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그 마음이 깊이 야곱의 딸 디나에게 연련하며 그 소녀를 사랑하여 그의 마음을 말로 위로하고
4 그 아비 하몰에게 청하여 가로되 이 소녀를 내 아내로 얻게 하여 주소서 하였더라
5 야곱이 그 딸 디나를 그가 더럽혔다 함을 들었으나 자기 아들들이 들에서 목축하므로 그들의
돌아 오기까지 잠잠하였고
6 세겜의 아비 하몰은 야곱에게 말하러 왔으며
7 야곱의 아들들은 들에서 이를 듣고 돌아와서 사람 사람이 근심하고 심히 노하였으니 이는 세겜이
야곱의 딸을 강간하여 이스라엘에게 부끄러운 일 곧 행치 못할 일을 행하였음이더라
야곱은 자신의 딸 디나의 일로 인해서 괴로움에 빠졌습니다. 디나가
가나안 땅 여자를 보러 갔다가 그 땅의 추장에게 몹쓸 짓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1 레아가 야곱에게 낳은 딸 디나가 그 땅 여자를 보러 나갔더니
2 히위 족속중 하몰의 아들 그 땅 추장 세겜이 그를 보고 끌어들여 강간하여 욕되게 하고”
이제 겨우 하란 밧단아람에서 가나안으로 돌아와 자리를 잡으려고 했을 때 이런 일을 당하게 되어서
야곱은 매우 괴로웠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계획대로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이렇게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처음 그는 밧단아람에서 가나안에 들어와서 세겜성을 이르렀을 때 그곳이 좋아보였습니다. 그래서 성 앞에 장막을 치고 그 장막 친 밭을 세겜의 아비 하몰의 아들들에게서 은 일백개를 주고 구입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단을 쌓았고 그곳 이름을 ‘엘엘로헤 이스라엘’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는 뜻으로써 그가 가나안에 돌아온
것을 기뻐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담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편안히 좀 사는가 했더니 딸이 밖에 나갔다가 사고를 당하고 들어온 것이었습니다.
이런 어려운 일은 비단 성경에서만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우리
삶속에서도 이러한 일들은 여전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 어떤 드라마나 영화보다도 더 드라마틱하고 영화같은 일들이 바로 우리 현실의 삶에서 일어납니다.
그속에서 우리는 계획대로 되지 않는 일들에 맞닥뜨립니다. 예기치 않았던 일들에 처하게 됩니다. 1초만 느렸어도 피할 수 있는 일을, 1시간만 늦게
도착했어도 당하지 않을 일을, 하루만 연기했어도 일어나지 않았을 일들이 우리 삶에는 일어납니다. 그러나 그런 안좋은 일들은 그렇게 1초, 1시간,
하루가 늦어진다고 해서 다 피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이와는 정반대로 1초가 더 빨랐다면, 1시간 일찍 서둘렀다면, 하루만 더 앞당겼으면 생기지
않았을 일도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핵심은 사고시점에서 앞서거나 더 느리거나 하는 것인데, 사실 생각해보면 이것은 아무리 앞서거나 아무리 느리게
해도 언젠가는 피할 수가 없는 일들이 있습니다. 그 당시에는 피할 수 있겠지만 언젠가는 닥치게 될 일들이 있는 것입니다.
저는 예전에 자동차 사고를 낸 적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20여년
운전을 하면서 유일하게 낸 사고였습니다. 그당시 전도사로서 가끔씩 시무하던 교회에 새벽예배를 인도했었습니다. 교회가 멀리 있어서 일찍 출발을 해야
했습니다. 최소한 새벽 3시반에는 일어나서 4시에는 출발을 해야 했습니다. 집에서부터 도로로 나오기까지 골목들을 빠져나와야 했는데 아주 이른 시간이라
차들도 별로 없었습니다. 그래서 도로 합류지점에서 늘 일단정지를 하지 않고 골목을 돌아서 좌회전으로 획 나오곤 했습니다. 사고가 나던 그날도 늘
하던 대로 그렇게 골목을 빠져나오고 있었습니다. 다만 이상하게도 합류지점에 왠 커다란 짐차가 세워져 있었습니다. 그러니 자연히 합류지점에서 다가오는
차가 안보였습니다. 괜찮겠거니 하고 휙 좌회전을 하는 순간, 어떤 차가 쏜살같이 달려오는 것이었습니다.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았지만 자동차 옆부분을
부딪치고 말았습니다. 제 생각에는 그 차가 너무 속도가 높아서 일어난 사고가 아닌가 했는데 경찰관 아저씨가 출동해서 상황을 보더니 저에게 과실이
있다고 했습니다. 합류하는 도로에서 나올 때에는 항상 일단정지 후에 안전을 확인하고 가야 하는데 그냥 왔다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제가 다 손해를
배상해주게 되었습니다.
