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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은혜] 11왕상17;17-21 내죄를 생각나게 하심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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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왕상17;17-21 내죄를 생각나게 하심입니까?_1



2010.9.12.주일오전

1. 사람들은 몸의 괴로움과 그로 인한 과정들 속에서 두려워하고 분노한다.

다른 나라에서는 열악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잘되고 있는 정책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세계 다른 나라 사람들이 본받고 싶어 하는 정책들이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는 ‘건강’에 관한 것입니다. 예전에는 의료 기관도 열악하고 건강상식도 없어서 많은 병이 존재했었지만 요즈음 곳곳에 많은 의료기관들이 들어서 있고 다양한 약들과 여러가지 의료환경들이 잘 되어있어서 손쉽게 치료를 받을 수 있습니다. 또한 국민건강보험이라는 아주 좋은 제도가 있어서 치료비에 큰 부담을 갖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모로 우리는 매우 건강한 사회제도 속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풍요로움 속에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여전히 많은 질병이 있습니다. 점차 건강한 사회가 형성이 되어서 전혀 건강때문에 고통받는 사람들이 없을 것 같아도 여전히 몸이 아프고 여전히 심각한 질병이 있으며 여전히 치명적인 고통에 시달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병의 존재와 그로 인한 치료의 고통 때문에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힘든 시간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얼마전, 항암치료를 받는 사람들의 부작용에 대해서 텔레비전에서 방영하는 내용을 보게 되었습니다. 아주 간단한 암이라도 항암치료가 시작되면 항암제는 암세포만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정상세포도 함께 파괴시키기 때문에 여러가지 부작용을 일으킨다고 합니다. 탈모증세나 구토증세, 음식물을 섭취하기 어려운 증상, 또는 무기력함이나 몸의 피로함 등, 여러 가지 부작용들이 나타난다고 합니다. 아무리 의학이 발전되었다고는 하지만 병을 치료하기 위한 과정 만큼은 여전히 어렵고 괴로운 시간들입니다.

또한 병원에서도 치료과정의 고단함과 괴로움 때문에 계속해서 치료받는 것을 중간에 포기하거나 아니면 치료를 받기는 하지만 끊임없이 절망하며 낙심하며 괴로워하며 두려워하기도 합니다. 완치되지 않을까 걱정하기도 하고 치료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 낙심하기도 합니다. 무엇보다도 치료과정의 괴로움은 그로 인해서 더 나은 결과가 보장된다 하더라도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인 것입니다.
이럴 때 환자와 동일하게 마음고생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바로 보호자들입니다. 환자가 치료를 거부하거나 치료중에 힘들어하거나 괴로워할 때에는 옆에서 지켜보는 보호자들의 마음은 메어집니다. 조금이라도 덜 괴롭고 조금이라도 덜 불편하게 해주고 싶지만 그렇게 해주지 못할 때에 보호자들이 느끼는 괴로움은 이만저만한 것이 아닙니다. 환자는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두려워하거나 화를 냅니다. 뿐만 아니라 보호자도 역시 어려움이 있을 때에 두려워하거나 화를 냅니다. 환자의 괴로워하는 모습을 옆에서 바라볼 때의 마음의 괴로움은 환자가 느끼는 몸이 불편하고 직접적인 고통이 찾아올 때의 괴로움과 동일합니다. 그래서 환자나 보호자 모두 두려움과 분노의 감정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2. 사르밧과부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로 인해서 두려워하며 분노하였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나오는 사르밧 과부도 역시 그러한 고통과 괴로움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의 아들은 병이 들었습니다. 그 때문에 증세가 매우 위독하였습니다. 밤새 간호를 하였을 것입니다. 아들은 밤새 뒤척이며 괴로워했을 것입니다. 그 모습을 옆에서 보고 있는 어머니의 마음은 찢어졌을 것입니다. 남편을 잃고 아들 하나를 홀로 키우고 있었는데 그 아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본다는 것은 너무나 괴로운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온갖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아들은 결국 숨을 거두었습니다. 약 한번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허망하게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이 여인은 너무나 괴롭고 분통했습니다. 너무나 두렵고 화가났습니다. 왜 이런 일이 나와 내 아들에게 임하는가! 폭발하는 그 마음은 그 집에 함께 있던 엘리야에게 향했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엘리야에게 하소연하였습니다.

