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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계획] 2출3;7-12 내가 누구관대 이스라엘을 인도하리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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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출 3;
7-12 내가 누구관대 이스라엘을 인도하리이까_1



2012.1.22.주. 주일오전, 주제설교   [51계획]  

*개요   {1오경} <a적용> [7실천]-[8사역]

[출]3:7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출]3:8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데려가려 하노라
[출]3:9    이제 가라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히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출]3:10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출]3:11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출]3:12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꿈과 비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는 자기 자신의 꿈과 하나님의 꿈이 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자신의 꿈을 이룰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꿈을 이루는 것도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꿈, 하나님의 비전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사람들의 반응은 두 가지 입니다. 하나는 긍정적인 반응이고 다른 하나는 부정적인 반응입니다. 한 부류의 사람들은 이 일에 동의하며 눈이 반짝 반짝 하는 사람들이지만 다른 한 부류는 하나님의 꿈을 위해 노력하는 일에 별로 내켜하지 않고 반신반의하는 사람들입니다. 연령과 학력과 지역과 성별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은 이 하나님의 꿈과 비전에 대해서 동의하거나 부정하는 두 가지 태도를 취합니다.

하나님의 꿈과 비전에 동의를 하는 것은 그로 인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으리라는 희망과 소망이 있기 때문에 별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부정하는 태도입니다. 이렇게 여기에 대해서 부정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주시는 새로운 삶에 대해서 의심과 절망과 거부감이 있기 때문입니다. 꿈과 비전이라는 용어 자체가 변화되고 발전된 미래에 대한 기대감이지만 어쩌면 현재가 너무나 고단하고 괴로운 사람들에게는 그런 미래를 보는 것조차 힘이 듭니다. 그래서 미래에 대한 새로운 꿈, 소망 등등은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데 어떻게 미래의 목표를 가질 수 있겠느냐는 이유로 전혀 가당치 않은 일이 되어버립니다.  

뿐만 아니라 현재의 삶에 안주하고 만족해 하는 사람들에게도 역시 꿈과 비전은 부담스러운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지금 현재에 만족하고 더 큰 변화를 바라지 않는데 꿈과 비전이 이루어질 수 있는  미래에 대한 노력이나 애씀은 그리 내키지 않는 일이 되버리는 것입니다. 결국 이런저런 이유로 꿈과 비전을 거부할 때 삶은 아무런 변화없이 흘러가고 현재의 모든 모습은 나빠지면 나빠졌지 결코 좋아지지 않는 상태가 되어 버립니다.

우리는 이러한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보통 일반적인 사람들에게는 자기 자신의 꿈과 비전을 갖는 것도 결코 쉽지 않은 일인데 하물며 하나님의 꿈과 비전을 갖는 것은 얼마나 더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그런데 성경말씀은 다릅니다. 자신의 꿈과 비전이 없는 사람들이라도 하나님의 꿈과 비전을 가질 수 있다고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꿈과 비전을 가지면  오히려 자신의 꿈과 비전도 생기고 그것이 이루어지는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고 하십니다. 그 구체적인 예는 바로 하나님의 꿈과 비전으로 부르심을 받았던 모세에게서 나타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그 모세의 삶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당시 모세는 애굽에서 사람들의 눈을 피하여 도망쳐 나와서 광야에서 양떼를 치고 있었습니다. 그가 왜 애굽에서 도망쳐 나와야 했는가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조금 거슬러서 그의 인생을 보아야 합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사람이었지만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 입양되었습니다. 그후에 모세는 바로의 자녀로 자랐고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습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받는 학대와 고통을 안타깝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애굽 사람이 이스라엘 사람을 치는 장면을 목격하였고 격분한 나머지 그 애굽 사람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나중에 그 일이 탄로나서 그는 애굽을 떠나 광야에서 도망쳐 살게 되었고 그 때 나이가 40세였습니다. 그 후에 그는 그곳에서 만난 십브라라는 여인과 결혼한 후에 그 장인의 양떼를 맡아 치면서 지냈습니다.   