이일을 생각해 보면, 제가 1초만 느렸다든지, 그 차가 1초만
빨랐다든지 했으면 그 사고는 피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언제든지 주의의무를 소홀하고 나 바쁜 것만 생각하는 운전습관으로는 이러한 사고는
언젠가 날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깨닫고 나니 그 순간의 상황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평소의 모습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의
경우도 그 다음부터 운전습관이 완전히 바뀌게 되었습니다.
야곱의 딸 디나가 1초 늦게 나간들, 1시간 늦게 나간들, 1일
늦게 나간들, 혹은 반대로 1초, 1시간, 1일을 빨리 나간들, 세겜 추장의 악행에서 피할 수 있었을까요? 그 땅의 여자들을 보러가고 싶어 하는
한 언젠가는 일어날 일이 일어난 것이라고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무엇인가를 어떻게 하고 싶다는 선호도가 바뀌지 않는한 피할 수 없는 일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바꾸지 않는다면 문제는 해결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더욱 악화됩니다. 야곱의 경우가 바로 그러했습니다. 그에게는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일단 일어난 딸 디나의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고민할
때 몹쓸 짓을 한 당사자의 아버지가 야곱에게 나타났습니다. 바로 추장 세겜의 아버지인 하몰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몰은 황당한 일을 제안했습니다.
바로 디나를 자기 아들 세겜의 아내로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애초에 아내를 원했다면 그런 짓을 저지르지 말았어야 했지만, 이왕 이렇게 된 것 그냥
아내로 삼기를 원했고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들의 잘못을 덮으려고 했습니다. 이러한 말도 안되는 요구에 야곱은 고민했는데, 야곱의 아들들은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할 지에 대한 분명한 의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14 야곱의 아들들이 그들에게 말하되 우리는 그리하지 못하겠노라 할례 받지 아니한 사람에게 우리
누이를 줄 수 없노니 이는 우리의 수욕이 됨이니라
15 그런즉 이같이 하면 너희에게 허락하리라 만일 너희 중 남자가 다 할례를 받고 우리 같이
되면
16 우리 딸을 너희에게 주며 너희 딸을 우리가 취하며 너희와 함께 거하여 한 민족이 되려니와
17 너희가 만일 우리를 듣지 아니하고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우리는 곧 우리 딸을 데리고 가리라”
그러나 이것은 속임수였습니다. 정말 할례를 받게 하고 여동생을
아내로 줄 마음은 없었습니다. 목표는 복수였습니다. 받은 수치와 고통을 몇 배로 더 갚아주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그 일은 자신이 몹쓸 짓을 한
그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려는 어리석은 세겜추장의 설득에 따라서 세겜의 모든 남자들이 할례를 받고 난 다음에 일어났습니다.
“25 제 삼일에 미쳐 그들이 고통할 때에 야곱의 두 아들 디나의 오라비 시므온과 레위가 각기
칼을 가지고 가서 부지중에 성을 엄습하여 그 모든 남자를 죽이고
26 칼로 하몰과 그 아들 세겜을 죽이고 디나를 세겜의 집에서 데려 오고
27 야곱의 여러 아들이 그 시체 있는 성으로 가서 노략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그 누이를 더럽힌
연고라”
그러나 이렇게 까지 하였어도. 야곱의 괴로움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세겜의 모든 남자를 죽이고 하몰과 세겜까지 죽였어도 여전히 남아있는 것은 더 큰 괴로움이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아들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30 야곱이 시므온과 레위에게 이르되 너희가 내게 화를 끼쳐 나로 이 땅 사람 곧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에게 냄새를 내게 하였도다 나는 수가 적은즉 그들이 모여 나를 치고 나를 죽이리니 그리하면 나와 내 집이 멸망하리라”
야곱이 두려워했던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기 자신입니다. ‘나를
치고 나를 죽이리니’ 자신의 신변과 안전이 두려웠던 것입니다. 세겜족속의 이야기를 듣고 분노함으로 달려들 인접한 가나안 민족들이 두려웠습니다.
