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40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가로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41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42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44 때가 제 육시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하며
45 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지더라
46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운명하시다
우리는 한달동안 새해의 소망과 기도제목에 관한 말씀을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소망이 있는 사람, 간구를 하는 사람, 그것이 올바른 간구이건 혹은 어리석은 간구이건 간에 하나님께 뭔가를
원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만나게 된 사람들은 병자, 환자, 귀신들린 사람, 권력욕을 가진 사람 등등 이었습니다. 누군가는
그런 말을 하더군요. 이제 그런 사람들은 좀 그만 보면 좋겠다구요. 그런데 죄송하게도 오늘 보고자 하는 사람은 이 모든 구차함의 극치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양쪽에 달린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모습 속에서 우리들은 인생의 마지막, 더 달라고 할 것도 없을 것 같은 시간에
예수님과 상관하고 있는 자들의 마음을 보게 됩니다.
그들의 모습을 자세히 살펴보기 전에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우리가 때로 배불러서 아무것도 먹고
싶어하지 않을 때가 있지만 그러나 조금 시간이 지나고 나면 다시 배가 고파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환자,
병자, 귀신들린 사람, 그리고 그 가족 등등이 되고 싶어 하지 않지만 세상을 살다보면 어떤 식으로든지 다시 배고프게 됩니다. 다시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외면하려고만 하지 말고 오늘 이시간을 통해서 그 결핍과 허기짐과 문제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지를 함께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1.
한 죄인은 하나님께 간구한 것이 아니라 요구하였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의 한쪽 편에 있는 죄인은 예수님께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말은 부탁은 아니었습니다. 간구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무엇인가를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요구사항이
무엇이었는가 살펴보겠습니다. 39절입니다.
“39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그의 처지가 어떠했든지 간에 우리는 그의 어투가 강렬한 요구에 가까운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비록 죄인이었고 그 죄로 인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는 벌을 받고 있는 사형수였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앞에서 그는 당당했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예수님을 비방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모욕하였고 그런 의미에서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고 한 것입니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한번 구원해
봐라’고 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그가 구원에 절박했던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설사
구원을 받지 못한다 하더라도 상관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예수님 앞에서 낮은 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보다 더 높은 자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비방했고, 그리스도가 아니냐고 메시야가 아니냐고 비난했고, 너 자신을 구원하라고, 그러면서 우리도 구원하라고 조롱했던 것입니다. 사실은
구원할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어차피 죽게 될 거 더 강팍하고 더 완악하게 자신의 감정을 표현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 간구를 하는 사람들 중에 절반은 이런 식으로 간구를
합니다. 간구를 아예 하지 않는 사람들은 예외로 하고 간구를 하는 사람들 중에서 반은 예수님의 저쪽 편에 있습니다. 그래서 그 편에서 예수님에
대해서 돌을 던지며 의심을 던지며 조롱을 던지며 불신을 던지면서 말합니다. ‘한번 당신과 우리를 구원해 보시오!’
할테면 하고 말테면 말라는 그 태도 속에서 우리는 예수님과 그 사람 사이의 깊은 거리감을 느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가까이에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바로 옆에 가까이 달려있지만 심정적으로는 아주 아주 먼 거리가
있습니다. 서로의 목표가 너무나 다르기 때문입니다.
비슷한 이야기를 들어보십시오. 요한복음 12장 5절에 나오는 한
말입니다.
“요12:5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과연 누가 이렇게 말할 수 있었을까요? 바로 그 앞절에 이 말을
한 사람이 누구인지가 나타납니다.
“요12:4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이것은 예수님을 잡아 줄 가룟유다, 예수님을 배반할 가룟유다,
예수님과 아주 멀리 떨어져 있었던 가룟유다가 한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무엇을 간구하였든지 그것은 예수님과의 관계를 아주 멀리 떨어진 상태에서 나온
말이고, 그런 이유로 그가 말한 것은 전부 간구가 아니라 요구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예수님 옆에 있던 그 강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2.
