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39:14 그 여인의 집 사람들을 불러서 그들에게 이르되 보라 주인이 히브리 사람을 우리에게 데려다가 우리를 희롱하게 하는도다 그가 나와 동침하고자 내게로 들어오므로 내가 크게 소리 질렀더니 [창]39:15 그가 나의 소리 질러 부름을 듣고 그의 옷을 내게 버려두고 도망하여 나갔느니라 하고 [창]39:16 그의 옷을 곁에 두고 자기 주인이 집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려 [창]39:17 이 말로 그에게 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우리에게 데려온 히브리 종이 나를 희롱하려고 내게로 들어왔으므로 [창]39:18 내가 소리 질러 불렀더니 그가 그의 옷을 내게 버려두고 밖으로 도망하여 나갔나이다 [창]39:19 그의 주인이 자기 아내가 자기에게 이르기를 당신의 종이 내게 이같이 행하였다 하는 말을 듣고 심히 노한지라 [창]39:20 이에 요셉의 주인이 그를 잡아 옥에 가두니 그 옥은 왕의 죄수를 가두는 곳이었더라 요셉이 옥에 갇혔으나 [창]39:21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간수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창]39:22 간수장이 옥중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기므로 그 제반 사무를 요셉이 처리하고 [창]39:23 간수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살펴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 비전을 이루는 삶을 살고자 합니다. 비전이란 다시 말해서 각 개인이 원하는 꿈인데, 그런 꿈을 꾸고 그 꿈을 이루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다 이런 꿈이 있습니다. 거창하게 비전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도 있고 소박하게 작은 소원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꿈의 크기가 크건 작건 간에 누구에게나 다 꿈이 있고 소원이 있습니다. 커서 아빠가 되겠다고 말하는 소년의 꿈이나 아니면 커서 대통령이 되겠다고 말하는 소년의 꿈이나 크기와 의미의 차이가 있을 뿐 꿈의 성질에서는 다 동일합니다.
이러한 비전, 꿈, 소원에 대해서 우리는 자기 자신의 꿈을 이루는 것으로 중단하지 말고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꿈을 이루는 자들이 되자고 했습니다. 그 하나님의 꿈을 통해서 영원토록 이어지는 하나님의 영광에 들어가자고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꿈의 성취는 언제 이루어지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꿈의 성취라고 했을 때 그 꿈은 언제 이루어 질 수 있는 것일까요? 요셉의 경우도 생각해 봅시다. 그는 언제 그 꿈을 이룬 것일까요? 그가 총리가 되었을 때 꿈을 이룬 것일까요? 아니면 총리가 된 다음에 가족들을 애굽으로 데리고 오려고 했을 때 이루어진 것일까요? 물론 그런 일들 속에서 요셉의 마음과 그의 생각이 어떠했는지가 분명하게 드러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요셉은 언제부터 그렇게 하나님의 꿈을 이룰 생각을 하였을까요? 원래 요셉은 그런 이타적이고 희생적인 삶과는 거리가 멀었는데 말입니다.
맨 처음 요셉이 어떠한 자였는가를 살펴보면 그가 얼마나 변화되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원래 요셉의 본성과 어릴 적의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창37:2 야곱의 약전이 이러하니라 요셉이 십 칠세의 소년으로서 그 형제와 함께 양을 칠 때에 그 아비의 첩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로 더불어 함께 하였더니 그가 그들의 과실을 아비에게 고하더라” 여기서 '야곱의 약전'이라는 말은 그의 시대 혹은 그의 자녀들의 전기가 이러하다는 말입니다. 그 속에서 요셉은 다른 형제들의 과실을 아비에게 고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요셉은 라헬의 아들로서 동생 베냐민을 두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 라헬은 일찌기 동생 베냐민을 낳다가 죽었고 에브랏에 묻혔습니다. 죽은 아내에 대한 연민인지 요셉은 다른 형제들보다 아버지 야곱의 사랑을 더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나 어머니 없이 배 다른 형제들 밑에서 요셉은 동생 베냐민과 함께 외롭게 힘을 다해 살아가는 자였고 그러다 보니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그의 모습은 시기와 미움을 불러 일으키는 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요셉이 완전히 변화된 것은 그가 애굽에 종으로 끌려간 뒤에 보디발의 집에서 시종이 되어 살아갈 때의 일입니다. 그리고 그 어려움 속에서 그의 비전과 꿈이 형성되는 중요한 계기가 생겼습니다. 그것은 주인이었던 보디발의 아내가 시종이었던 그를 성적으로 유혹하였던 때 일어났습니다. 이것은 요셉에게 최대의 시련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반드시 넘어가야만 하는 시험이기도 하였습니다. 그가 여주인의 요구에 어떻게 대응하느냐가 바로 그가 비전을 이룰 수 있는 사람인가 아닌가를 결정하는 고비가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많은 경우 꿈과 비전을 세워서 노력합니다. 