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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용서] 44행4; 1-12 구원을 얻을 유일한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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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행4; 1-12 구원을 얻을 유일한 방법_1

 

 2013.4.28.주. 주일오전,  주제설교-용서

 

*개요   {4복음서신서} <1적용> [4욕구]-[5은혜]

 

1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1)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2    백성을 가르침과 2)예수를 들어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하는 도 전함을 싫어하여

3    저희를 잡으매 날이 이미 저문고로 이튿날까지 가두었으나

4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

5    이튿날에 관원과 장로와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는데

6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예하여

7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8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가로되 백성의 관원과 장로들아

9    만일 병인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얻었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하면

10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11    이 예수는 ㄱ)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12    다른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우리는 4월 한달 동안 하나님과의 만남을 생각했습니다. 그 만남에 대해서 지난 3주동안 이야기를 했는데 그 만남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여러 이야기들 중에서 여러분에게 기억남은 것은 무엇입니까?

 

정말 우리가 하나님의 만남을 사모하고 그 만남의 의미를 깨닫기를 원한다면 그것은 ‘용서’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용서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죄사함을 받은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점을 중요하게 여겨야 합니다. 용서를 통해 비로소 우리는 주님과 진정한 관계를 갖게 됩니다.

이것은 마치 집에 들어갈 때 신발을 벗는 것과 같습니다. 신발을 신고 집에 들어간다면 그것은 침입자일 것입니다. 신발을 벗고 들어갈 때 진정한 관계가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와 주님과의 관계에서도 용서로 나아갈 때에 진정한 관계를 이루게 됩니다. 용서받고자 할 때에 참된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오늘날 이러한 이해는 일반적이지는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용서받고자 주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용서해 드리려고 주님을 만나고자 합니다. 그래서 주님을 용서할 수 있는 사람들만이 주님께 나아옵니다. 하나님의 일을 용서하고 참고 견딜 수 있는 사람들만 교회로 나아옵니다. 더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용서할 수 없기 때문에 나아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나아왔다 하더라도 그들은 진정으로 주님을 만난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주님을 용서하려는 한 그들은 주님께로 나아올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용서를 받는 자들이지 주님을 용서하는 자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자신들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는 결코 듣기 좋은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1.    회개의 복음을 믿는 자가 있었고 믿지 않는 자가 있었다.

 

오늘 말씀에서 베드로가 ‘회개하여 죄사함을 받으라’고 했을 때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관원들이었습니다. 사실 예루살렘 한 복판에서 일어난 이 용서의 복음의 선포와 회개의 촉구를 이방인들이 들을 수는 없었습니다. 설사 들었다 하더라도 이러한 내용을 이방인들이 이해할 수는 없었습니다.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은 자들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그 관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 회개의 촉구에 대해서 그들의 반응은 명백하게 두 가지로 나뉘었습니다. 그것은 죽은 자의 부활을 믿는 자와 그것을 믿지 않는 자로 나뉘는 것이었습니다.    

“1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2    백성을 가르침과 예수를 들어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하는 도 전함을 싫어하여”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들과 사두개인들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님 이야기 하는 것이 싫었습니다. 그들은 베드로가 말한 죽은 자의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예수님은 자신들이 죽인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싫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동일한 이야기를 믿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4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

 

오히려 숫적으로는 믿는 자가 더 많았습니다. 베드로의 회개의 촉구를 듣고 죽은 자의 부활을 믿은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어서 그들이 교회로 들어왔습니다. 그들이 믿은 것은 자신들이 죽인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죄사함을 받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아까 믿지 않는 자들은 복음 전하는 것을 싫어하는 자들이 되었지만 믿는 자들은 복음 전하는 것을 좋아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복음에 대해서 거부하는 사람들과 순종하는 사람들로 나뉘게 된 것입니다.

각각은 자신의 입장을 더욱 구체화 하였습니다. 복음에 대해서 순종하는 자는 교회로 들어왔지만, 복음에 대해서 반대하는 자들은 베드로와 사도들을 붙잡았습니다.