시간은 흘러 그의 나이가 80세가 되었고, 하루는 그가 양떼를 이끌고 호렙산에 이르렀을 때에 그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모세에게 비전을 주셨습니다. 그 비전의 내용이 10절에 나타납니다.
“10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의 꿈과 비전을 모세에게 말씀하셨을 때 모세의 반응은 부정적인 것이었습니다. 11절에 그의 대답이 나타납니다.
“11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이러한 모세의 거부는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4장 10절, 13절에 이어지는 그의 거부가 나옵니다.
“4:10 모세가 여호와께 고하되 주여 나는 본래 말에 능치 못한 자라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하신 후에도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4:13 모세가 가로되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
그는 전형적으로 꿈과 비전에 부정적인 사람이었고 특히나 하나님의 꿈과 비전에는 더욱 절망적이었습니다. 그가 신속하게 하나님께 순종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우리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는 이미 사람을 한 사람 죽였고 도망자의 몸으로 살고 있었고 하루 하루 양떼를 돌보느라 정신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의 현재는 너무나 비참했고 암울했으며 절망적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꿈과 비전을 받아들이기에는 그의 상태가 너무 부족했었습니다.

이런 설명이 너무 부정적이었나요? 그렇다면, 그의 삶을 좀더 긍정적으로 바라봅시다. 그는 나름 보람있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양떼를 키우는 것은 재미가 있었고 아내와 결혼해서 살아가는 것도 즐거웠습니다. 이미 금쪽같은 아들도 낳아서 키우고 있었고 지금은 양떼를 몰아서 새로운 목초지인 호렙산까지 진출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하나님은 그것을 다 버리고 애굽으로 돌아가서 지도자 역할을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불확실한 미래를 감당하기에 현재는 너무나 편안하고 안락하였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꿈과 비전은 그의 꿈과 비전과 충돌되고 있었습니다. 그의 꿈이 부정적으로는 그저 하루 하루 먹고 사는 것이고 어떻게 해서든지 삶을 버텨나가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긍정적으로는 그의 꿈과 비전은 지금까지 이루어놓은 안정된 기반과 화목하고 행복한 삶을 계속 영위하고 싶다는 내용이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었든 간에 그것은 정확히 하나님의 꿈과 비전에 충돌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꿈과 비전이란 결국 그 자신의 꿈과 비전을 포기해야만 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자신의 꿈과 비전을 이루려고 한다면 하나님의 꿈과 비전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지금 그의 소원과 소망을 내려 놓으라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갈등 때문에 하나님의 꿈과 비전을 포기하고 외면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원하시는 것을 이루기 보다는 그냥 자신의 원하는 것을 이루며 살고자 하는 것입니다. 비록 그것이 온전히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해도 말입니다. 그래서 모세도 그렇게 하나님의 꿈을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하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거기에서 그냥 포기하시지 않았습니다. 그 비전을 이런 이유, 저런 이유로 거부하고 기피하던 모세를 끈질기게 설득하시고 설득하셔서 마침내 모세가 하나님의 꿈을 따라서 애굽으로 나아가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모세를 포기하지 않고 그가 하나님의 꿈을 받아들이도록 붙드신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전에 그가 학대받는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서 안타까워할 때에는 지도자로 부르지 않으시고 이제서야 지도자가 되라고 부르시는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보실 때 모세가 자기의 꿈을 버리고 하나님의 꿈을 따르고자 했을 때에야 비로소 하나님의 비전을 이룰 수 있는 준비가 된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가 진심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고 싶었을 때에는 아직 제대로된 준비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성급하였고 분노가 많았으며 자기의 의지가 너무 강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애굽 사람도 때려서 죽이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 때에는 하나님의 꿈을 이루기에는 너무나 자신의 꿈이 강했습니다. 그러나 이후에 도망자의 삶을 살고 나름 정착해서 양떼를 키우고 있었을 때 주님이 그를 부르셨던 때에는 그가 자신의 좋은 꿈이든 나쁜 꿈이든 자신의 것을 버림으로써 하나님의 꿈을 따를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희생하고 헌신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데 그 때에야 비로소 자신의 꿈을 버리면서 희생하며 헌신할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가 혈기 왕성할 때 그를 부르시지 않았고, 그가 혈기가 다 빠져나가서 자신의 소박한 일에 안주하고 있을 때에 그를 부르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소박한 일조차도 버리고 하나님의 일을 하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가 그럴 때만이 하나님의 일을 제일 잘 할 수 있음을 아셨기 때문에 모세를 설득하셨고 마침내 그가 자신의 일을 버리고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선택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정말로 모세는 그 이후에 하나님의 일을 너무나 잘 해내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지 않게 되면서 비로소 하나님이 하라는 일을 그대로 순종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그리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그대로 순종하면서 장정만 60만이 되고 유아와 여성으로는 100만 는 거대한 이스라엘 민족을 서슬이 퍼런 바로에게서 빼내어 애굽에서 나오는 놀라운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현재 하나님의 꿈과 비전을 볼 때에도 동일한 일이 일어납니다. 우리의 꿈과 소망이 더 중요해 보이고 그것이 더 시급해 보이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의 꿈과 비전을 더 우선시하라고 하십니다.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꿈과 비전은 그렇게 자신의 꿈과 비전을 버리고 나아오는 자들에 의해서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성급하게 하나님의 꿈과 비전을 이루기를 원하는 자들을 통해서 그 일을 이루시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자신의 꿈과 하나님의 꿈이 동일하다고 생각할 때에는 하나님은 좀 기다리십니다. 내버려 두시기도 하십니다. 그리고 나서 비로소 그가 자신의 꿈과 하나님의 꿈의 차이를 깨달았을 때 하나님은 부르십니다. 자신의 꿈을 버리고 하나님의 꿈을 붙들라고 하십니다. 그 때의 희생과 헌신 속에서 비로소 그는 하나님의 꿈과 비전을 이룰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그렇게 이루어지게 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우리 자신의 꿈과 비전은 정말 사라지는 것일까요? 우리가 우리의 꿈과 비전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꿈과 비전을 붙들게 되면 우리 자신의 꿈과 비전은 정말 물거품이 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의 비전을 붙들 때 우리의 비전도 함께 성취되게 됩니다. 더 완전하게 성취되어집니다. 모세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가 원래 가지고 있었던 비전은 무엇이었습니까? 3장 1절을 보십시오.
“3:1 모세가 그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무리를 치더니 그 무리를 광야 서편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

