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그의 건강한 몸을 다시 맞아 들이게 됨을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28 저가 노하여 들어가기를 즐겨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29 아버지께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30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31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32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누가복음15장에 나타나는 이 탕자의 비유는 근본적으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때문에 생겨났습니다. 애초에 그들은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려고 예수님께 나아왔을 때에 불평을 했습니다. 예수님이 죄인들을 영접하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같이 먹는다고 불평하였습니다. 그것은 죄인들이 받아들여지고 그들이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데에
대한 반감의 표현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이렇게 세리와 죄인들을 싫어하고 용납하려고 하지 않는데 대해서 탕자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1절을 보십시오.
“1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2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원망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3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그렇기 때문에 탕자의 비유는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로 돌아와서 모든 것이 해피엔딩으로 끝나고
즐거워하게 되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정말 중요한 부분이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재산을 상속받았을
때 떠나지 않았던 첫째 아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이 탕자의 비유에서 더 중요하고 핵심적인 부분이었습니다. 그래서 탕자의 비유는
애초에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세리나 죄인들을 위한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세리나 죄인들을 싫어하고 비난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원래 바리새인들은 이스라엘의 바리새파에 속해서 경건과 거룩을 위해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또한 서기관들은 어려서부터 성경말씀에 능통해서 구약의 말씀을 암송하며 그 말씀을 필사하며 연구하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당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말씀하셨을 뿐만 아니라 또한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도 말씀하십니다. 이 탕자의 비유는 예수님 시대의 ‘그들’에게
대한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시대의 ‘우리’에게 대해서 주어지고 있습니다.
어느 시대에나 어느 사회에나 성경에 나오는 세리와 죄인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있고,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만약 죄인과 세리에 대해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생각을
하고 있다면 우리가 바로 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같은 자들이 되어버립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용서를 해주셨지만 우리는 용서를 하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탕자의 비유를 통해서 첫째 아들에 대해서 그의 아버지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맏아들이기도 하고 첫째 아들이기도 한 큰 아들과 탕자이기도 하고 둘째 아들이기도 했던 작은 아들의 차이점은 집을 떠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큰 아들은 한번도 집을 떠나본 적이 없었습니다. 바로 그랬기 때문에 뭔가 불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난 한번도 일탈을 해본 적도 없고 난 한번도
반항도 해본 적도 없고 난 한번도 불평을 해본 적도 없다’는 것이 바로 큰 아들입니다. 이것은 출생순위가 문제가 아닙니다. 첫째 아들이 떠나고
둘째 아들이 남아있을 수도 있습니다. 에서와 야곱의 경우에서는 큰 아들인 에서가 아버지 이삭을 떠났고 작은 아들인 야곱이 이삭과 함께 있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한번도 집을 떠나본 적도 없고 명령을 거역해본 적도 없던 큰 아들은 아버지에게 이렇게 하소연합니다.
“29 아버지께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30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큰아들이 정말로 원한 것은 무엇일까요? 정말 염소새끼를 달라는
것일까요? 아니면 둘째 아들에게 살진 송아지를 잡아주지 말란 뜻인가요? 이러한 말을 우리는 모태신앙인 사람들에게서 듣습니다. 어려서부터 교회에
다녔던 사람들이 새롭게 믿은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종종 이러한 고백을 합니다. 자신은 교회안에서 자랐고 성장했지만 오히려 그래서 신앙이 미지근하다는
것입니다. 자신에게는 일탈이나 방황이 없었기 때문에 오히려 그래서 신앙에 감사가 없고 감격이 없다고 말합니다. 자,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모태신앙인 자들도 일탈을 좀 경험해 보아야 하나요? 반항도 좀 해 보아야 감사와 감격을 가질 수 있을까요? 아니면 새로 믿은 자들에게는 은혜나
은사가 있으면 안되는 것일까요? 그들에게 구원의 즐거움과 기쁨이 너무 넘쳐나면 안되는 것인가요?
