐거운 경험을 누릴 수 있습니다.

제가 생전처음으로 비행기를 타본 때는 신혼여행으로 제주도를 갔을 때였습니다. 말로만 듣던 비행기와 말로만 듣던 제주도를 동시에 경험해 보게 되는 때였습니다. 이 두 가지는 정말 놀라운 경험이었습니다. 눈깜짝할 사이에 하늘로 치솟는 비행기의 솟구침은 감격적이었고, 그리고 여행기간동안 돌아다닌 제주도는 아름다웠습니다. 비행기를 두려워했다면 제주도를 우습게 여겼다면 이 모든 것은 전혀 누리지 못했을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제주도보다도 더 멀리 아름다운 신혼여행지를 찾아 떠나기도 합니다. 어떤 곳은 비행기를 몇 번씩 갈아타면서 가기도 합니다. 그랬던 분들이 여기에도 있지 않습니까? 그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왜 그렇게 고생을 하면서 돌아다녔나요? 길과 목적지는 하나입니다. 목적지와 길은 뗄래야 뗄 수가 없습니다. 그 길을 가다보면 반드시 정해진 목적지에 도달하게 됩니다. 또한 그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길을 거쳐가야 합니다. 결코 목적지 따로 길 따로 생각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 가야 하기 때문에 예수님이 필요한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을 따라가다 보면 반드시 하나님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결코 이 둘을 뗄래야 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 되시고, 그 길이 옳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유일한 진리가 되시며, 그 길을 갈 때에 필요한 생명을 공급해 주시는 분이 되십니다. 예수님이 공급하시는 생명이 아니고서는 결코 하나님께로 갈 수가 없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우리가 만나게 될 하나님은 우주 너머에 계십니다. 빛보다 더 빠른 속도로 나가서 우주를 넘어 가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생명이 필요합니다. 그 생명을 받고자 할 때에 예수님은 기쁘게 그 생명을 허락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생명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에게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있다보면 어느 새 하나님 아버지에게로 도달해 있게 됩니다. 마치 비행기를 타고 있다 보면 어느 새 제주도에 도착해 있는 것처럼 말이지요.

