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희생] 46고전 15; 1-8 나에게도 보이신 그리스도의 부활Loading the player... .
46고전 15; 1-8 나에게도 보이신 그리스도의 부활_1
2024. 3. 31. 주. 주일오전. 부활절.
*개요: #53희생, #2관점적해석
[고전]15: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고전]15:2 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 [고전]15:3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고전]15:4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고전]15:5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고전]15:6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고전]15:7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고전]15:8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오늘 부활절을 맞이하면서 지난 한 주간 고난주간 동안 예수님을 묵상했던 일들을 생각해 봅니다. 부활은 고난과 죽으심이 없었다면 무의미했을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그냥 편하게 죽으셨다가 부활하셨다 하더라도 우리에게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것이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우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하지만 바로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다면 예수님과 우리 사이에는 아무 중요하고 밀접한 관계가 생깁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의 구원하심과 우리의 구원 받음입니다. 2절에 그 약속이 나와 있습니다. “[고전]15:2 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 [고전]15:3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부활은 이와 같이 우리를 위해 죽으신 주님이 부활하신 것을 기념하는 것이고 그걸 진실되게 믿을 때 그로 인해서 구원을 얻습니다. 그 부활에 참여하려고 나아갈 때 구원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부활절은 바로 우리를 위해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사랑하심과 그러한 예수님께 순종하면서 나아가는 성도들의 기쁨을 누리는 시간입니다. 어려운 시기를 함께 통과했기 때문에 기쁘고 즐거운 시기도 함께 누리게 됩니다. 이럴 때 부활의 의미는 구원과 연결됩니다. 우리가 감사하며 기뻐하는 부활은 이 세상에서 다시 태어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윤회하는 것도 아니고 끝없다 죽었다 태어났다를 반복하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이루신 부활 그대로 우리도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부활을 믿으면 믿을수록 그 부활이 나 자신의 부활로도 이어집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기뻐하는 것은 바로 나의 부활을 감사하는 것이 됩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부활에 대해서 증거하는 사람들이 나타납니다. 이렇게 부활을 증거하는 사람들 중에서 제일 중요한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은 바로 나입니다. 그래서 맨 마지막 부분이 우리에게는 가장 중요합니다. “[고전]15:8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사도 바울은 다른 사람의 부활의 증거만 본 것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도 부활의 증거에 동참했습니다. 그 자신도 부활의 증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여기에 나오는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이라는 표현 속에서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는 사실 복음을 거부하고 예수님의 그리스도 되심을 부인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경험하고 증거할 때 그러한 사람들을 잡아다 옥에 가두는 일을 했었습니다. 대제사장들은 사도 바울의 이러한 악한 열심을 부추키면서 계속 그런 일을 열심히 할 수 있도록 격려하였고 급기야는 대제사장의 공문을 받아서 유대인들이 많이 거주하던 다메섹까지 가서 그리스도인들을 잡고자 하였습니다. 그랬던 그가 다메섹에 가는 도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서 회개를 하고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런 이유로 그는 자신을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사람이라고 지칭했던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주님을 이렇게 직접 만나서 부활하심을 믿게 된 사람들이 있었지만 2천년이 지난 지금은 주님을 직접 만나서 부활하심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전부 주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그 부활하심을 믿게 됩니다. 그래도 그러한 믿음이 의미 있는 이유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으면서 그 부활을 믿는 자가 얻게 되는 부활을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보고 믿는 자가 복되지만 보지 않고도 믿는 자는 더욱 복됩니다. 볼 수 없는 시대에 살면서도 볼 수 없는 영원한 가치와 결실을 생각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이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가 부활을 믿게 된 것은 놀라운 감사이자 축복입니다. 이 믿음을 통해서 앞으로 일어날 부활을 사모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이 부활을 믿는 믿음에는 지난 고난주간 동안 우리가 함께 생각하고 묵상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의미가 들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부활만 생각해서 알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거쳐야만 했던 고난과 죽으심을 알아야 합니다. 그럴 때 비로소 부활의 기쁨과 감사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린 아이가 그냥 태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열 달의 임신기간과 산고의 고통이 있었을 때 새로운 생명이 세상에 나타납니다. 