그 수를 당할 수 없음을 깨닫고 두려워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일을 저지른 시므온과 레위는 과연 정당한 일을 했습니까? 시므온과 레위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31 그들이 가로되 그가 우리 누이를 창녀같이 대우함이 가하니이까”
그들은 자신의 누이를 창녀같이 대우한다고 했습니다. 물론 처음부터
아내로 대우했으면 더 좋았겠지만 세겜추장은 먼저 악한 일을 하고 그 일에 대한 보상으로 아내를 삼고자했습니다. 그래서 성폭행의 피해자로서가 아니라
정식 아내로서 맞이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시므온과 레위는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구겨질대로 구겨진 자존심은 바로 자신들의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누이의 것이 아니라 말입니다. 이러한 의도는 오늘날에도 ‘명예살인’이라는 명목으로 여전히 이어지고 있습니다. 가문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생각했을 때 가해자를 살해합니다. 또한 피해자가 가문의 명예를 훼손했을 때에는 피해자도 살해합니다. 결국 가문의 명예란 자신의 명예일
뿐입니다. 시므온과 레위도 그런 맥락에서 세겜 사람들을 죽인 것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왜 일이 이렇게까지 되었을까요? 왜 야곱은 세겜땅에서
이러한 곤란을 겪고 있습니까? 왜 디나는 그곳 여자들에게 그렇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을까요? 왜 시므온과 레위는 자신들이 어떤 대우를 받는가에 이렇게
몰입하게 되었을까요?
우리의 목적이 우리 자신일 때, 우리의 자신의 어떤 원하는 것일
때, 다른 사람을 위하는 것이라고 말해도 그것이 결국은 자기 자신의 무엇으로 귀결될 수 있을 때 우리는 스스로 문제를 만드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 인간이 경험하는 모든 괴로움은 바로 그럴 때 일어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 살아가도록 지어지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피조물의
한계입니다. 모든 피조물은 자기 자신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피조물은 오직 자신을 지으신 창조자의 목적을 위해서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동물도 식물도 인간도 이 세계의 모든 것이 다 그렇게 지어졌습니다. 그렇게 살지 않으려면 스스로 존재해야 합니다. 그러나 지음을 받지 않고 스스로
존재하는 분은 오직 하나님 뿐입니다. 하나님 이외에 모든 존재는 다 자기 자신의 목적이 아닌 창조자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살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지 않을 때 모든 문제가 일어납니다.
여러분이 책상이나 의자를 만들었다고 해보십시오. 그 책상이나 의자가
만든 주인의 목적을 따르지 않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바로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좀더 발전된 의미로 기술자들이 만든 컴퓨터가 기술자들의
목적을 따르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문제가 생깁니다. 목적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 바로 문제입니다. 그것을 문제라고 말합니다. 당사자는 문제가
아니라고 할 수 있겠지만 만든 입장에서 보면 그것이 바로 문제입니다. 애초에 주어진 목표를 이루지 못하는 것 입니다. 자녀는 부모를 위해서 존재하지
않습니다. 부모는 자녀를 위해 존재하지도 않습니다. 남편은 아내를, 아내는 남편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모든 가족들은 전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합니다. 다만 그것을 알지 못할 때 그것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 큰 문제를 일으킵니다.
이렇게 문제 많은 우리 인생을 하나님께서는 안타깝게 생각하십니다. 이세상의 모든 존재중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받았기 때문에 유일하게 자유의지가 있고 그래서 유일하게 거부할 수 있는 이 인간에
대해서 하나님은 슬퍼하십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버리고 자기 자신의 목적으로 살아가는 어리석은 자들에 대해서 안타까워하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안타까워하시는 대상은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지금까지 인도하셨던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붙드시고 복을 주셔서 가나안까지 인도하셨던 야곱과 그 딸과
그 아들들입니다. 그들을 하나님께서는 안타까워 하셨습니다.
정말 일이 이지경이 되기까지 야곱이나 그 가족중 누구도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했다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기도 합니다. 그들의 모습속에서 하나님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문제는 더욱 커지고 더욱 절박해졌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찾지 않았더라도 하나님은 그들을 찾으셨습니다. 그리고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나아가서 단을 쌓는 것이었습니다. 35장 1절입니다.
