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교육] 45롬 1; 24-32 선과 악을 심판하시는 하나님2Loading the player... [크게보기]
45롬 1; 24-32 선과 악을 심판하시는 하나님2_2b
2020. 9. 20. 주. 주일오후. 온라인설교.
*개요: 성경비전, 3도덕해석
[롬]1:2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롬]1:25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롬]1:26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롬]1:27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 [롬]1:28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롬]1:29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롬]1:30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롬]1:31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롬]1:32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
성경비전으로 말씀을 연구하고 묵상하고자 할 때 오늘 우리가 다루는 방법은 ‘3도덕적해석’입니다. 도덕적해석은 전체 성경연구법 중의 세 번째에 해당합니다. 1적용적해석 2관점적해석 3도덕적해석 4극본적해석 5분석적해석 6통찰적해석 도덕적 해석은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기준으로 말씀을 생각해 보는 방법입니다. ‘1선주도, 2선동참, 3중립, 4악동참, 5악주도’ 이렇게 하다보면 본문말씀 속에서 적절한 선악의 개념과 올바른 진행방향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선악의 개념에 대해서 생각해 보면 우리는 날 때 부터 선과 악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또한 그것이 자라면서 더욱 구체적이 되도록 교육을 받습니다. 선악에 대한 개념은 선천적으로 날 때부터 가지고 태어나기만 하는 것도 아니고 또한 후천적으로 교육과 훈육에 의해서 학습되기만 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 두 가지가 모두 존재하고 선천적인 이해와 후천적인 학습 속에서 선악의 기준을 갖게 되어서 이 세상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선과 악에 대해서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악한가에 대한 인간 외적인 가치 기준이 있습니다. 바로 하늘의 두려움을 아는 것입니다. 정확히 그 선악을 판별하는 주체를 알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선과 악을 판단하고 선에 대해서 복을 주고 악에 대해서 심판을 하는 존재를 의식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러한 희미한 생각만으로는 그저 이세상을 살아갈 뿐입니다. 하지만 그 생각에서 조금만 더 나아가면 하나님 나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붙들 때에 비로소 진정한 선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 성경은 하나님께서 바로 이러한 온전한 선악의 기준이 되심을 보여줍니다. “[롬]1:1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롬]1:19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하나님께서 온전한 선악의 기준이 되실 수 있는 것은 악에 대한 심판을 불의한 자들에게 내리시기 때문입니다. 악을 행한 자들이 심판을 받게 되어서 멸망에 이르게 되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진노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과 악에 대한 판단과 악에 대한 진노하심을 통해서 이 세상에 죄악의 넘침을 막으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에게 그러한 능력이 없으시다면 결코 선악의 기준이 되실 수 없을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본능적으로 악을 행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에 대한 엄중한 처벌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것이 꼭 하나님이라는 것은 알지 못하더라도 하늘을 두려워한다든지 혹은 일어나게 될 재앙에 대해서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사실 그 모든 것은 정말로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단순한 심판의 그림자를 보고 있지만 그것은 심판의 주체가 존재하기 때문에 심판의 결과가 존재합니다. 하나님은 이 세계를 만들어 놓으셨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다스리고 계십니다. 그 다스리심의 손길은 우리의 삶속에 곳곳에서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 분명하게 우리의 삶에 보여주고 계시는 일들입니다.
이러한 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사실 선을 찾아 나서도록 하는 하나님의 가드레일이었습니다. 가드레일을 들이받지 말고 악을 행하지 말고 그 반대되는 선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게 하는 것이 이 세상에서 선악을 판단하시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능력과 신성을 알게 되어야 비로소 선을 향해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전래동화나 구전에서 존재하는 심판자에 대한 개념인 ‘옥황상제’라든지 ‘염라대왕’이라는 개념은 단지 선악에 대한 추상적인 방향성만을 주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존재는 다릅니다. 하나님은 그 모든 권능과 능력에 대해서 가장 완전한 가르침을 주시는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를 보여주시는 위대한 이 세상의 창조자였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능력과 신성을 인간이 깨닫게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것이 가장 중요한 선이었기 때문입니다.
