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하는 전도는 단지 교회를 안다니는 사람에게만 해당되지 않습니다. 전도는 더 나아가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에게도 해당됩니다. 말그대로 전도는 도를 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필요한데 안타깝게도 오늘날은 교회를 다니지만 여전히 복음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존재합니다.
실제로 지금도 교회다니는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복음의 핵심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교회를 다니기는 하지만 복음에 대해서는 약한 것입니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 하면 교회가 복음보다는 부흥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잘 가르치지 않았던 것입니다.
지난 주에 우리는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에게 물을 수 있는 첫 번째 질문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5. 하나님을 구주로 믿으시나요?”
이렇게 묻고 여기에 대한 대답은 이렇습니다.
“당신의 구주가 되시는 하나님은 당신의 죄와 허물을 심판하십니다. 하나님을 구주로 믿고 진정한 구원을 얻어보십시오.”
그 다음으로 오늘 우리가 보고자 하는 하나님을 구주로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할 수 있는 또 다른 질문은 이것입니다. 이 질문은 복음을 정말로 이해하고 있는지를 알아볼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6. 구원의 확신이 있으신가요?”
교회를 다닌다면 다 하나님을 구주로 믿을 것 같아도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구주로 믿는다고 하면 다 구원의 확신이 있을 것 같아도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구원의 확신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이 구원의 확신여부에 따라서 우리가 의지하는 것이 무엇인가가 달라집니다. 구원의 확신이 있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과 약속과 복음의 모든 내용을 의지하는 것이고 구원의 확신이 없다면 그것은 자신의 생각과 계획과 감정과 상태를 의지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2. 이러한 구원의 확신을 갖는 것은 베드로가 물위를 걸을 때 주님만을 바라본 것과 같습니다.
이 구원의 확신 문제를 우리는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말씀 속에서 발견합니다. 그것은 베드로가 물위를 걷는 장면입니다.
“27예수께서 즉시 일러 가라사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말라”
주님은 밤 사경에 그들에게 오셨습니다. 사경이라는 말은 로마시대의 시간구분법인데 로마사람들은 밤을 네등분해서 저녁 6시부터 9시까지를 초경, 9시부터 밤 12시까지를 이경, 12시부터 3시까지를 삼경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경이라는 말은 새벽 3시부터 6시까지를 가리킵니다.
가장 어두울 때에 그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을 제자들은 유령이라 하면서 두려워하였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안심시키시면서 자신임을 나타내셨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나타내시면서 안심시키실 때에 안심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알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단계가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단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두려워하지 않고 안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여기에 더 나아가서 예수님처럼 물위를 걷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28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한대”
주님을 단지 구주로 믿는 것보다는 더욱 앞서나가는 믿음입니다. 주님께 대해서 더욱 확신을 갖는 믿음인 것입니다. 그러한 확신이 없을 때 사람들은 믿었다 하더라도 떨어져 나갑니다. 일전의 구원파 이단이 교회를 휩쓴 것은 이러한 구원의 확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구원의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이 구원의 확신은 베드로처럼 물위를 걷는 것과 같습니다. 내 생각으로는 물 속에 빠질 것 같지만 주님을 보고 가니까 물에 빠지지 않는 것입니다. 29절을 보십시오.
“29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그는 정말로 예수님께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그의 몸이 물 속으로 들어가지 않습니다. 예수님께 대한 확신의 견인력이 그의 몸의 무게의 중력보다 더 큰 것입니다. 다르게 설명하는 이는 마치 저울과 같습니다. 우리의 죄에 대한 죄책감보다 우리의 구원에 대한 어떠한 생각보다 예수님의 부르심과 판단하심과 능력이 더 크다는 것을 믿을 때에 비로소 저울은 주님께로 기웁니다. 그리고 물에 빠지지 않는 것입니다.
구원의 확신은 한마디로 하면 구원받을 수 없는 수백만 가지의 이유보다도 예수님의 구원해주시는 은혜가 더 크고 강하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신학적 원리를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구원의 확신입니다.
3. 예수님은 우리가 구원의 확신을 통해 이 세상의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주님을 신뢰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에게 그 확신이 없을 때 쓰러집니다. 교회생활 아무리 해도 소용없습니다. 봉사 아무리 해도 소용없습니다. 주님께 대한 확신이 없으면, 주님을 바라보지 않으면 한순간에 넘어집니다. 베드로를 보십시오.
“30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 지라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주님께 대한 확신이 자기의 확신으로 변할 때, 복음에 대한 확신이 세상에 대한 확신으로 변할 때, 그러면 물 속에 빠져들어가게 됩니다. 베드로도 그렇고 우리도 그렇습니다. 목사도 장로도 권사도 집사도 확신이 없으면 다 빠져 들어가게 됩니다.
주님은 그렇게 확신을 잃어버린 자를 긍휼히 여기십니다. 그리고 그를 붙잡아 주십니다. 이것은 확신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바라봄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바라보지 않고 다른 것을 바라보니까 그런 문제가 생겨났습니다. 그런 상황을 불쌍히 여기시면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31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이제 그 예수님의 손처럼 우리도 믿음이 적은 자를 붙들어 주어야 합니다. 왜 의심하였느냐구요. 왜 의심하느냐구요. 왜 확신을 갖지 못하느냐구요. 그래서 구원의 확신이 없다고 한다면 이렇게 말해 줄 수 있습니다.
“당신을 변화시키기를 원하시는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 희생하신 예수님을 의지해서 구원의 확신을 가져보십시오.”
예수님의 죽으심이 그의 생각보다 더 크심을 알려주십시오. 예수님의 부활하심이 그의 판단보다 더 우월하다고 알려주십시오. 예수님의 약속이 그의 계획보다 더 뛰어나다고 말해주십시오.
4. 개인적인 신앙의 확신을 통해 주님을 더욱 고백하고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삶을 사는 자들이 됩시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구원의 확신이 있습니까? 여러분에게 그렇게 말해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그 어떤 것보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이 크시다구요. 그러니 그분을 의지해서 구원의 확신을 가지십시오.
우리가 구원의 확신을 가질 때만이 물에 빠지지 않을 것입니다. 흔들리지 않고 주님을 붙들고 나아갈 것입니다. 일제시절 모든 사람들이 신사참배에 따를 때에 오직 주기철 목사님만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신앙을 지켰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그때의 실수를 회개하며 다시는 그렇게 살지 않기를 노력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역사는 반복되고 있습니다. 지금도 구원의 확신이 없을 때에 세상의 유혹과 시험에 넘어지며 쓰러집니다. 그로 인해서 악하게 되고 하나님의 영광을 땅에 떨어뜨립니다. 우리는 구원의 확신을 굳게 붙들어서 다시는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지 말고 오직 물에서 건져내어 주시는 예수님만 확신합시다. 그래서 베드로가 다시 일어서는 것처럼 다시 일어서서 더욱 성장하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일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합시다. 우리가 세상의 유혹이라는 물에 빠지지 않고 주님께로 잘 나아가게 해달라고 통성으로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