하지만 역시 많은 경우 그 꿈을 이루는데 실패합니다. 꿈이 크면 클수록 비전이 높으면 높을수록 시험과 난관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런 시험과 난관의 종류로 경험하는 것은 물질의 유혹과 안락의 유혹과 성의 유혹이 있습니다. 가장 은밀하면서도 가장 쉽게 다가오는 이러한 유혹들로 인해 우리가 넘어질 때 비전은 사라지고 꿈도 사라지고 물질의 노예와 안락함의 노예와 성욕의 노예가 되어 버립니다. 이러한 유혹은 나이를 따지지 않습니다. 어쩌면 나이가 들면 들수록 더 욕구의 노예가 되어버리기도 합니다. 공자가 말했던 지학(15), 이립(30), 불혹(40), 지천명(50), 이순(60), 종심(70)은 공자는 그랬을지 몰라도 세상 사람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요셉이 당했던 유혹도 매우 심각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 유혹을 이겨내었습니다. 그가 그 유혹을 이겨낼 수 있었던 이유는 여주인이 매력적이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그에게는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9절에 나오는 요셉의 이야기를 들어보십시오. “9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 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 뿐이니 당신은 자기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
상황을 조금 다르게 해석하면 우리에게도 적용할 수 있는 말입니다. 아무 것도 금한 것이 없지만 금한 것이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때로는 남의 아내, 남의 남편, 남의 물건, 남의 소유 등이 금하여져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우리가 못하는 것이 있는 것입니다. 십계명에 근거한 우상숭배, 살인, 불효, 간음, 뇌물, 도적질 등등이 우리가 해서는 안되는 일이고 그런 일을 함으로써 하나님께 죄를 짓게 되지 않으려고 우리도 몸부림칩니다.
결국 요셉은 그 유혹을 이겨내었습니다. 그는 옷을 잡고 끌어 당기는 여주인에게 옷을 버려두고 도망쳤습니다. 그는 이로써 자신의 꿈을 지켰습니다. 자신의 비전을 이루었습니다. 그냥 눈 한번 딱 감고 이 죄를 행해 버리자고 했으면 하나님 앞에 죄를 짓고 더 이상 비전을 이룰 힘을 잃어버렸을 텐데 그는 하나님 앞에 성실했고 죄를 짓지 않았으며 꿈을 이루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단순히 개인적인 죄를 짓지 않고 성결한 삶을 살아간 것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써 주님 앞에서 죄를 저지르지 않기 위해서 이룬 것이지 그것이 정말 하나님의 원대한 꿈을 이루는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사실, 요셉이 정말 하나님의 꿈을 이룬 것은 그 다음에 나타납니다. 그것은 그 여주인이 자기를 억울하게 고발하였을 때 일어납니다. 17,18절을 보십시오. “17 이 말로 그에게 고하여 가로되 당신이 우리에게 데려온 히브리 종이 나를 희롱코자 내게로 들어 왔기로 18 내가 소리질러 불렀더니 그가 그 옷을 내게 버려두고 도망하여 나갔나이다”
적반하장으로 그 여주인은 도리어 요셉을 범인으로 몰아붙이고 그를 정죄하고 있었습니다. 사실은 자신이 그 모든 일을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 때 요셉은 사실대로 말할 수도 있었습니다. 자신이 그런 것이 아니라 여주인이 먼저 그런 것이라고 항변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묵묵히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일로 인해 그는 왕의 죄수를 가두는 곳에 갇혔습니다.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도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는 누군가를 보호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억울함과 자신의 비통함과 자신의 불이익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를 더 생각하고 있었고 누군가를 더 위하고 있었습니다. 자기보다 다른 사람의 상황과 형편을 더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가 원래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그는 원래 남의 잘못을 고자질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본인은 똑똑하고 실력이 있어도 그로 인해서 미움과 질투를 받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변했습니다.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유익을 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로 인해서 자기의 것을 잃어버려도 말입니다. 그가 누굴까요? 요셉이 보호하였고 지켜주었던 그 사람은 누굴까요? 그는 바로 자기가 섬기던 보디발 장군입니다. 비록 보디발 장군은 화를 내면서 요셉을 옥에 넣었지만 요셉은 바로 그를 위해서 희생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꿈은 이런 것입니다. 