1. 선주도: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을 깨닫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감사하는 것 하나님이 보실 때 가장 선을 주도하는 것은 그분의 능력을 깨닫고 그분을 영화롭게 하며 감사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롬]1: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그들이 하지 않았지만 했어야 하는 것이 가장 큰 선의 모습입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은 온 세계에 나타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만드신 모든 환경 속에 존재하고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모든 도우심 속에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을 주시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한 선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2.선동참: 하나님을 알고 그 은혜를 고백하는 것 선을 주도하기 어렵다면 그 다음으로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 살아간다면 적극적인 경배의 행위는 아니라도 소극적인 고백의 모습을 가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는 온 세계에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20절 말씀을 보십시오. “[롬]1: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하지만 그러한 선에 대한 인도하심으로는 나아가지 않고 오직 악에 대한 심판에 대해서만 불평하며 저항하였을 때에 세상 사람들의 상황은 이전보다 더욱 악화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가드레일은 무너지고 그들은 이제 가드레일 너머로 나아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롬]1:22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롬]1: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하나님은 그들에게 영광을 돌리는 대상도 아니고 감사하는 대상도 아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완전히 무시되고 거부되어서 잊혀지고 세상 사람들에게 중요하게 여겨지는 대상은 바로 사람과 새와 짐승과 동물 모양의 우상이 되었습니다. 그러한 우상이 마땅히 하나님께서 받으셔야 하는 영광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우상을 의지하여 더욱 죄를 짓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3.중립: 삶에 대한 규칙과 규범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것 선에 해당하지 않고 그렇다고 악에 해당하지도 않는 중립적인 위치는 삶에서 규범과 규칙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그 순간 만큼은 중립적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세상 사람들의 인생의 목표는 전부 자기 자신에 있습니다. 선악의 문제를 어떤 절대자나 초월적인 존재가 다스린다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결국 자기가 원하는 일은 하고 싶은 마음이 있기 때문에 그 초월적 존재와 본성적 한계를 뛰어 넘고 자신이 하고자 하는 바를 이루고 싶은 욕망이 있습니다. 그 욕망과 욕구를 이겨내고 해야할 일을 행하면서 살아간다면 선을 바라볼 수 있지만 그렇지 않고 그 욕구에 따라서 살아간다면 악으로 떨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4.악동참: 자신의 원하는 쾌락을 이루기 위해 합당하지 않은 일을 행함 결국 이러한 욕망이 나타난 것이 바로 ‘동성애’입니다. 동성애는 남성간 성관계와 여성간 성관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각각 남성간 성관계에는 남성역할과 여성역할을 하는 남성이 있고 여성간 성관계에는 남성역할과 여성역할을 하는 여성이 있습니다. 이들을 모두 게이, 레즈비언, 그리고 트랜스젠더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이루어지는 동성애에 대해서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롬]1:2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롬]1:25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왜 성경이 동성애에 대한 설명을 하나님이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셨다고 하였을까요? 그 이유는 동성애는 마음의 정욕을 따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것이 위생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더러움(uncleaness)에 해당되는 것이고 그들의 몸을 욕되게(dishonor) 만들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동성애에 대해서 성경이 알게 하는 커다란 죄악은 육체에 관하여 하나님께 만드신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놓고 피조물의 상태를 창조자의 뜻보다 더 우선하게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남자는 여자와 연합하여 하나가 되게 하시고 여자는 남자와 연합하여 하나가 되게 하신 것을 거짓으로 만들어 버리고 자신들이 원한다면 남자가 남자와 연합할 수 있고 여자가 여자와 연합할 수 있도록 했던 것입니다. 