그냥 아기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다면 그 아기의 소중함을 알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랜 기간 후에 나타나는 아기의 존재는 그 어느 것보다도 소중하고 귀한 의미가 될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믿음이 그냥 쉽게 생겼다면 그 가치를 잘 이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을 갖게 되기까지 오랜 고민과 끝없는 변론과 심사숙고 끝에 마침내 주님의 부활을 믿게 될 때 그 믿음은 진실하고 가장 값진 결실이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걸 알기까지 평생의 삶이 걸리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으며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다시 부활하셨다’는 이 하나의 믿음을 갖기 위해서 평생이 걸렸던 것입니다. 시간이 오래 걸리기는 했지만 그것을 알게 된 것은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그 믿음으로 인해서 그 사람은 다시 부활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미 그러한 믿음을 가지고 부활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존재가 앞서 나타났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고전]15:5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고전]15:6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고전]15:7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그들은 진작에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하고 믿고 따랐던 사람들입니다. 이중 야고보는 주의 형제였던 야고보를 의미합니다. 그는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에는 예수님을 따르지 않았다가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다음에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 내용이 다른 본문에는 나오지 않고 오직 여기 이 본문에만 나옵니다. 그것은 특별하게 만나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전부 교회의 기둥이 되었고 인도자가 되었습니다. 야고보는 예루살렘 교회의 수장이 되었고 야고보서를 썼습니다. 다른 사도들과 형제들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 말은 그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전부 부활의 삶을 살았다는 의미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믿고 따를 때 주님은 그들이 있는 위치에서 살아있는 삶을 살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존재가 나타나고 그들의 활동이 표현되며 그들의 사역이 확장되었습니다. 그들은 살아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부활을 믿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본질은 희생입니다. 그 희생이 있었기에 부활이 가치가 있고 영광이 있었습니다. 부활하심은 죽으셨음을 전제로 하는 것이고 그 죽으심은 희생하신 것이었기 때문에 희생의 결과로 나타난 부활은 그 희생하심에 대한 축복이자 영광이 되었습니다. 희생하셨는데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허무한 것이 되었겠지만 부활하셨기에 그 희생은 가치 있고 영광스러운 것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믿는 부활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고난 다음에 오는 부활은 희생으로 인해 얻은 풍성한 결실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부활을 믿으며 사모하고 기뻐하는 자들은 항상 살아 있습니다. 희생의 결실이 무엇인지 알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자들은 죽은 다음에 다시 부활해서 하나님 나라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이 세상에서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은 믿음에 대한 결실이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 살면서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자들은 항상 부활의 삶을 살아갈 것입니다. 그 부활의 삶은 희생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 삶 속에서 희생의 삶은 다양하게 펼쳐집니다. 부모가 자녀를 위한 희생의 삶이 있습니다. 자녀가 부모를 위한 희생의 삶이 있습니다. 친구를 위한 이웃을 위한 다른 사람을 위한 희생의 삶은 무궁무진합니다. 그 모든 희생의 삶은 어리석게 희생 당하는 삶이 아닙니다. 희생하신 예수님을 따르는 지혜롭고 가치 있는 삶입니다. 그렇게 희생하는 부활의 삶을 살아가고자 할 때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 속에서 살아가는 자들이 될 것입니다.
얼마 전 저희 집에서는 우리 집에 있는 강아지(뭉게)를 산책 시키는 일을 누가 할 것인가 서로 미룬 적이 있습니다. 서로 다른 가족이 해주기를 바랬지만 다들 바빠서 아무도 선뜻 나서지 않았습니다. 그 와중에 강아지는 산책을 나가지 못해서 안절부절 하고 있었습니다. 기다림이 오래 되자 마침내 저희 딸이 저에게 말했습니다. ‘아빠가 강아지(뭉게) 아빠잖아요!’ 그 말에 제가 졌습니다. 그리고 결국 제가 강아지를 산책시키는 희생을 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우리를 위해 희생하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의 생명의 은인이시기에 부활을 감사하고 고백하면서 부활의 증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갑니다. 이러한 모두의 희생하는 부활이 있기에 천국은 천국이 되며 우리는 그 천국의 백성이 됩니다. 나에게 보이신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고 따르면서 부활의 삶을 살아가 보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이 세상과 다음 세상에서 우리에게 넘칠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함께 하심이 우리 모두의 삶에 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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