이것이 그가 하고자 했던 일이었는데 하나님의 꿈을 따르게 되면서 이 개인적인 꿈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보십시오. 12절입니다.
“12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그의 꿈은 양이 아니라 사람들을 데리고 호렙산에 서게 됨으로써 온전히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모세가 이루었던 하나님의 꿈은 사실 바로 자기 자신의 꿈이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장막만드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는 자가 되었을 때 그는 하나님의 장막을 만드는 사람이 되어서 교회를 세우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온전한 꿈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베드로도 원래 고기를 낚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꿈을 위해 나아갔을 때 그는 사람을 낚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누가는 원래 직업이 병을 고치는 의사였습니다. 하지만 그가 복음을 붙들었을 때 영혼을 고치고 살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꿈을 버리고 하나님의 꿈을 이루고자 할 때 비로소 하나님의 꿈이 이루어짐과 함께 우리의 꿈도 이루어집니다. 여러분의 꿈도 하나님의 꿈을 먼저 이루고자 할 때 그 속에서 성취되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꿈을 붙드시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를 위해서 여러분의 꿈을 잠시 내려놓고 하나님을 먼저 우선 순위로 두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이루고자 노력하십시오. 그러한 희생과 헌신 속에서 여러분은 충성할 수 있습니다. 또한 온유할 수 있습니다. 또한 절제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경건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비로소 여러분 자신의 꿈도 이루게 만들 것입니다.

민족 최대의 명절인 설이 다가왔습니다. 여러 사람들, 친지와 가족들을 만나면서 어쩌면 여러분들은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은 여러분 자신의 꿈을 확인할 지도 모릅니다. 또는 이미 이룬 꿈을 만끽할 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속에서 시간의 흐름을 깨닫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그 속에서 하나님의 꿈을 생각해 보십시오. 명절은 그저 지나갈 뿐이지만 하나님의 꿈을 깨닫는다면 그리고 그 꿈이 이루어지기를 정말로 바라고 나의 꿈을 포기할 수 있다면 그 희생과 헌신 속에서 하나님의 꿈은 놀랍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주 예수를 믿음으로 나와 내 가족이 구원을 받게 하시리라는 하나님의 꿈이 온전히 이루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복음화되고 우리 가족이 복음화되고 우리 친척이 복음화되는 놀라운 일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러한 놀라운 일이 바로 하나님의 꿈을 따라나서기로 결단할 때에 여러분의 삶 속에 아름답게 이루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구성
1.    우리는 나의 비전을 이루는 것은 원하지만 하나님의 비전은 부담스러워하며 힘들어합니다.
2.    모세도 하나님의 꿈을 이루기를 싫어하였는데 그 본질적인 이유는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일을 못하기 때문이었습니다.
3.    그러나 하나님은 그가 하고 싶은 일을 버리고 해야 하는 일을 했을 때 그 일을 잘 하리라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4.     우리는 하나님의 꿈을 이루려고 할 때 비로소 나의 꿈을 이룰 수 있음을 깨닫고 하나님의 비전을 이루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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