이것을 이해했으면 예수님과 하나님의 관계를 깨달았을 텐데 성질급한 빌립은 예수님이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신다는 말씀을 들으면서 어서 빨리 하나님을 보고 싶어졌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재촉했습니다.
“8.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예수님 안에 있으면 다 때가 되어 하나님 아버지를 보게 될 텐데 빌립은 지금 당장 아버지를 보여달라고 하였습니다. 비행기를 타고 있으니 지금 당장 제주도를 보여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길일 뿐인데 목적지를 보여달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얼마나 어리석은 질문인지 모릅니다. 우물에서 숭늉을 찾는 얼마나 성질급한 마음인지 모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그냥 기다려라 기다리면 보게 될 것이다 하면 되었을 것도 같은데 주님은 너무나 충격적인 말씀을 해주십니다. 저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전율이 느껴졌습니다. 소름이 끼치는 것 같기도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9.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예수님은 지금 나를 본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다라고 말하셨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아버지란 하나의 목적지로서 나중에 보게 될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게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대답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때까지 기다릴 필요 없이 지금 너희가 아버지를 보았느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모습 속에 아버지의 모습이 있는 것입니다. 충격적이지 않습니까? 엄청난 반전이지 않습니까?
그 말이 잘 이해가 안되신다면 제가 짧은 이야기를 하나 들려드릴 테니 다음 이야기에서 그 반전을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한 사업가가 어촌으로 여행을 왔다가 자기 배 옆에 드러누워 콧 노래를 부르며 한가하게 쉬고 있는 어부를 보고 몹시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 고기잡이를 안나가십니까?”
“오늘 몫은 넉넉히 잡아 놓았거든요.”
“오늘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이 잡아 놓으면 좋지 않겠소?”
“그래서 뭘 하게요?”
“그러면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지요. 그 돈으로 당신 배에 알맞은 발동기를 달고 더 멀리 더 깊은 데로 가서 더 많은 고기를 잡을 수 있지 않겠소. 그러면 더 많은 돈을 벌어서 나일론 그물도 새로 사고, 그래서 더 많은 고기를 잡고, 그만큼 돈도 더 많이 벌 수 있는 거지요.”
“그리고 그 다음엔 뭘 합니까?”
“그렇게 되면 얼마 안 가서 큰 배를 사서 선주가 될 수도 있고…. 그렇게 나가다보면 어쩌면 거대한 어선을 많이 거느린 큰 부자가 될 수 있는 것 아니겠소?”
“그리고 그 다음엔 뭘 합니까?”
“그렇게 되면 편안히 앉아 쉬면서 삶을 넉넉히 즐길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당신은 지금 내가 무엇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게 대답한 어부는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이해하시겠습니까? 그 어부는 바로 부자 사업가가 말한 거대한 어선을 많이 거느린 큰 부자였던 것입니다. 그 사업가는 사실 바로 자신 앞에 큰 부자가 있음을 몰라보았던 것 뿐이구요. 예수님을 길이라고만 생각하고 예수님을 진리라고만 생각하고 예수님을 생명이라고만 생각했지 예수님이 사실 하나님 이시라는 생각은 못해보았던 것입니다. 성경을 구약과 신약과 구분하고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예수님이라고 딱 잘라 구분해 놓은 것은 우리 자신일 뿐입니다. 사실은 구약의 하나님이 신약의 예수님이며 신약의 예수님이 구약의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과 예수님이 사실은 한분이냐 라고 말한다면 그건 아닙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예수님은 예수님입니다. 하나님은 아버지고 그 아들은 예수님입니다. 이것은 분명합니다. 분명히 두 분은 두 분입니다. 하지만 두 분은 동시에 한 분입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그걸 이해못하는 것이 당연하지요. 왜냐하면 예수님과 하나님의 관계는 뗄래야 뗄수 없는 완전한 관계라서 둘이 되기도 하고 하나가 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의 상식과 논리적인 법칙을 뛰어넘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삼위일체라고 하는데 간단히 말하면 성령님까지 합해서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 이 세 분이 사실은 한분이고 그 한분이 알고보면 세 분이시다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조금 어려운 설명을 곁들어서 본체는 하나이시나 위격은 셋이라고 신앙문답에서는 말하지만 어차피 이렇게 해도 이해안되고 저렇게 해도 이해안되는 내용입니다. 본질적으로 우리의 이해를 넘어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삼위일체에 대한 온전한 이해는 이것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길이면서 동시에 목적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나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보았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맞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충격입니다. 기다렸다가 하나님을 보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과 나누면서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미 그 길에 들어섰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을 만나고 있습니다. 그 진리를 따른다는 자체가 하나님을 알아가고 있습니다. 그 생명을 받아들인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께 나아온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앞으로 도달할 목적지가 아니라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이미 도달한 목적지입니다. 마치 제가 갔던 제주도 여행이 즐거웠던 이유는 그 여행이 바로 신혼여행이었고 그래서 저의 옆에는 방금 결혼한 신부가 함께 하고 있었기 때문인 것처럼 말입니다.

그 놀라운 의미를 설명해주시면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11.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우리에게 아버지 하나님을 보여주시는 그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우리에게 놀라우신 하나님의 사랑을 전해주시는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우리에게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구원을 허락해주시는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는 이미 목적지인 하나님 안에 도착한 것입니다.

성탄절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구세군은 이미 자선냄비를 내걸었고 저녁에는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한껏 돋우는 멋진 장식들이 설치되었습니다. 우리도 다음 주에는 트리를 만들면서 성탄절을 기다릴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속에서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우리가 이미 하나님 안에 있음을 믿으십시오. 벌써부터 그 길에 들어서서 목적지에 도달했음을 믿으십시오. 구원은 시작되었고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는 넘치고 있습니다. 나중에 받으려고 하지 마시고 지금 당장 그 은혜를 받으십시오. 주님은 여러분을 사랑하고 계십니다. 우리에 대한 놀라운 계획을 마련해 놓으셨습니다. 여러분이 기다리는 그 무엇인가는 지금 예수님과 함께 있음을 깨달을때 이미 이루어져 있는 것입니다.

주님을 믿으면서 다가오는 성탄에 예수님을 더욱 의지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우리에게 하나님을 보여주시는 그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예수님의 놀라우신 은혜를 이번 성탄절에 만끽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개요 {4서신서} <1적용> <2시점> [2분류-진로]~[5은혜-동행]
1. 성탄절이 다가옴을 통해 우리는 구원의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시는 예수님을 생각합니다.
2. 예수님이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셔서 아버지께로 우리를 인도하실 수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3. 그 이유는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행하셔서 하나님을 나타내시기 때문입니다.
4. 우리는 하나님과 예수님이 행하신 일을 통해서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을 기억하고 실천하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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