“18. 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이 나로 더불어 무슨 상관이 있기로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또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내게 오셨나이까”

자신의 아들이 그렇게 병으로 죽어버린 이 모든 상황은 엘리야가 그 집에 들어오고 나서 일어난 일입니다. 그러니 자연히 화살이 엘리야에게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엘리야가 자신의 집으로 왔기에 아들이 죽었고 그렇게 아들이 죽은 것은 엘리야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말합니다.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죄를 들추어 내어서 그 죄값을 받게 하려고 이런 일이 일어나게 한 것이냐고 묻습니다. 그리고 여인은 말합니다. ‘또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그 나의 죄값으로 당신이 원한 것은 우리 아들을 죽이는 것이 아니었냐고 따집니다. 그런 일들을 위해서 자신의 집에 왔고 그래서 나의 아들이 죽은 것이 아니냐고 항의합니다. 이 여인은 분노하였고 두려워하였습니다. 자신의 잊어버린 죄때문에 두려워하였고 그렇다고 해서 아들을 죽게 만든 엘리야에 대해서 분노했습니다.

얼마 전 이 여인과 아들은 그 땅에 임한 심각한 기근으로 인해서 모든 양식이 다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양식을 가지고 마지막 식사를 한 뒤에 굶어 죽을 요량으로 살았던 자들입니다. 하지만 옐리야가 찾아와서 그 마지막 양식을 달라고 하였고 그에게 자신의 마지막 양식을 베풂으로써 오히려 통에 가루가 다하지 않고 병에 기름이 다하지 않는 신기한 기적의 역사를 경험했었습니다. 그러한 기적을 경험하였지만 이 여인은 지금 당장 아들이 죽었을 때에 그 모든 일들을 다 잊어버렸습니다. 그건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당장 아들이 죽은 것이 더 비참하고 원통한 일이었습니다. 차라리 그때 죽는 것이 더 나았지 이렇게 아들이 자신 앞에서 죽는 것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원통한 일이었던 것입니다.


3. 하나님은 과부의 아들을 살려주셨고 그러기 위해서 엘리야를 보내주셨다.

그렇다면 정말 왜 하나님은 엘리야를 이 사르밧에 사는 과부에게 보내셨을까요? 왜 그의 아들은 엘리야가 그 집에 있을 때에 죽었을까요? 정말 그 여인의 말처럼 이일은 그녀의 죄를 생각나게 하기 위함이었을까요? 그 죄를 생각나게 할 뿐만 아니라 그 죄에 대한 댓가로 아들을 죽이시기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이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래서 엘리야를 그녀에게로 보내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는 세 가지 목적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 엘리야를 그녀에게로 보내신 이유는 그로부터 엘리야가 도움을 받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17장 9절을 보십시오.

“9 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유하라 내가 그곳 과부에게 명하여 너를 공궤하게 하였느니라”

그녀의 죄를 깨닫게 하고 그녀의 아들을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녀로 통해서 공궤함을 받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로 인해서 엘리야가 먹고 살수 있었고 뿐만 아니라 사르밧 과부와 아들도 먹고 살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엘리야를 그녀에게로 보내신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일 후에 아들이 죽었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오해하는 것입니다. 왜 이런 안좋은 일이 일어나는 것인가? 먹고 살게 된 것은 좋았지만 왜 그다음에 죽는 일이 일어나는가? 그런 생각으로 오해하는 것입니다. 아들이 죽은 이유에 대해서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17. 이 일 후에 그 집 주모 되는 여인의 아들이 병들어 증세가 심히 위중하다가 숨이 끊어진지라”

그 아들은 그냥 병이 들어 죽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이유였습니다. 죄가 이유가 아니라 병이 이유였습니다. 그렇다면 오히려 엘리야를 정말로 그 여인에게로 보내신 더 크신 두 번째 이유가 나타납니다. 그것은 병들어 죽은 그 아들을 살리는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이유로 주님은 엘리야를 사르밧 과부에게로 보내셨습니다. 그 죄를 생각나게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 아들을 죽이려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 아들을 살리기 위해서 입니다.

