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1:9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
[롬]1:10 어떻게 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롬]1:11 내가 너희 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 어떤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누어 주어 너희를 견고하게 하려 함이니
[롬]1:12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롬]1:13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성탄을 생각하면서 성도들은 자신이 예수님께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실은 성탄을 통해서 예수님이 성도들에게 나아오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은 것도 우리가 주님께 나아간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에게 나아오신 것입니다. 천국도 우리가 천국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천국이 우리에게 펼쳐지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이 성탄으로 나아간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나아가지 않으면 성탄으로는 나아갈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것이 다 자신에게 달려있다고 판단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아갈 수 없습니다. 너무나 자기 중심적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지나치게 자기 세계 속에 갇혀있을 때 아무 것도 못하게 됩니다. 자기 세계 속에 있다 보면 너무나 무거워져서 외부 세계에 대해서 커다란 감정을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단지 그런 감정 때문에 예수님의 다가오심을 생각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이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다가오심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성탄은 주님이 찾아오시는 것이지 내가 찾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부르심이 아니었다면 목자는 천사들의 방문을 경험하지도 못했고 말구유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별의 나타남이 아니었다면 동방박사들은 멀리 베들레헴까지 올 필요도 없었습니다. 항상 우리가 주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찾으시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 찾아오심에 응답하고 화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찾아오시면 문만 열면 되고 다가오시면 응답만 하면 됩니다. 숨어버리거나 외면하지만 않으면 됩니다. 그러면 성탄을 통해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간절함을 오늘 본문 말씀 속에서 발견합니다. 9절을 보십시오.
“[롬]1:9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
[롬]1:10 어떻게 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사도 바울은 항상 기도에 쉬지 않고 로마에 있는 성도들을 말하였고 어떻게 해서든지 그들에게 나아갈 좋은 길을 얻기를 구하였습니다. 그 모습 속에서 우리는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시며 성도들에게 나아오기를 원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생각해 봅니다. 왜냐하면 성도들은 왠만해서는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성도들은 성탄 속에서 주님을 피해 다니고 있습니다. 여기에 주님과 성도 사이에 쫓고 쫓기는 대추격전(?)이 펼쳐집니다. 바울이 극복해야 했던 한계는 현실적이고 상황적인 한계였지만 이 시대에 주님이 목도하시는 한계는 성도 자신의 무관심이라는 마음의 한계입니다.
우체부 아저씨는 등기우편을 전달하기 위해서 2번 방문을 합니다. 2번째에도 전달을 못하면 등기우편물은 지역우체국에 일정기간 보관됩니다. 그 기간에도 직접 찾아와서 가져가지 않으면 그 다음에는 다시 반송됩니다. 그렇게 되기 전까지 어떻게 해서든지 우편물을 받기 위해서 노력을 해야만 합니다. 그와 같이 주님은 우리에게 여러 번 찾아오십니다. 그것을 깨닫고 예수님의 메시지를 받아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이 성탄에 우리가 해야 하는 중요한 일입니다. 주님의 메시지는 과연 무엇일까요?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그것은 신령한 은사를 나누어 주어서 그들을 견고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11절입니다.
“[롬]1:11 내가 너희 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 어떤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누어 주어 너희를 견고하게 하려 함이니”
사도 바울이 로마의 성도들을 간절히 보고자 했던 것은 어떤 신령한 은사를 주어서 그들을 견고하게 하려고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에게 은사가 있고 그 은사를 나누어줄 수 있는 능력과 기회가 있을 때에 그는 아낌없이 자신의 은사를 나눠주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험하고 악한 세상 속에서 성도들이 세속에 빠지지 않고 견고하게 되기를 원하였던 것입니다.