“3    저희를 잡으매 날이 이미 저문고로 이튿날까지 가두었으나”

 

이러한 근본적인 용서에 대한 반응의 차이가 결과적으로 그들의 행동과 태도와 삶을 결정지었습니다. 

 

 

2.    지금도 회개의 복음을 받는 자가 있고 거부하는 자가 있다.

 

그때 이후로 지금까지 여전히 회개의 복음은 뜨거운 논쟁거리입니다. 예수님이 단지 성인이었거나 혹은 위인이었거나 위대한 스승이었다면 예수님으로 인해 이러한 일들은 생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우리 때문에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이 부분때문에 회개의 복음이 전파됩니다. 기독교인들은 회개를 통해서 진정한 용서받음의 관계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정말 더 중요한 문제는 바로 기독교인들이 회개함으로 용서로 나아가지 않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믿음이 있으나 회개가 없다면 그것은 결국 우리 자신이 그 용서의 복음을 거부하는 자가 되는 것밖에는 되지 않습니다. 

여기에 관한 아주 중요한 장면이 5절부터 나타납니다.

“5    이튿날에 관원과 장로와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는데 6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예하여  7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베드로가 자꾸만 죽은 자의 부활을 전파하자 그것을 싫어하였던 관원들이 그를 법정에 세웠습니다. 그 자리에는 예수님을 죽였던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다른 대제사장들 요한, 알렉산더 및 대제사장 문중이 다 참여하여 사도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들은 이전에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죽여달라고 넘겨주었던 바로 그 장본인들이었습니다. 과연 그들에게 베드로는 뭐라고 말했을까요? 지금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된 한 사람을 베드로가 고치면서부터 이 모든 복음의 전파가 이루어졌는데, 과연 베드로는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일을 행하였다고 말할까요?

그의 대답은 분명했습니다.

“8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가로되 백성의 관원과 장로들아   9 만일 병인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얻었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하면  10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그는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았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병인이 구원받았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말이 얼마나 그 자리에 앉아있던 대제사장들의 마음을 후벼팠겠습니까?  하지만 그 말은 이전의 백성들에게 하던 말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습니다.

“3: 14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자를 부인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15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이 동일한 말을 듣고도 대제사장들과 관원들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회개했습니다. 그 차이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차이였습니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은 대제사장들은 비록 하나님은 믿었으나 예수님을 믿지 못했고, 자신의 죄를 인정한 백성들은 하나님도 믿고 예수님도 믿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완전한 용서가 있다는 말 그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이 자신의 죄를 인정한다는 것을 의미함을 보여줍니다.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말은 결국 자신이 잘못 생각했고 잘못 판단했고 잘못 행동했음을 받아들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완전히 용서해주십니다. 그 모든 죄를 사해주실 수 있을 만큼 예수님의 죽으심은 가치있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도 우리가 이것을 받아들일 때 온전한 믿음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이것을 거부한다면 우리는 온전한 믿음으로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회개의 복음을 받아들인 백성들과 복음을 거부한 관원들의 차이가 나타나게 됩니다.

 

 

3.    우리는 용서받은 자로서 주님께 회개하는 자들이 되자.

 

우리나라에는 개인파산을 통해서 채무를 탕감해 주는 정책이 있습니다. 그렇게 채무를 탕감받으면 더이상 빚을 갚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개인파산을 신청해야 하고 판사 앞에서 빚을 탕감받아야 합니다. 정말 절박하고 괴로운 상황에 놓인 국민을 구제하기 위해서 국가에서 시행하고 있는 정책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채무를 탕감 받을 수 있다 하더라도 개인파산을 신청하지 않는다면 효력이 생기지 않습니다. 아무리 용서해 주려고 해도 회개하지 않는한 무의미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모습 속에서 회개와 용서의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용서는 우리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신적인 행위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늘 주님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하고 주님을 알아갈 수 있게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용서를 늘 사모하고 받고자 할 때에 항상 그 용서의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늘 한 가지 조건이 따릅니다. 그것은 회개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회개를 해야 용서의 은혜를 누릴 수 있지 회개하지 않으면 용서의 은혜가 임하지 않습니다. 회개도 하지 않으면서 용서받으려고 하니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상태가 일어납니까?