이러한 구도는 모태신앙인가 아닌가로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교회에
온지 오래된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나타납니다. 새로온 사람들을 위해 신앙이 초보인 성도들을 위해 교회가 송아지를 잡을 때, 혹은
송아지를 잡는 듯한 그런 관심과 애정을 기울일 때에 오래된 성도들과 기존의 성도들이 불평을 시작합니다. ‘목사님은 변했어요, 나에 대한 관심이
사라졌어요, 교회는 새로온 어떤 사람들 중심으로만 움직여요’ 자,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새로 오는 사람들에게는 송아지는 커녕 닭한마리라도 잡아주면 안되는 것일까요? 애정과 관심은 절대 기울이면 안되는
것일까요? 기뻐하고 즐거워하면 안되는 것일까요? 아니면 상대적으로 기존교인들이 더 높아지고 더 존경받아야 한다는 것인가요?
뿐만아니라, 성경과 신학에 조예가 깊은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서도
동일한 구도가 생깁니다. 어떤 사람들은 신앙서적을 많이 읽고 신학을 공부하고 성경본문을 암송하고 그 암송한 내용대로 살아가려고 하는 간절함이 있는데
반해서,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신앙서적을 읽어본 적이 없고, 유명한 기독교 저술가에 대해서도 잘 모르고, 훌륭한 신학자나 그들의 신학이나
그들의 주석을 본 적이 없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자신이 읽은 성경말씀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 속에서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럴 때 그 모습은 잘못된 것일까요? 그가 정규신학과정을 하지 않았기에, 그가 정식으로 성경을 배운 적이 없기에, 그가 성경을 몇번
통독을 해본 적도 없기에, 새벽기도를 하지 않기에, 은사를 받은 적이 없기에, 그런 즐거움은 옳지 않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어떤 식으로든지
그와 하나님의 관계가 형성되는데에 있어서 이런 저런 것이 잘못이라고 말할 수 있는 어떤 근거가 존재할 수 있을까요?
사실, 그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가 좋다면 그것은 기쁜일이 아니겠습니까?
그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그를 받아주셔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그가 즐거워한다면 그것은 그 자체로 만족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도
그 모든 것을 폄하하며 비판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먼저된 자들이 가질 수 있는 이러한 모든 생각들은 인간적인 기준으로 판단하고 재단해서 낮추려고
하는 것입니다. 최소한 나보다는 낮게 만들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기준으로 올라가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기준으로 내리려는 마음입니다. 모든 것을 자기 뒤에 놓고 싶은 것이지요. 나보다는 못한 상태로 존재하게 하고 싶은 것이지요. 그렇게
해서 결국 원하는 것은 내가 높아지는 것입니다. 내가 여전히 신앙에서 앞선 사람이 되고자 하는 마음, 내가 여전히 먼저 교회에 온 사람이 되고자
하는 마음, 내가 여전히 신앙에서 높은 위치에 있고자 하는 마음, 그런 마음들이 하나님의 더 깊은 속뜻을 알지 못하는 안타까운 마음들이 되어버립니다.
하나님이 정말 원하시는 그 무엇인가가 있는데 그것을 알기보다는 자기 수준만큼 이 모든 세계의 수준을 격하시켜 버리려는 것입니다. 슬프고도 안타까운
일입니다.
