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희락] 42눅 19; 1-10 드러나지 않은 마음의 소원이 있음Loading the player... .
42눅 19; 1-10 드러나지 않은 마음의 소원이 있음_1
2024. 1. 21. 주. 주일오전예배.
*개요: 소원의 의미를 생각함, #62희락, [눅]19:1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시더라 [눅]19:2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눅]19:3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눅]19:4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눅]19:5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눅]19:6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눅]19:7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눅]19: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눅]19:9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눅]19:10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올해 하나님께 소원을 두고 들으심을 얻기를 바라면서 욕심이 아닌 소원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럴 때 성도로서 하나님께 소원을 갖고 소망을 갖는 사람들이 있지만 이런 저런 이유로 그러한 소원이 없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럴 때 어떻게 소원을 발견하고 그 소원을 붙들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보게 됩니다. 새로 교회에 온 사람들이나 자녀들의 경우를 생각해 보십시오. 아무 기대도 없고 소망이 없는 분들에게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대한 소원을 생각하게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게 됩니다. 소원이 있으면 눈이 반짝거리지만 소원이 없으면 사기가 꺾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모든 것에 아무 관심이 없어집니다. 사람에게는 정말 소원이 필요합니다. 그 소원이 있다면 생기를 띨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그런 상태에서 예수님을 만난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의 이름은 삭개오입니다. 삭개오는 예수님께 별로 소원이 없는 상태였지만 예수님은 그를 불러 주셨습니다. 그러한 모습이 소원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소원이 없을 때 어떻게 예수님께 나아갈 수 있는가를 알게 할 것입니다. 먼저 누가복음 19장 1절을 봅니다. “[눅]19:1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시더라 [눅]19:2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눅]19:3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누가복음 19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고 계셨습니다. 여리고는 예루살렘 옆의 도시였습니다. 그곳에는 삭개오라 하는 세리장이며 부자인 사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여리고에 들어오시기 전에 한 맹인의 눈을 고쳐 주셨기 때문에 이미 여리고에는 소문이 다 퍼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거리로 나와서 지나가시는 예수님을 쳐다보는 군중들이 많았는데 삭개오는 그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때 그는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했고 예수님에 대한 관심을 가졌지 예수님께 대한 아무런 소원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단지 그에게는 자기가 알고 싶은 대로 예수님에 대한 호기심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랬던 삭개오에게 자신은 키가 작고 사람은 너무 많으니 예수님을 보기 위해서는 나무에 올라가서 보는 방법밖에 없었습니다. “[눅]19:4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눅]19:5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그래서 그는 돌무화과나무(이전 번역은 뽕나무)에 올라갔는데 예수님께서는 그 곳을 지나가시면서 보시고 삭개오를 부르셨습니다. 돌무화과나무(Sycamore)는 높이가 그리 높지 않으면서 성인 남성이 올라가기에는 안성맞춤인 나무였습니다. 이전 번역에서는 뽕나무(Mulberry)라고 잘못 해석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두 나무는 비슷하기는 하지만 서로 다른 나무입니다. 그렇게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서 예수님을 보고 있었을 때 예수님은 나무 위에 올라가 있는 그를 보시면서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소원이 없던 삭개오를 만나 주셨던 것입니다. 그럴 때 삭개오는 어떻게 해서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을까요? 삭개오에게 특별했던 점은 그가 예수님께 관심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알고자 했고 예수님께 관심을 가졌지 다른 것들에 관심을 가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럼 그 돌무화과나무에는 삭개오만 올라간 것이 아니었을텐데 다른 사람들은 왜 불러주시지 않았을까요?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께 관심을 가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에 관심을 가진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아닌 다른 것에 관심을 가질 때 예수님의 모습은 보면서도 별다른 의미가 없는 분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 소원을 갖게 되는 것은 항상 눈에 보여야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께 소원을 가질 수 있는 이유는 방향이 맞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방향이 있으면 하나님께 소원을 갖고 하나님을 믿을 수 있지만 하나님께 방향이 없으면 아무런 소원을 갖지 못하고 믿을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 그러한 하나님께 바란다는 것은 어려운 일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삭개오에게 예수님께서 만나주신 것처럼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만나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를 알고 계시고 우리에게도 들어오고자 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나아가려는 소원이 없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로 들어오시려는 뜻이 있으신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가 해야 하는 하나의 생각이 있는데 그것은 그러한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삭개오도 바로 그것을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자신의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고 하셨을 때 기뻐하며 즐거워하면서 영접했던 것입니다. “[눅]19:6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눅]19:7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사람들은 수군거렸지만 삭개오는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은 사람들 때문에 나온 것이 아니라 예수님 때문에 나온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 예수님이 자신의 집에 유하신다고 했을 때 그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한 이유는 예수님을 귀하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낮게 생각한 것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소원을 생각하면서 다른 누군가에게 그 소원을 설명해야 한다면 바로 이런 부분에서 설명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능력이 있고 권세가 있고 영광스러운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소원을 갖는 것이지 그분을 위해서 소원을 가져 드려야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장터마다 돌아다니는 보따리 장수나 싸구려 약을 팔러 다니는 약장사가 아닙니다. 그래서 그러한 하나님을 귀히 여기고 높일 때에 비로소 그 하나님 밑에서 바랄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나의 필요를 생각해서 소원을 갖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생각하면서 소원을 갖게 됩니다. 또한 그렇게 소원을 가져야만 합니다.
저희 동네에 학용품 무인판매점이 있습니다. 그 무인판매점에는 아이들이 끊임없이 드나듭니다. 그 아이들은 무엇인가를 필요로 해서 오기도 하지만 어떨 때에는 필요한 것이 없어도 들어가기도 합니다. 안의 내용물을 보면서 필요를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이해도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에게 필요가 있어서 하나님께로 나아오기도 하지만 하나님을 알게 되면서 새로운 필요를 알게 됩니다. 구원과 생명과 영생과 천국에 대한 필요는 모두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되면서 갖게 되는 간절한 바램입니다. 삭개오도 그렇게 예수님을 영접했을 때 진정한 변화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눅]19: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눅]19:9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눅]19:10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삭개오는 예수님께 대한 소원에 따라서 구원함을 받았습니다. 우리도 하나님께 대한 소원이 있을 때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때에야 비로소 하나님을 경외하고 높이며 섬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 소원이 없으면 하나님은 그냥 우습게 여길 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신 창조자시요 우리의 죄에 대한 심판자이시며 우리의 구원을 이루신 구원자이심을 기억하고 그 사랑하심에 순종하여 놀라운 소원을 이루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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