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13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14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16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17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어지이다 아멘
1. 사도 바울은 그 누구보다도 용서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입니다.
용서의 은혜를 통해서 신앙의 삶을 살아간 것은 단지 주님을 세번 부인했던 베드로 뿐만이 아닙니다. 주님의 부활하심 이후의 모든 성도들이 전부 이러한 용서의 은혜를 누리고 있습니다. 그 이전에 예수님은 단지 선지자요 랍비일 뿐이었지만, 부활하신 다음에 예수님은 메시야요 구세주요 죄를 사하는 분이심이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모든 성도들이 예수님과의 관계를 맺을 때에는 좋은 선생님, 친절하신 지도자 정도로 생각하게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과 관계를 맺을 때에는 반드시 나의 죄를 용서해주시는 분, 나의 구원자로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의 모든 삶 속에서 그러한 용서받음을 기뻐하며 감사하고 전파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예수님과 관계를 맺어가는 과정입니다.
우리가 새롭게 예수님을 믿게 된 주일학교 학생에게 예수님과의 관계를 소개해 준다고 합시다. 또는 여러분의 자녀들에게 예수님과의 관계를 소개해 준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과 나와의 관계는 어떤 관계일까요? 어떤 학생들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 혹은 밀접한 관계라고 말하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피상적인 대답입니다. 진정한 대답은 예수님은 나의 죄를 용서해주신 분이고 나는 그분을 통해 죄사함을 받은 사람입니다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과 예수님은 어떤 관계이신가요? 예수님은 여러분의 구세주이십니다.
이러한 관계가 평생 지속될 때 그는 가장 은혜로운 신앙생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 모태신앙이라고 해서 큰 차이는 없습니다. 날때부터 죄를 가지고 태어나지 않은 것은 아니니까요. 그 스스로가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정말로 주님이 내 죄를 용서해 주셨구나를 깨달을 때에 비로소 거듭나게 됩니다. 이러한 중생의 체험을 한 사람 중에서 그 고백을 가장 절실하게 들을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그처럼 파란만장한 삶을 산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가장 죄가운데 살았었고, 또한 누구보다도 가장 의가운데 산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은 사도 바울의 가장 진실한 용서의 고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2. 그가 특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성도는 이러한 용서의 은혜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는 자신이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잊어버리지 않았습니다. "13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우리는 사도 바울이 얼마나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는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어떻게 긍휼을 입어 구원을 받게 되었는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어쩌면 그런 바울을 보면서 불쌍하게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사실은 그런 바울과 같은 모습이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도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였기 때문입니다. 어렸을 때에 부모님이 교회가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었습니까? 저에게는 새벽기도도 가자고 하셔서 더욱 고통스러웠습니다. 자는데 불을 탁 키시고 새벽기도를 가자고 일어나라고 하시는 것은 힘든 일이었습니다. 조금만 더 자게 해달라고 해도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너무나 야속하기도 했습니다. 어떤 때에는 교회에 뛰어서 가기도 했습니다. 자다가 일어나서 새벽공기를 가르며 뛰어간다는 것은 무척이나 고통스러운 일이기도 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였습니다. 그래도 이제는 도리어 다른 사람을 깨워서 새벽기도를 갈수 있는 사람이 된 것은 그 당시에 내가 알지 못하고 행했었구나를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알지 못하고 그렇게 투정을 부렸던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도리어 그렇게 깨워서 데리고 다니신 부모님께 감사하게 됩니다.
그 깨달음 속에서 사도 바울은 고백합니다. "14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누군가에게 제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어서 부모님의 기도를 기억하시고 주님께로 돌아오세요' 그분은 지금은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 분이었는데, 그분은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를 걱정하셨습니다. 자신이 이렇게 죄가 많은데 어떻게 지금 돌아갈 수 있겠느냐고, 나중에 죄를 좀 안짓게 되면 돌아가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르는 말입니다. 그렇게 죄가 많을 때 돌아와야 합니다. 나중에 죄가 없어졌다고 생각했을 때에는 돌아올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죄가 많고 허물이 많을 때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시고 깨끗하게 하십니다. 그것이 주님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죄가운데서 주님께 돌아올 때 주님의 그 용서의 은혜를 받으며 사도 바울처럼 고백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주님은 우리를 믿어주셨고 우리를 사랑해주셨습니다. 사도바울은 그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죄악 가운데서도 망하지 않고 그 죄악 중에서 생애가 끝나지 않고 돌이켜서 주님을 붙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그런 은혜를 이 안에서 날마다 누려야 합니다. 우리를 돌이켜서 주님을 붙들 수 있게 하신 주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그가운데서 우리는 구원의 기쁨을 넘치도록 누리게 됩니다.