본질적으로 하나님이 주신 성적 기능조차도 다 피조물인 인간의 욕구와 충동에 따라서 다 변형시켜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전까지 일반적이고 평범했던 남자와 남자의 관계가 성적관계로 돌변합니다. 지금까지의 우정이나 의리나 합심은 사라지고 성적매력과 성적쾌락을 추구하는 관계가 되어버립니다. 다정하고 친밀했던 여자와 여자의 관계가 성적인 경험을 통해서 남녀사이에 존재하는 쾌락을 추구하는 사이가 되어버립니다. 한 인간에게 동성애가 시작될 때 보통 이성애에 있어서도 늘 존재했던 정결과 거룩과 경건은 사라지고 오직 성적매력과 자극으로 치닫게 되어버립니다. 소가 닭 쳐다보듯하던 관계가 여우가 닭쳐다보는 관계로 변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경말씀대로 그 자신의 마음의 정욕으로 인해 몸이 욕되게 되어지는 것이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던 몸의 기능조차도 바꿀 수 있다면 그 이후에는 무엇인들 못하겠습니까? 하나님을 섬기고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살아가는 것은 진정한 선을 이루는 것이지만 우상을 섬기고 자기 자신의 원하는 것을 추구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더 큰 악을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삶은 어느 수준까지는 심각한 악에 이르지 않는 것 같아도 하나님을 섬기면서 자신의 욕심대로 살아가지 않으려는 마음이 아닌 이상 결국에는 다 비슷비슷한 죄악 중에 빠지게 됩니다. 개개인이 다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려고 하지 않을 때 인간은 더 큰 악으로 빠져들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하지만 하나님의 엄위로우신 심판대 앞에서는 자신의 죄를 숨길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하나님 앞에서 심판받게 되는 죄의 목록들이 28절부터 나타납니다. 이 모든 것은 마음에 하나님을 두기 싫어하였기 때문에 생겨납니다. “[롬]1:28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롬]1:29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롬]1:30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롬]1:31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핵심은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죄악의 명칭들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살펴보시는 죄악의 핵심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마음의 악함을 심판하십니다. 그 악함으로 일어나는 죄의 형태도 심판하시지만 더 근원적으로는 우리 마음 속에 일어났던 모든 상실한 마음, 의롭지 않은 마음, 패역한 마음을 심판하십니다.
5.악주도: 다른 사람들의 악을 정당화 함 그런데 이러한 악에 동참하는 것보다 더욱 악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다른 사람도 악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비단 범죄행위와 마음 뿐만 아니라 동성애도 마찬가지입니다. 동성애가 바로 하나님을 붙들지 않는 상실된 마음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동성애자들이 올바른 하나님의 길로 돌아올 수 있도록 붙들어 주고자 합니다. 그 동성애를 정당화하고 유효화해서 심지어는 교회 안에서도 동성애 목사님과 동성애 장로님과 동성애 권사님이 생겨나도록 하는 것이 아닙니다. 동성애로 인해 괴로워하는 자들이 그 상실된 마음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우리가 바로 진정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는 방법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동성애도 합당하게 하고 모든 죄악도 합당하게 만들어 버리고자하는 시대입니다. 32절을 보십시오. “[롬]1:32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 이 시대는 우리가 정신을 바짝 차려야만 하는 상황입니다. 이러한 잘못된 생각에 사로잡히지 말고 우리는 온전히 하나님을 붙들어야 하겠습니다. 선과 악을 심판하시는 이 영광스러우신 하나님을 붙들어야 합니다. 그럴 때에 우리는 죄로 인한 인성의 타락도 막고 동성애도 막고 그리고 선을 이룰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며 진정한 선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3도덕적해석’으로 성경말씀을 보면서 선악의 단계와 정도를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이를 통해서 선악을 잘 구별하고 선을 선택하면서 사는 것이 중요함을 다시 깨닫습니다. 빠른 속도로 흐르는 인생의 시간 속에서 선과 악에 대한 유일하신 심판자이신 주님을 붙들고 더욱 큰 선을 향해 나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만이 보여주시는 진정한 의의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며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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