“35:1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하나님은 야곱에게
그냥 하나님께 나아가라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특별히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을
기억하면서 단을 쌓으라고 하셨습니다. 야곱은 벧엘이라는 말을 들을 때, 그리고 ‘에서를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나타났던 하나님’이라는 말을 들을
때에 기억이 났습니다. 그동안 까맣게 잊고 왔던 것들을 기억해 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벧엘에서 그가 서원했던 내용이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그때 그곳에서 이렇게 서원했었습니다.
“28:20 야곱이 서원하여 가로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사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
28:21 나로 평안히 아비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28:22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이러한 서원을
했던 곳이 바로 ‘벧엘’이었습니다. 벧엘에서 이러한 서원이 있었지만 야곱은 가나안으로 돌아왔을 떼 벧엘로 오지 않았습니다.
그는 세겜에 머물렀습니다. 왜냐하면 세겜이 좋아보였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가 하나님께 대한 서원을 기억하지 못하고 이루지 못하고 자신의 삶에서
세겜에 머물러 있었을 때에 이 모든 일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살아가는 삶을 살지 못하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살아가는 삶을 살았을
때에 자신이나 아들이나 딸이나 모두 어려움을 당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벧엘의 하나님이 있습니다. 초등학교의, 중학교의, 고등학교의, 대학교때의, 군대생활할 때의, 미혼일 때의, 자녀가
없을 때의 하나님이 있습니다. 그리고 현재의 문제를 넘어서기 위해서 그때 그 과거의 하나님의 생각하는 것이 더 필요합니다. 미래에 도우실 하나님을
기대하는 것보다, 과거에 도우셨던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이 더 필요합니다. 지금 눈앞에 있는 문제를 넘어서기 위해서 뒤로 물러나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냥 제자리 뛰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도움닫기를 통해 뛰는 것입니다. 그럴 때 더 멀리 나갑니다.그럴 때 힘찬 도움닫기가 시작되고 비로소 문제를
넘어설수 있습니다. 이전에도 도우셨던 하나님, 그 하나님이 바로 지금도 도우심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가족들에게 선언했습니다.
“2 야곱이 이에 자기 집 사람과
자기와 함께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의 이방 신상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케 하고 의복을 바꾸라
이 말속에 왜
야곱이, 디나가, 시므온과 레위가 그렇게 자기 자신을 위하며 살았는지가 나옵니다. 그때까지 그들을 사로잡고 있었던
것이 무엇인지 나타납니다. 그것은 이방신상이었으며 정결케 하지 않은 자신이었으며 세속적인 의복이었습니다. 그것을 붙들었기 때문에 그것들에 붙들린
것입니다. 그것들을 사랑했기 때문에 그것들에게 매였던 것입니다. 정말 따라야 하는 대상은 바로 ‘환난 날에 응답하시며 가는 길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3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나의 환난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나의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단을 쌓으려 하노라 하매”
하나님은 35장 1절에서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라고 하셨고, 야곱은 35장 3절에서
‘나의 환난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나의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께’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깨닫게 하심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인정하고 고백하면서 야곱은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그 하나님은 과거의 하나님이었지만, 이제 현재의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그 말에 가족들도 다 따랐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가지고 있던 모든 이방신상과 귀고리를 야곱에게 주었습니다. 그들에게도 과거의
하나님에서 현재의 하나님이 되었습니다. 그런 다음 야곱은 온 가족을 이끌고 벧엘로 갔습니다. 이들을 따라오거나 방해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만군의 여호와이신 하나님을 따라가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지키고 계셨습니다. 진정한 미래의 하나님이 되신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야곱의 고통과 고민이 결국 하나님을 위해 살아가는 삶을 결심할 때 비로소 끝이나게 되었다는 것은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동일하게 괴로워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속에서 해결과 변화를 원할 때 하나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는 이 문제를
해결하시는 놀라운 계획이 있으십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를 환난 날에 도우시고 지키셨던 그 하나님을 의지하고 따르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의 삶의
목표가 바뀌고 온전한 변화와 회복이 일어나게 됩니다.
지난 6개월을 돌아보며 우리의 환난 날에 함께 하시고 우리를 지키셨던 하나님께 감사드립시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의지합시다. 야곱과
그의 가족들이 하나님을 향해 나아갈 때 비로소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던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나아갈 때 모든 문제가 더 나은 결과로 해결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앞으로 보내게 될 새로운 반년이 하나님 안에서 어려움은 기쁨이 되고, 고난은 즐거움으로 변화되는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