저희 집에서 둘째가 태어났을 때 큰애는 열살이었습니다. 큰애와
둘째 사이에 나이차이가 너무 많았습니다. 저희 부부는 큰 애가 혹시 새로 태어난 동생으로 인해서 소외감을 느끼지는 않을까를 걱정했습니다. 자연히
엄마 아빠는 동생에게 신경을 많이 쓰게 되고 동생때문에 분주해지니까 언니로서 뭔가 부족함을 느끼게 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큰애는 별로 그런 것에 자극은 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었지요.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우리의 생각이 완전히 틀렸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큰 애는 소외감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개인주의에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동생을 잘 돌보지 않았습니다. 동생을 돕는
것을 힘들어했던 것입니다. 우리 부부는 이 문제와 씨름을 했습니다. 얘기도 많이 했고 혼도 많이 냈고 기도도 많이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소외감도
아니고 개인주의도 아닌 진정한 가족의 의미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 때 우리가 했던 핵심은 이것이었습니다. 아이를 그 자신의 미성숙한 마음에
내버려 두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마음으로 성장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이의 마음이 이미 잘못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이렇게 저렇게 고친다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오직 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마음이 자라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빠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고 엄마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그 마음을 나누었을 때에 비로소 큰애는 자신이 언니고 부모님의 귀한 큰딸임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도 이와 동일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옹졸한 수준으로 끝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우리 자신의 그 편협하고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세계관으로 신앙이 축소되어 버리기를 원하시지 않습니다.
그것은 정말 심각한 퇴행입니다. 자기손해입니다. 신앙인으로서 하나님의 자녀로 영광스럽게 신앙생활을 시작했지만 자기 권세와 자기 자리와 자기 위치에
연연하는 이기적인 바리새인과 서기관이 된다면 그것은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세속적인 인간으로 전락해버리고 마는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눈을
열어주십니다. 큰 아들에게 찾아온 아버지처럼 우리의 눈을 열어주십니다. 이 아버지는 큰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31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32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여기서 ‘얘’라고 번역된 부분이 영어로는 무엇일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영어로는 ‘My son’입니다. ‘내 아들아’라고 아버지는 큰아들을 불렀던 것입니다. 헬라어 원어로는 ‘teknon’,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아버지는 정겹게 그 아들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말하였습니다. 항상 아버지와 함께 있어서 얻은 것은 아버지의 모든 것이었습니다. 큰 아들은
아버지가 자기에게 송아지 하나 내주지 않아서 즐기지 못했다고는 하나 그것을 원하지 않은 이유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다 자기 것인데
그렇게 허비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지요. 그것이 바로 큰아들의 위치였습니다. 이미 아버지의 충만한 사랑 안에 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모태신앙인 사람들이 왜 일탈과 반항을 경험해야만 합니까? 그들은
이미 교회에서 자랐고 선에 익숙한 사람들이지 않습니까? 어려서부터 신앙생활이 몸에 체화된 사람들이 아닙니까? 교회에 다니고 교회사람들과 교제하며
헌금을 하고 교회일을 하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문화가 된 사람들이 아닙니까? 이미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 영광을 받으시고 계십니다. 교회생활을
힘들게 힘들게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고 계십니다.
교회에 먼저 온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그들을 통해서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어차피 교회를 나가는 것이고 어차피 십일조를 내고 헌금을 하는 것이 일상생활이고 당연히 교회봉사를 하는 것이고 또 그것을 당연히 여기는 사람들을
통해서 교회는 주님의 사명을 감당하게 됩니다. 그들을 통해 하나님은 새로운 일을 이루십니다. 더 세워지고 더 채워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느정도
받쳐주는 사람들이 있어야만 하나님의 일을 존재할 수 있습니다. 먼저 온 사람들은 그렇게 가장 기본적인 바탕인 토대를 만드는 교회의 주춧돌이요 교회의
기둥들입니다. 두드러지지는 않지만 그속에서 분명한 의미를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자들이 진정으로 교회를 이루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이 가을에 류현진 선수가 미국프로야구에서 선전하고 있다는 소식은 박찬호를 잇는 즐거운 소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원래 야구는 미국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영국에서는 크리켓이라는 운동이 있지만 본격적인 야구는
미국에서 1845년 뉴욕의 알렉산더 카트라이트라는 사람이 근대 야구의 규칙을 확립함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미국 사람들은 야구를 즐깁니다.