3. 왜냐하면 그 용서의 은혜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빛이 나고 하나님께 영광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 구원의 기쁨을 어디에 비유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몸을 씻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정상적으로 우리는 보통 자주 몸을 씻습니다. 우리 몸에서 나는 땀냄새와 때와 불결해진 모든 것들을 스스로 깨끗하게 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가끔씩은 사우나에 가서 아예 묵은 때를 벗기기도 합니다. 그렇게 온몸을 잘 씻고 청결하게 하면 얼마나 개운한가요? 그와 같이 하나님께 죄의 용서함을 받는 것은 그러한 상쾌함을 가져다 줍니다. 그런데 이에 반해서 전혀 씻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가끔씩 교회에 어려운 형편에 처하신 분들이 오셔서 구제비를 요청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 때 전부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어떤 때에는 그분들 중에 악취가 풍기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에게 청결은 오히려 사치나 허영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런 것을 기대한다는 자체가 그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용서의 은혜는 어쩌면 그렇게 사치나 허영이나 혹은 무의미하고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처럼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날마다 회개하며 사는 삶, 날마다 용서를 구하며 사는 삶은 우리의 인생을 너무나 죄를 의식하며 그 죄가운데서 몸부림치게 만드는 삶으로 바꾸어놓지 않을까 걱정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만약 자기 자신만 생각한다면 그럴 수 있습니다. 용서를 통해 얻는 마음의 상쾌함, 그로 인해 얻는 개운함을 중시해서 그것에 집착한다거나 혹은 그것을 외면하려고 한다면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고백을 보십시오. 그는 용서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16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절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는 그 긍휼을 입은 까닭으로 용서의 은혜를 얻은 이유로 예수 그리스도의 오래 참으심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용서를 생각할 때 용서받는 나를 중심으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용서하시는 주님을 중심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마치 용서가 자동차 세차하는 것처럼 당연히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주님은 자기 자녀를 목욕탕에 데리고 간 아버지, 혹은 어머니처럼 정성스럽게 우리의 더러움을 닦아 주십니다. 인내하고 또 인내하시면서 우리가 결국에는 용서받게 하십니다. 그 용서 속에서 우리가 다른 사람의 본이 되게 하십니다.
용서는 물을 끼얹는 것이 아닙니다. 용서는 때수건을 들고 살을 밀어서 그 때를 벗기는 것입니다. 한번에 다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날마다 반복해야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지금까지도 용서받지 못한 죄가 있기도 합니다. 예배에 온 마음을 다하지 못하는 것, 전도에 최선을 다하지 못하는 것, 양육에 불성실한 것, 사역에 게으른 것, 이런 저런 온전치 못함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마나 우리 주님은 오래 참으심으로 또 노력하게 하시고 또 애쓰게 하십니다. 마침내 때를 벗겨내고야 마시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 나타나는 것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 대한 영광입니다. "17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어지이다 아멘"
우리가 날때부터 신실했습니까? 우리가 날때부터 경건했습니까? 아니오. 우리는 방종했고 불성실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를 이렇게 만드셨습니다. 그러니 주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돌아가야 합니다. 주님이 마침내 이루신 용서의 은혜가 우리 모두를 결국에는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어가시는 것입니다.
4. 우리는 평생을 용서의 은혜를 체험하면서 나타내면서 살아가는 자들이 됩시다.
우리가 잘 아는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님에게는 자신만의 특별한 용서의 고백이 있었습니다. 손 목사는 1934년 1월 4일, "십자가 생활에 불충한 나를 위하 여"라는 글을 썼습니다. 그 글에서는 십자가의 고배가 체험되어지는 삶을 살기를 원하는 내용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길을 가야 하리라는 각오를 말하고 있습니다.
"행복(幸福)하여지기를 원(顧)하면서 의(義)를 위하여 신고 (辛苦)당하기를 꺼리는 자, 땀도 흘리지 않고, 눈물도 뿌리지 않고 피도 쏟지 않고, 그러나 많은 행복을 절탐(切貪)하는 어리석은 이를 많이 만나는 중 그 중에도 나는 첫째로 꼽히는 자인가 한다‥‥‥‥ 세인 (世人)이 체험치 못하는 진정(眞正)한 부귀 영화(富貴榮華)의 안락(安樂)은 고난 역경(苦難逆境)에서 기쁜 찬송을 부르는 자가 아니겠느냐:‥‥ 빈(貧)은 애처(妥妻)로 삼고 고(普)를 선생(先生)으로 삼고 자연(自然)은 친구로 삼는 생활 에 진정 미(味)의 쾌락을 직감(直感)하리라. 양원(良源)아! ‥‥‥ 너는 무겁고 괴로운 십자가를 지고 좁고도 험한 갈보리 형곡(荊谷)을 향하는 노선에 있음을 깨닫지 못하느냐? 밭 갈기를 예비한 암소가 어찌 멍에를 끌겠으며 전쟁에 나간 군인이 어찌 죽음을 무서워하겠느냐 내 몫에 매인 십자가 내 어이하리 있까? 기쁘게 지고 나아가리라. 너는 십자가 지기를 꺼리지 말라.다시는 세상에 돌아오지 못할지니라."
저는 그 어떤 신앙서적도 이처럼 자기의 죄를 절감하면서 용서의 은혜를 받기를 사모하며 구체적으로 삶 속에서 실천하였던 우리 신앙의 모범을 따라올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우리 한국교회를 이끌었고 자리잡았으며 그속에서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였습니다. 주님은 지금도 그런 은혜를 주려고 하십니다. 그런 사람들을 세워서 하나님의 일을 행하게 하려고 하십니다. 진정으로 용서의 은혜를 체험하고 그 은혜로 살아가는 자들이 직분을 맡고 지도자가 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를 주님은 이 시대에도 원하고 계십니다.
바로 여러분들이 그러한 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언제 죄를 지었는지를 잊어버리고 사는 자들이 아니라, 용서는 나와 무관한 일이라고 단정짓는 자들이 아니라, 날마다 자신을 쳐 복종시키고 겸손하여져서 주님의 믿음과 사랑을 간구하며 그 용서의 은혜로인해서 늘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하며 감사하며 살아가는 자들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바울사도의 삶 속에서 넘쳤던 하나님의 영광이 바로 우리의 삶속에서도 넘치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