그런 희생적인 마음이 하나님의 소원, 하나님의 꿈과 일치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도 이 세상을 위해서 자기 아들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도 하나님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으시고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시고 그로 인해서 구원을 받게 하셨습니다. 그 아들은 세상의 죄로 인해 죽으셨지만 그로 인해 살아날 사람들을 생각하시면서 무한한 희생을 하셨습니다. 그러셨던 하나님의 꿈이 바로 요셉의 꿈이 되었습니다. 요셉도 다른 사람을 위해서 자신의 것을 버리고 희생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요셉을 사랑하셨습니다. 자신과 꿈과 소원이 동일해진 요셉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20절 하반절부터 보십시오. “20 …요셉이 옥에 갇혔으나 21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전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22 전옥이 옥중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기므로 그 제반 사무를 요셉이 처리하고 23 전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돌아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게 하셨더라” 바로 그 감옥에서 요셉의 꿈이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의 꿈이 이루어졌습니다. 온전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오늘날 비전에 대해서, 꿈에 대해서 우리는 너무나 허황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냥 노력만 하면, 나만 열심히 하면, 조건없이 꿈이 이루어지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냥 앉아서 꿈을 이룰 수는 없습니다. 최선을 다해 노력할 때만이 그 꿈이 이루어집니다. 앞으로 꿈이 이루어질 것을 생각한다면 지금 현재 그 꿈을 위해서 희생하고 헌신할 수 있습니다.
흥부와 놀부의 이야기를 다 아실 것입니다. 흥부의 박씨로 인한 성공담을 들은 놀부는 자기도 그 박씨를 가져보겠다고 멀쩡한 제비다리를 부러뜨리고 고쳐줍니다. 박씨를 얻기는 하지만 그 박씨에는 도깨비가 들어있어서 박이 터지자 튀어나와서는 놀부 부부를 흠씬 두들겨 주었다는 것입니다. 박씨의 획득이 성공을 보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찌됐건 박씨만 얻으면 된다는 마음은 놀부심보일 뿐입니다. 진정으로 마음이 변화되지 않고서는 나의 꿈도, 하나님의 꿈도 이룰 수 없습니다. 그 비전의 시작은 바로 나의 희생과 다른 사람들에 대한 섬김으로 비롯됩니다.
사랑의 철가방으로 유명한 짜장면집 주인인 박권용씨는 처음 짜장면 기술을 배울 때 물만 떠오고 청소만 해야 해서 처음엔 매우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자신이 짜장면집을 차리면 그 때에도 물을 떠오고 청소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에 열심히 그 일을 했습니다. 그 다음에 양파만 깎고 식재료만 다듬을 때에도 역시 그랬습니다. 결국 기술을 가르쳐주던 사장님의 마음에 들어서 모든 기술을 전수받고 그로 인해서 최고의 짜장면을 만드는 방법을 터득했다고 합니다. 더욱 훌륭한 것은 그렇게 배운 짜장면집 기술로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의 비전과 하나님의 비전이 이루어졌습니다.
여러분 자신의 꿈을 이루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의 꿈을 이루시기를 원하십니까? 진정으로 우리가 희생하고 헌신하는 길 만이 우리가 우리의 꿈도 이루고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꿈을 이루는 방법입니다. 이를 위해서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조금만 줄이고 내가 해야 하는 것을 더 늘여 봅시다. 또한 나만 생각하지 말고 다른 사람을 생각해 봅시다. 다른 사람을 섬기며 배려하고 그를 위해 줍시다.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는 대상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내 가족이 그 대상이며, 우리 교회성도들이 그 대상입니다. 그것이 잘 되면 학교로, 회사로, 사회로 더욱 확장될 수 있을 것입니다.
비전의 시작은 바로 지금부터입니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더욱 절제하면서 하나님의 꿈을 향해 나아갈 때 하나님을 섬기며 다른 사람들을 섬길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비전의 시작임을 기억하면서 그러한 비전의 성취를 함께 만들어가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구성 1. 비전이 이루어지는 것은 성공하고 난 다음이 아니라 비전에 따르는 삶을 살게 된 다음입니다. 2. 요셉은 원래 이기적이며 고자질하는 자였지만 하나님과 함께 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섬길 때 변화되었습니다. 3. 하나님이 그를 사랑하시고 함께 하신 것은 그가 하나님의 진정한 꿈을 다 이루어드렸기 때문입니다. 4. 우리는 박씨만 있으면 된다는 놀부처럼 되지 말고 요셉처럼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비전을 이루는 자들이 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