 

개인파산을 신청하면 모든 금융거래가 정지됩니다. 그건 결코 기분 좋은 일은 아닙니다. 자존심 상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수치스러운 상황이 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는 스스로 노력해서 그 채무를 갚으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채무가 아닌 우리의 죄값이란 죽는다고 해결되지 않습니다. 스스로 노력해서 그 죄값을 갚을수도 없습니다. 너무나 크고 중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회개는 없으면서 용서를 구하고자 할 때 사람들에게 전해지는 회개의 복음은 변형됩니다. 지난 20일 미국의 어떤 유명한 목사님이 커다란 야구장에서 많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했던 설교의 한부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선하심을 구하는 자들에게 선을 베풀기를 기다리신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할 때, 하나님께서도 항상 우리를 귀하게 여기실 것이다.

어제의 독약을 오늘로 가져오지 말라. 어제 여러분이 했던 실수를 용서하라. 과거로부터 배우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 외에 여러분이 과거에 대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몹시 화가 난 분이 아니다. 여러분의 죄는 이미 용서받았다.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은 다만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이다.”

 

저는 이러한 잘못된 용서에 대한 구체적인 소개가 얼마나 우리들을 오해하게 만들까 걱정됩니다. 하나님께 대한 설명은 맞기는 하지만 무엇인가가 빠졌습니다. 그것이 인간적인 부분으로 채워져 버렸습니다. 그 빠진 것이 바로 진실한 회개입니다. 주님은 회개하신 심령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시편 말씀이 이부분을 잘 설명해 줍니다.

“시편 51:17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이러한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님이 받으십니다. 그리고 구원자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어루만지시고 용서해 주십니다. 회개하지 않는 강퍅한 마음에 용서를 더덕 더덕 붙이시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는 진실한 마음에 용서로 그 죄를 하나 하나 씻어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행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또한 우리가 받아야만 하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4.    진정한 구원은 용서함을 받아 주님과 함께 하는 것이다.

 

오늘 말씀은 한 병자에게 일어난 놀라운 기적에 대한 베드로의 설명이었습니다. 여기에는 구원이라는 단어가 치유라는 의미로 혼용되어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몸의 나음이 결국은 영혼의 구원이라는 궁극적인 의미로 연결되는 것을 보여줍니다. 단지 몸의 문제로부터 구원을 받는 것이 구원이 아니라, 진정한 구원은 주님을 믿고 따라서 건강하게 되어 주님을 따르는 것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0절입니다.

“10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11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12    다른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겉으로는 이 사람의 몸이 건강하게 되어 사람들 앞에 선 것에 관한 이야기이지만, 그가 그냥 치료를 받고 나은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아서 서게 되었기 때문에, 그는 단지 몸만 나은 사람이 아니라 영혼도 구원받은 사람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원래 이렇게 건축자들이 버린 돌처럼 죽이심을 받은 분이시지만 그로 인해서 모든 것이 다시 세워지는 머릿돌 같은 분이십니다. 그래서 오직 그분을 통해서만 이런 기사와 이적이 일어나고 오직 그분을 통해서만 구원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분 외에는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하나님께서는 주시지 않았습니다. 오직 그분을 통해서만 몸의 구원을 얻고 영혼의 구원을 얻게 됩니다.

 

성도여러분, 우리의 모든 문제에서의 구원도 바로 우리를 용서하시는 그분을 통해서만 가능함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분께 죄를 고백하며 회개함으로 용서받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의 마음의 문제가 해결됩니다. 몸의 문제가 해결됩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용서해 주시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 용서하심으로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놀라운 은혜를 기억하며 언제나 회개하며 용서받으며 새롭게 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래서 새롭게 된 자들로서 더욱 담대히 주님의 용서를 기뻐하며 감사하며 전파하며 살아가는 자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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