다른 죄인은 하나님께 요구한 것이 아니라 간구하였다.
그렇다면 요구가 아닌 진정한 간구를 하는 사람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요? 그것은 요구가 아닌 진정한 간구를 하는 모습입니다. 그러한 간구는 관계속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계는 인간 사회의 모든 면에 적용할 수는 없겠지만 특별히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아주 중요한 부분이 됩니다. 예수님의 다른 편에 달려있던 강도는 바로 이점을 대조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40,41절입니다.
“40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가로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41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그의 예수님에 대한 기본적인 생각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행한 일에 대해서 옳은 것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대해서 가타부타 말할
수 있습니다. 옳다 그르다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에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누구나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생각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위치를 결정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위치에 따르는 책임을 지게 되는 됩니다.
우리의 고백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위치는 무엇입니까? 우리의 하나님은
우리가 보는 모든 일을 다 행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행하신 일은 전부 옳습니다. 그러면 일어난 안좋은 일을 왜 일어난 것입니까? 그것은 이
사람의 말 그대로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 일에 대한 댓가가 안좋은 일이고 주님이 행하신 일에는
옳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한 일이 다 하나님 때문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주님이 악을 행하셨다고 말하는 것이고 그럴 때 우리는 악을
저지르는 자가 됩니다. 그것은 정직하지 않은 것이고 거짓말 하는 것이며 선과 악을 인정하지 않는 행동이 됩니다.
이 사람은 자신의 삶속에서 그것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은 옳으시고,
자신은 한 행동에 대한 보응을 받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인정했습니다. 고백했습니다. 그런 면에서 그는 이제 더이상 스스로의 악을 계속
부정하면서 끊임없이 거짓말하고 끊임없이 책임전가하며 끊임없이 악을 행하는 자가 아니었습니다. 비록 그는 자신의 죄로 인해서 십자가에 달려있지만
그의 말과 행동은 죄인이 아닌 의인의 삶으로 나아오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교도소에 가도 동일한 원리를 발견합니다. 죄값을 치르면서
의로워지는 사람과 죄값을 치르면서 더욱 악해지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그렇기 때문에 더욱 변화되기 어렵습니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사람은 그렇기 때문에 더욱 변화될 수 있습니다.
이제 그러한 그가 예수님께 간구를 드립니다. 그가 예수님께 하는
간구는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42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그는 고통이 빨리 끝나기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한
일에 대한 보응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이 이렇게 되도록 내버려둔 사람들이 망하게 해달라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이렇게 된 것은 다 자기가 한
일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간구한 것은 예수님이 자신을 생각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기억해 달라는 뜻이었습니다. 영어로는 ‘remember’,
헬라어로는 ‘mneseti’ 입니다. 그를 기억한다는 것은 그가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가 원한 것은 예수님과 함께 있기를 바란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간구였습니다. 본질적으로 그 간구는 결국 예수님과 함께 있기를 바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떠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있기를 원했었고 그것을 말씀드렸습니다. 그것이 바로 진실한 간구였습니다.
3.
예수님은 간구하는 자의 기도를 들으시고 받아주셨다.
예수님은 이러한 간구하는 자의 기도를 들으시고 받아주셨습니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자, 자신의 잘못은 고백하는자, 그리고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옳으심에 대해서 시인하는 자, 그는 죄인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간구를 하게 되는 모든 상황은 자신의 죄에 대한 보응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속에서 그는 하나님과 함께 있기를 바랬습니다. 그러한 간구를
예수님이 들어주시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이러한 간구는 들으심을 얻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간구를 들어주셨습니다.
그가 금식을 해서도 아니고 그가 선행을 해서도 아닙니다. 그가 똑똑하거나 잘생겨서도 아닙니다. 그 간구를 들으시는 이유는 그가 하나님 편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 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있는 자들이 원하는 그런 세상적인 소원을 간구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그도 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의 소원을 들으시고 그를 낙원으로 인도하셨습니다. 낙원이 바로
예수님이 계시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있기를 바라는 그 사람도 예수님과 함께 그 낙원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러한 간구를 들으시는 것은 이것보다 더 궁극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많은 이유들의 원인이 되는 더 크고 놀라운 이유가 있습니다. 그 궁극적인 이유를 우리는 46절에서 보게 됩니다.
