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충만] 61벧후 1; 5-9 부지런하여 열매있는 자의 모습Loading the player... Loading the player... *
61벧후 1; 5-9 부지런하여 열매있는 자의 모습_1
2019. 1. 13. 주. 주일오전.
*개요: 신앙의 소원을 삶에 이룸, 56충만, 6서신서, 2분석 [벧후]1:5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벧후]1:6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벧후]1:7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벧후]1:8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벧후]1:9 이런 것이 없는 자는 맹인이라 멀리 보지 못하고 그의 옛 죄가 깨끗하게 된 것을 잊었느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곳에서 어떤 일을 하든 신앙인으로서 신성한 성품을 나타내 보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 신성한 성품으로 인해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되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미치는 어떤 영향력이나 좋은 이미지도 의미가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그것이 우리 자신에게 중요하고 필요하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건강한 습관으로 인해서 건강을 유지하면 다른 사람들에게 좋게 보이기도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그것이 자기 자신에게 유익합니다. 그와 같이 신성한 성품에 참여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에게 나타내는 좋은 영향력이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렇게 해서 자기 자신이 정욕으로 인해 썩어지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소망으로 인해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사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노아의 방주도 생각해 보십시오. 노아는 자기가 탈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그 방주를 만들고 자신과 가족과 많은 생물들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어떤 다른 일을 해서가 아니고 물에 빠지지 않는 구조물을 만들었을 때 그 구조물을 통해 구원받았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세속에 빠지지 않는 성품을 통해서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에게 있습니다. 이러한 기준은 과거나 현재나 미래가 동일합니다. 신앙생활의 환경이 좋거나 나쁘거나 삶의 수준이 높거나 낮거나 동일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분명한 신앙의 원리가 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신성한 성품’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어떤 것이 하나님께서 참여하게 하기를 원하시는 ‘신성한 성품’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오늘 성경말씀에서는 바로 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신성한 성품에 대해서 5절부터 7절까지 나와 있습니다. “[벧후]1:5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벧후]1:6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벧후]1:7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여기에 나오는 믿음에 더하여 지는 ‘덕, 지식, 절제, 인내, 경건, 우애, 사랑’의 일곱 가지 모습이 바로 신성한 성품입니다. 우리는 이 신성한 성품에 참여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성품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가장 인생에서 기본적인 모습이면서 어쩌면 세상 사람들에게도 이미 있는 덕목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원하십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세상 사람들의 덕목과 비교해서 구별되며 특별한 의미를 갖는 이유가 있을까요? 중요한 것은 ‘덕, 지식, 절제, 인내, 경건, 우애, 사랑’이 제각각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도 이러한 성품이 있고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지만 비슷하게 교육을 하기도 합니다. 또한 누가 보기에도 이 일곱 가지 성품이 아주 특별한 그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핵심은 바로 이러한 성품들이 믿음에 더하여진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믿음에 덕을 더하는 것이지 단순히 덕 그 자체가 의미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 일곱 가지 성품이 서로 연결된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믿음에 덕이 공급되고 그 덕에 지식이 공급됩니다. 그 지식에 절제가, 인내가, 경건이, 우애가, 사랑이 공급됩니다. 이것은 한 개인이 스스로 의도적으로 만들어내거나 혹은 날 때부터 가지고 살아가는 덕목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신앙의 소원을 삶에 이루고자 하는 간절함을 가지고 있는 그분의 백성들에게 이루시는 놀라운 변화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이 성품이 신성한 성품이 되는 것입니다.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공급하심으로 이루어지는 특별한 변화입니다.