그의 이러한 마음을 이해한다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고자 하는 메시지도 가늠하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부르시는 예수님이 있고 그 예수님을 성탄을 통해서 잘 깨닫게 된다면 그 목적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에게 은사를 주셔서 우리를 견고하게 하려고 하십니다. 그 은사가 있을 때 우리를 이 세상을 주님의 능력으로 이겨낼 수 있습니다. 주님의 능력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기술은 싸우고 공격하며 반격하고 되받아치는 것입니다. 또는 모른 척하고 시치미 떼며 무조건 부인하며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진짜 상대방은 어이가 없어서 포기하고 물러갑니다. 일종의 미치광이 전술입니다. 세상은 그런 기술을 날마다 가르쳐 줍니다. 그러나 그런 방법을 사용하면 할수록 더욱 세속적이 되고 더욱 악하게 됩니다. 그렇게 꾸준히 살아가면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잃어버리고 마침내 완전히 패배해 버립니다.
우리가 가정이나 학교나 사회에서 받은 교육의 핵심은 어디에 있습니까? 한대 맞으면 두대를 갚아주라는 것이 우리가 받은 교육이 아니었습니까? 혼자서 안되면 여럿이 몰려가서 실력행사를 하라는 것이 보고 배운 모습이 아닙니까?
하지만 예수님은 전혀 다른 것을 가르쳐 주십니다. 주님의 은사를 받아서 그 은사를 통해서 견고해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울만이 주는 특별한 방법이 아니라 애초에 예수님이 주신 특별한 방법이었습니다. 다음 구절을 보십시오.
“[요]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예수님의 방법을 사도 바울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증거하였습니다. 그가 말하는 은사나 능력이나 견고함은 전부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해주시는 것이 바로 이러한 특별한 영적인 변화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예수님의 은혜를 깨닫고 그 은혜를 받아들여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찾아오심을 거부하거나 회피하거나 무심하게 받지 말고 진심을 다해서 받아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이 세상을 이길만한 충분한 능력을 얻게 됩니다.
예전에 저는 온 가족과 함께 패러글라이딩을 탄 적이 있었습니다. 타기 전에 복장과 장비에서 잘 준비를 하고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교관이 하라는 그대로 했습니다. 앞에서는 교관이 하라는 대로 하지 않았다가 엎어져서 위험한 장면이 연출되는 모습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런 실수 없이 그대로 잘해서 멋지게 창공을 날아 올랐습니다. 지상에 착륙했을 때 커다란 뿌듯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계획된 대로 다 할 수 있으면서 승리하는 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갈 수 있었으면 그건 성공한 삶입니다. 하나님이 보증하시고 판단하시며 칭찬하십니다. 약해보이고 지쳐보이고 우습게 보여질 수는 있지만 그건 성공한 모습입니다. 예능에서도 그렇지 않습니까? 실수없이 아무 말 안 하고 무사히 촬영을 마쳤다면 그건 실패한 시간입니다. 자기 생각에는 부끄럽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그 내용은 전부 재미가 없어서 통편집되는 모습일 뿐입니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 사람들은 구르고 넘어지고 부끄러움을 당합니다. 그런데 그게 성공입니다. 그래서 너무 재미가 있었고 너무 인기가 있었고 커다란 성공을 이루게 됩니다.
이제 우리가 주님의 뜻을 이룰 수 있었다면 그것이 열매인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 주님의 올해의 메시지와 내년의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 안에서는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고 양보하는 것이 얻는 것이며 잃어버리는 것이 곧 얻는 것입니다. 주님 자신이 죽음으로써 오히려 다시 사셨습니다. 또한 낮고 낮은 이 땅에 오심으로써 오히려 주님 보좌에 영광스럽게 나아가실 수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의 성도들이 그렇게 되는 것이 큰 기쁨이고 그것을 위해서 노력했습니다.
“[롬]1:12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롬]1:13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그는 그 기쁨을 위해서 여러 번 노력하였고 지금까지 길이 막혔지만 마침내 그 길을 찾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로마서였습니다. 우리가 이전에 성탄을 통해서 깨달아야 하는 은혜가 있었지만 그렇지 못했다면 이제 그 길을 찾을 때입니다. 조용하지만 의미 있는 성탄을 통해 예수님께 집중하고 그로 인해서 예수님의 메세지에 귀를 기울이고 그 뜻을 따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가까이 오고 있습니다. 그 은혜에 응답하고 반응하여 우리가 인생 속에서 맺을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준비하고 그 열매를 맺어서 하나님의 안위함 속에서 살아가는 귀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