21절에는 엘리야가 어떻게 그 죽은 아이를 살리는가를 보여줍니다. 우리는 이 21절을 읽을 때에 아주 중요한 부활의 원리를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당대에 어느 누구도 할 수 없었고 오직 엘리야 만이 할 수 있었던 아이를 살리는 방법이었습니다.

“21. 그 아이 위에 몸을 세번 펴서 엎드리고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컨대 이 아이의 혼으로 그 몸에 돌아오게 하옵소서 하니”

엘리야는 죽은 아이의 몸에 자신의 몸을 펴서 엎드립니다. 한번. 다시 일어나 죽은 아이의 몸에 자신의 몸을 펴서 엎드립니다. 두번.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시 일어나 죽은 아이의 몸에 자신의 몸을 펴서 엎드립니다. 세번. 그리고 하나님께 부르짖어 간구합니다. ‘나의 하나님 여호와의 원컨대 이 아이의 혼으로 그 몸에 돌아오게 하옵소서’

놀랍게도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원리를 의미합니다. 죽었던 자가 다시 살아나는 모습을 보십시오. 산 자가 죽은 자의 몸에 자신의 몸을 엎드림으로써 산 자의 간구와 기도가 죽은 자에게 전달되는 것입니다. 의로운 자가 죽은 자의 몸에 자신의 몸을 엎드리어 하나님께 간구함으로써 하나님이 그 기도를 들으시고 다시 생명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죽은 아이를 위해 기도했기 때문에 그 아이는 엘리야 수준으로 다시 살아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몸을 드려 기도하셨을 때에 우리는 예수님의 수준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된 몸에 자신의 몸을 엎드려 우리의 죄로 죽으신 것입니다. 이후에 부활하사 우리를 일으키실 때에는 우리를 위해 기도하심으로 우리를 일으켜 세우시는 것입니다. 죽었던 우리가 예수님의 수준으로 다시 살아나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엘리야의 기적을 통해 부활의 소망을 보여주셨습니다. 사르밧 과부는 아들의 죽음이 자기 죄 때문이 아니었냐고 그것이 엘리야가 온 이유가 아니었냐고 울부짖었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엘리야가 온 것은 그를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리기 위해서였습니다. 그의 죄를 생각나게 하기 위함이 아니고 새로운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4. 우리는 우리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으로 인해 다시 부활하게 된다.

오늘날 영적인 환경은 너무나 좋습니다. 너무나 많은 교회가 있고 너무나 많은 기독교기관이 있습니다. 너무나 많은 성장프로그램이 있고 너무나 많은 훌륭한 사역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불신앙은 존재합니다. 교회는 아무리 커도 여전히 그속에는 하나님을 믿지 않음이 있습니다. 프로그램은 아무리 잘되어 있어도 그속에는 하나님을 믿지 않음이 있습니다. 사역은 아무리 활발해도 여전히 그속에는 하나님을 믿지 않음이 있습니다. 마치 병원이 아무리 많아도 의학은 아무리 발전해도 병은 사라지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불신앙은 더더욱 교묘해지고 더더욱 간교해지며 더더욱 뿌리깊어집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불신앙 자체를 합리화하려고 하고 그 자체를 죄로 여기지 않으려고 합니다.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영적인 병으로 인해 우리가 죽습니다. 우리 자녀가 죽습니다. 우리 교회가 죽습니다. 이러한 때에 주님이 오신 것은 죄를 생각나게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잃어버린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죽이려는 것이 아닙니다. 살리려는 것입니다. 믿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엘리야처럼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십니다. 그리고 주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눅19:4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주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를 구원해주십니다. 우리의 죽어버린 믿음에 우리의 죽어버린 심령에 우리의 죽어버린 메마른 열정에 주님의 몸을 덮어 주십니다. 그 온기를 느껴보십시오. 그 사랑을 느껴보십시오. 그 은혜를 느껴보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이 뜨거워지지 않습니까? 여러분의 생각이 변화되지 않으십니까?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나를 괴롭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나를 살리시기 위함이구나! 그 뜻이 전달되지 않으십니까? 주님은 우리를 부활시켜 주십니다. 우리의 마음이 우리의 믿음이 그리고 우리의 열정이 다시 살아나도록 우리를 일으켜 주십니다. 이것을 믿으십니까? 여러분은 이제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살아난 아들을 안고 엘리야는 다락에서 방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리고 그 어미에게 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 아들이 살았느니라’
이 때 여인은 엘리야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24. 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내가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시요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줄 아노라 하니라”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왜 엘리야를 사르밧 여인에게 보냈는지에 대한 세 번째 이유를 발견합니다. 그것은 그 여인을 위해서 였습니다. 놀랍게도 지금까지 이 여인은 엘리야가 하나님의 사람인지 믿지 않았습니다. 또한 그가 말한 여호와의 말씀도 진실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 여인이 자신의 입으로 그렇게 말하기 전까지 우리는 전혀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던 것입니다. 사실 이 여인은 그동안 믿음이 부족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살아난 아들을 안고 그제서야 온전한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일을 통해 아들은 생명을 얻었고 여인은 온전한 믿음을 갖게 된 것입니다.