조각상으로 유명한 미켈란젤로의 걸작인 ‘피에타’상에는 재미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그는 24세에 이 대리석을 깎아만든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이 작품 하나로 그는 일약 대스타가 되었지만 사람들이 조각상에 대해서 찬사를 보내면서도 정작 그 조각상을 만든 자신에 대해서는 많이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을 보면서 밤에 몰래 이 상에 진열된 성당으로 가서 자신의 이름을 조각했다고 합니다. 성모 마리아의 옷을 가로지르는 레이스 옷깃에 자세히 보면 ‘피렌체의 미칼렌젤로 부오나로티가 만들었다’라고 쓰여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 작업을 마치고 돌아올 때 밤 하늘을 보니 너무 아름다웠습니다. 그 아름다움을 보면서 미켈란젤로는 이렇게 생각했다고 합니다. ‘세상을 이렇게 아름답게 만드신 하나님은 자신의 작품 어디에도 서명을 넣지 않았는데 나는 옹졸하게 사람들의 반응에 발끈해서 조각상에 서명을 남겼구나’ 그 이후로 그는 한번도 자신의 작품에 서명을 남기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러한 행동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밤하늘만 아름답게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들을 이렇게 아름답게 만드셨습니다. 또한 더욱 아름답게 만들어 가십니다. 그 손길이 바로 우리가 신성한 성품에 참여할 때 나타납니다. 이러한 놀라운 작품을 우리 자신의 마음과 삶 속에 만들고자 하실 때 우리는 그분의 손길에 순종하면서 주님이 만들고자 하는 놀라운 성품을 함께 만들어 가야 합니다. 이렇게 만들어지는 성품에는 하나님의 서명이 들어가지 않지만 누가 이러한 아름다운 모습을 만들었는가를 묻는다면 당연히 하나님께서 이루셨음을 고백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손길을 따라야 합니다.
이제 하나 하나의 덕목이 믿음에 추가되는 것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먼저 믿음에 덕을 공급하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덕은 영어로 virtue이고 헬라어로는 ἀρέτη 라고 합니다. 믿음은 신성한 성품의 시작입니다. 그 시작 이후에 성도에게는 덕이 필요합니다. 덕은 ‘인격적인 능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욕심내지 않고 도리와 이치를 따지는 도덕적인 덕목이 있어야 합니다. 찰흙으로 공예작품을 만든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철사로 뼈대를 만든 다음에 찰흙을 붙여서 모양을 만듭니다. 뼈대만으로는 모양을 만들 수 없고 찰흙만으로도 모양을 만들 수 없습니다. 뼈대가 있고 그 위에 찰흙이 있을 때에 적절한 찰흙 공예작품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와 같이 믿음만 있고 덕이 없다면 앙상할 것입니다. 또한 덕이 있지만 믿음이 없다면 무의미할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에 덕을 공급할 때 비로소 아름다운 성품이 나타납니다. 혼자만의 믿음 생활은 그 덕을 세워나갈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함께 있다고 해서 믿음이 저절로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믿음이 있고 그 위에 덕이 쌓여질 때에 비로소 적절한 신앙생활의 모습이 생겨납니다. 그 다음에는 이 덕에 지식을 공급해야 합니다. 지식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예수님에 대해서, 구원에 대해서, 믿음에 대해서, 성경에 대해서 알아갈 때에 믿음과 덕이 온전해질 수 있습니다. 얼마나 많이 아느냐가 결국은 얼마나 신성한 성품으로 채워지느냐를 결정합니다. 또한 시간이 흐르면 믿음과 덕은 쇠하여지게 됩니다. 그것이 변질되지 않도록 하나님에 대해서 더 많이 알아 갈 때에 모든 부패와 변질을 막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지식에 절제를 공급합니다. 절제는 영어로 temperance, 헬라어로 ἐγκράτεια 로 self-control 을 의미합니다. 단순히 아는 것만으로는 안됩니다. 그 아는 지식이 삶 속에 의미있게 나타나려면 자기 삶에 대해서 절제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절제를 통해서 단순히 알기만 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실천으로 나타나서 생활 속에서 의미가 있게 해야 합니다. 법을 잘 알고 있다면 어떻게 해야 올바르게 사는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위법적인 것을 피해서 적법한 과정과 절차를 지킬 수 있습니다. 하지만 법을 잘 알고 있어도 법을 지키려고 하지 않는다면 법은 안다는 것은 오히려 더 많은 위법을 저지를 수 있습니다. 법의 한계를 이용하여 악을 저지르려고 한다면 법을 모르는 사람보다 더 악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식에는 절제가 공급되어서 지식의 한계를 넘어서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절제에는 인내가 공급되어야 합니다. 모든 절제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단순한 노력이 아닙니다. 의지도 아닙니다. 인내하려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유혹을 인내할 수 있을 때에 온전한 절제가 가능해집니다. 