“46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운명하시다 “
한 죄인의 소원을 들으시는 예수님은 그 자신도 역시 자신의 소원을 아버지께 올리고 있습니다. 그분이 아버지에게 부탁한 것은 딱 하나였습니다. 자신의 영혼이 아버지 손에 있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영어로는 ‘entrust’, 헬라어로는 ‘paratisemai’ 입니다.
몸은 죽으나 영혼은 주님과 함께 있기를 바라셨습니다. 예수님 자신도 말입니다.
성자 하나님이 성부 하나님께 대해서 자신의 영혼을 맡기고 부탁하였을때 그것은 성부 하나님과 함께
하시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럴 때 성부 하나님은 성자 하나님을 받으셨고 이전처럼 두분은 하나가 되셨습니다.
그 모습은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어떻게 간구를 해야 하는가를 보여줍니다. 간구의 내용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간구의 모습입니다.
그 모습 속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하나님과 하나가 되셨던 것처럼 예수님과 하나가 되며 하나님과 하나가 됩니다. 모든 간구를 통해서 하나님과 하나가
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이 모습은 바로 우리의 간구를 들어주시는 궁극의 이유를 보여주십니다. 그 간구를 들으셔서 하나님은 우리와 하나가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4.
우리는 간구하는 자가 되어 주님과 함께 하는 자가 되자.
우리는 지금
당장 하나님께 구체적인 간구가 있습니다. 그 간구를 통해서 지금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습니다. 그 고민과 그 괴로움과
그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과 함께 합니다. 하나님은 그 어려움이 바로 우리의 어리석음의 결과임을 아시고 불쌍히 여기시며 도와주고자 하십니다. 우리의
어리석음은 하늘을 찌르지만, 하나님은 그 어리석음 속에서 우리를 사랑함을 나타내 주십니다.
우리에게는 지금은
그런 간구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과거에는 하나님께 대한 구체적인 간구가 있었습니다. 그 간구를 통해 하나님과
함께 했었다면 그 의미를 기억하면서 다시 간구해 보십시오. 간구하지 않는 것도 문제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할 이유를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만약 과거에
그런 경험도 없고, 현재에도 아무런 간구가 없다면, 미래에는 있을 것입니다. 살다보면 반드시 아플 때가 있을 것입니다.
살다보면 위급한 때를 당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병원신세를 질 때가 있고, 법원에 들어가 볼 때도 있고, 경찰소에도 들어가 볼 수도 있으며, 구급전화를
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여러분 자신 때문이건 혹은 다른 사람 때문이건 이 세상을 살다보면 이런 저런 어려움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 간구함을 잊지 마십시오. 그 간구를 요구로 바꾸지 마십시오. 하나님께 이래라 저래라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 원망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옳으신 분입니다. 우리는 그저 우리의 행한 일의 보응을 받는 것 뿐입니다. 그런 마음이 아니고서는 도움을 받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 요구하던
그 죄인에게 예수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진심으로
자신의 죄를 고백하며 주님의 도움을 간구하면서 그분과 함께 하기를 바란다면 하나님은 반드시 말씀해 주십니다.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구요. 그 낙원속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십시오. 이 세상에 주님과 함께라면 견디지 못할 고난이 없고 이겨내지 못할 어려움이
없습니다. 그 온전한 평화를 누리게 될 수 있습니다. 그때를 준비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억하십시오.
우리모두가 지금당장이건, 혹은 이전과거이건, 혹은 먼 미래이건 어려움 속에서 문제 속에서 목표 속에서 주님을 만나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올 한해
우리가 모두 그 하나님 안에서 함께 거하는 자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