주님의 역사하심은 오늘도 계속됩니다. 죽은 자를 다시 살아나게 하심이 우리들에게 새롭게 생명을 얻게 합니다. 또한 우리들에게 믿음을 더 크게 갖도록 합니다. 그 손길을 거부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을 괴롭히시려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살리시려는 것입니다. 그 다스리심 속에서 여러분이 살아나고 여러분의 가정이 살아납니다. 그 인도하심 속에서 우리가 오늘도 교회에 나아왔습니다.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살아납니다. 우리의 믿음이 살아나고 우리의 신앙이 살아나고 우리의 열정이 살아나고 우리의 가정이 살아납니다. 바로 이곳에서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살아나게 하시는 은혜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또 다른 사람들에게 그 은혜를 전파하게 하십니다. 주님의 눈에 이 세상 믿지 않는 사람들은 다 죽은 자들입니다. 지금 죽으나 앞으로 죽으나 별반 다를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죽은 자들에게 우리를 보내십니다. 그들을 살리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을 전하는 자들 됩시다. 우리도 그 사랑으로 인해 살아난 것처럼 다른 사람들도 그 사랑으로 인해 살아나는 자들될 수 있도록 주님의 사랑을 전하고 그 복음 전하는 자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개요 {1역사서}, <4이야기>, [1영역-개인]~[0복음-부활]
1. 사람들은 몸의 괴로움과 그로 인한 과정들 속에서 두려워하고 분노한다.
-의료환경은 좋아졌지만 여전히 우리 삶에는 병으로 인한 고통이 존재한다.
-환자는 치료과정과 그 회복결과의 불확실함때문에 두려워한다.
-보호자는 고통스러운 상태에 대해서 분노하며 원망한다.
2. 사르밧과부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로 인해서 두려워하며 분노하였다.
-‘내죄를 생각나게 하고’: 과부는 아들의 죽음으로 인해 자신의 과거를 생각하게 되고 두려워하였다.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과부는 엘리야 때문에 아들이 죽었다고 생각하여 분노하였다.
3. 하나님은 과부의 아들을 살려주셨고 그러기 위해서 엘리야를 보내주셨다.
-하나님은 과부의 죄를 생각나게 하고 그 아들을 죽게 하려고 엘리야를 보내신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기근으로 죽는, 병으로 죽는 과부와 그 아들을 살리시려고 엘리야를 보내신 것이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통해 죽은 자의 몸에 산자의 몸을 엎드리는 부활의 원리를 보여주셨다.
-하나님은 죄로 죽은 우리를 부활시키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암시하여 주신다.
4. 우리는 우리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으로 인해 다시 부활하게 된다.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그 손을, 그 발을 덮어주시고 우리를 살리신다.
-우리의 죽었던 신앙이 살아나고 죽었던 마음이 일깨워진다.
-이 세상의 죽은 자들이 다시 일어나 살아 숨쉴수 있도록 그 사랑을 전하는 자들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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