이러한 인내를 하면서 경건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 인내가 세속적인 인내라면 하나님의 모습과는 상관이 없지만 그 인내가 경건한 인내라면 하나님께로 더욱 나아가는 모습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탄으로부터 ‘돌을 떡으로 만들라’고 시험받았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라’는 시험을 받으셨을 때에 예수님은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그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또한 모든 세상 영광에 대해서 시험받으셨을 때에 예수님은 ‘주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고 하였을 때 사탄의 시험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절제나 인내도 경건과 연결되어야 비로소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것이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경건이 사람들을 미워하고 배척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경건에 우애를 공급해야 하고 그 우애에 사랑을 더하여야 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사랑하는 위대한 두 계명을 완성하는 온전한 성품을 나타내게 됩니다. 결국은 이 일곱 가지 덕목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고 전부 추구되어야 하는 모습입니다. 한 개인이 태어나면서부터 혹은 자신의 의지와 노력으로 한 두개의 덕목을 추구할 수는 있어도 믿음 위에 일곱 가지의 덕목을 끊임없이 공급하게 하시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 의지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으며 하나님과의 교통과 교제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덕목들을 하나님 안에서 이루고자 할 때 신성한 성품이 우리 속에 형성되어 집니다. 발레를 하는 사람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이 유연하며 우아하고 역동적인 모든 동장을 날마다 연습할 때 결국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그들 자신이 얼마나 균형잡힌 모습을 갖게 되겠습니까? 그와 같이 우리도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고자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며 나아갈 때 결국에는 하나님의 사람들의 모습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을 닮은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그렇게 사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 뒤를 따라가는 자들입니다. 우리의 모든 신앙생활과 교회생활과 삶의 모든 모습들 속에서 그러한 예수님의 모습이 나타나기를 원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부지런하며 열매있는 모습이 됩니다. 주님 앞에서 바로 우리 자신이 열매가 되는 것입니다.
만약 그것이 우리 신앙생활의 모습이 아니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것이 우리의 목표나 이루고자 하는 뜻이 아니라면 우리의 모습은 한없이 악해질 수 있습니다. 8,9절을 보십시오. “[벧후]1:8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벧후]1:9 이런 것이 없는 자는 맹인이라 멀리 보지 못하고 그의 옛 죄가 깨끗하게 된 것을 잊었느니라” 이런 것이 우리에게 있으면 흡족하고 우리가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합니다. 그래서 부지런하고 열매 많은 자가 됩니다. 하지만 이런 것에 목표를 두지 않으면 그 모습은 맹인과 같습니다. 멀리 보지 못하고 자신의 죄가 깨끗하게 된 것을 잊어 버리는 자가 되어버립니다. 여기서 멀리 보지 못한다는 것은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모습이 되는지를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멀리 내다 보면 이렇게 하는 것이 어리석은 것이라는 사실이 드러날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말아야 겠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멀리 생각을 하지 못하고 당장만 생각하느라 자신이 행하는 일이 앞으로 어떠한 부끄러움이 될 지를 생각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자신의 옛 죄가 깨끗하게 된 것을 잊어버렸다는 것은 과거의 삶을 청산해야 하는데 여전히 그 죄에 얽매여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여 주신 예전의 죄를 여전히 반복하며 살아갈 때에 그는 계속해서 죄인일 수 밖에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은 결국 자기 자신에게로 다 돌아옵니다. 그는 부끄럽고 창피하며 얼굴을 들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릴 것입니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 오늘도 우리는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없는 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 모든 것은 자신에게 신성한 성품이 얼마나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생각할 때 생겨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시고 기뻐하시는 신성한 성품을 이루기 위해서 오늘도 신앙의 소원을 가지고 삶을 살아가는 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당연하고 서로 격려가 되고 소망이 되는 우리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가 하나님 앞에서 분명해지고 성도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서 귀한 열매를 많이 맺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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