선수나 관중이나 모두 즐거워합니다. 반면에 영국사람들은 야구를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야구를 싫어한다고 합니다. 비신사적인 운동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대신 크리켓이라는 운동을 합니다. 그러니 류현진 선수가 미국으로 가니까 환영을 받는 것이지 영국으로 갔다고 해보십시오. 영국에서는
찬밥신세를 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나아오는 사람들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안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만약 먼저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람들이 새롭게 하나님께 나아오는 사람들을 존경하고 격려하며 귀하게 여겼다면 더욱 기쁨으로
하나님 안으로 들어오려고 했을 것입니다. 신학자들이 성도 개개인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중시하며 그들의 이해와 깨달음을 격려하였더라면 성도들은 더욱
성경을 읽으면서 기쁨을 누렸을 것입니다. 또 정말 잘 모르는 부분에 고견을 구하고 자문을 얻고자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먼저된 자들이 신앙의 기쁨을
희석시키고 감소시켰을 때 결국에는 관심이 사라졌습니다. 또한 신앙도 약화되었습니다. 먼저 있는 자들이 나중된 자들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 생산과
소멸의 원칙에 따라서 자연히 교인은 줄어들게 됩니다. 사람들의 보람과 즐거움도 사라집니다. 결국 그속에 하나님의 기쁨도 사라집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그렇게 만들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아버지의 음성으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2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관점으로 바라볼 때만이 죽었다가 살아난 것이,
잃었다가 얻은 것이 기쁨이 됩니다. 즐거움이 넘칩니다. 그것이 당연해집니다. 그때에야 비로소 우리의 마음 속에는 인간적인 기준을 넘어서서 신적인
기준이 생깁니다. 나보다 앞섰는가 뒤섰는가 중요하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으로 기뻐하고 하나님이 즐거워하시는 것으로 즐거워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서 진심으로 주님께 나아오는
자들을 보며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되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뜻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제 큰 아들이 아버지의 설명을 들으며 이 중요한 것을 깨닫게 되기 그 이전에 그의 모습이 어떠하였가를
생각해 보고 마치려고 합니다.
“25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왔을 때에 풍류와 춤추는 소리를 듣고
26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27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그의 건강한 몸을 다시 맞아 들이게 됨을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28 저가 노하여 들어가기를 즐겨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맏아들이 밭에서 열심히 일하고 돌아왔을 때 그는 집에서 풍류와 춤추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물어보니 그 풍류와 춤추는 소리는 자기를 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당신의 동생’이라는 말도 듣기는 했지만 그 동생은
이미 자신에게는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일 뿐이었습니다. 내 동생이 아니라 그 아들일 뿐이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자신을
위한 춤과 노래가 아니었고 아버지를 위한 춤과 노래도 아니었고 동생을 위한 춤과 노래였습니다. 자신이 뒤쳐졌고 소외되었다는 생각에 분노가 시작되었고 집에 들어가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현실속에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같은 그리스도인들의 축복과 은혜에 배가 아파합니다. 세상 사람들의 패망과 심판에 기뻐하고 같은 그리스도인들의 실패와 좌절에 만족해 합니다. 그런 시대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그런 심정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거기에서 모든 갈등과 오해가 시작되었지만, 우리가 그렇게 하지 맙시다. 거기에서 다르게
한다면 어떻게 다르게 했을까요? 이 모든 하나님의 시각과 그 마음과 그 속뜻을 이해하고 있는 여러분 같으면 그럴 때 그 이야기를 듣고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하나님의 용서하심이 선포될 때 그 용서하심이 기쁨으로 축복으로 나타날 때 축하해 줍시다. 그리고 그 기쁨으로 들어갑시다. 아버지의 집으로 들어가 그 즐거움에 동참하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조용히 빠져나가서 분노와
억울함과 잘못된 오해에 스스로를 망치는 자들이 되지 말고, 우리들의 아버지 하나님의 기쁨과 즐거움에 그 진실하신 사랑하심과 용서하심에 동참하여,
그로 인해 그 기쁨이 우리 삶속에 충만한 진정한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의 그 넓은 마음을 갖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