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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계획] 61벧후 1; 10-12 신성한 성품에 참여해야 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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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벧후 1; 10-12 신성한 성품에 참여해야 하는 이유_1

  

 

  

2019. 1. 20. . 주일오전.

  

 

  

*개요:  신성한 성품의 필요성, 51계획, 3관점, 6서신서

  

[벧후]1:10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하리라

  

[벧후]1:11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

  

[벧후]1:12           그러므로 너희가 이것을 알고 이미 있는 진리에 서 있으나 내가 항상 너희에게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

  

 

  

이번 달 베드로후서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게 하시려는 것을 살펴보면서 이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 느끼게 됩니다. 대개 이러한 말씀이 사도행전이나 로마서에 나왔으면 많은 성도들이 이 내용을 깨닫고 삶에 적용할 수 있겠지만 베드로후서와 같이 서신서의 끝부분에 나오고 있기 때문에 그 내용을 잘 모릅니다. 또한 그 내용을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중요성을 잘 모릅니다. 그래서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내적인 변화보다는 외적인 변화에만 관심을 갖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내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게 되기도 하고 그로 인해서 신앙인들이 형식적인 종교인으로 전락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아는 모든 신앙인들의 안좋은 모습은 전부 그들의 내적인 변화의 부족에서 생겨납니다. 신앙인들이 신앙생활의 부족으로 사람들의 비판을 받고 욕을 먹는 것이 아닙니다그들의 신앙심의 부족으로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 심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성품의 악함과 추함으로 인해서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징계와 심판을 받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어떤 성품을 갖게 될 것인가입니다.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될 때 하나님과 사람들에게서 칭찬을 얻는 자가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러한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이렇게 성품의 변화를 이루게 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믿음에 덕, 지식, 절제, 인내, 경건, 우애, 사랑을 공급하는 것이 어려운 일입니다. 그에 비하면 차라리 외적인 모습을 이루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도 들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만 어떻게 살게 되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도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신성한 성품은 개인적인 공간이나 교회에서만의 어떤 모습이 아니라 삶의 모든 면에서 나타내야 하는 모습입니다. 신성한 성품은 모든 삶 속에서 끊임없이 나타나는 덕목이며 그것이 결국은 그 사람 자신의 본질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결코 흉내만 내거나 외적인 모습으로만 국한시킬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부담감 때문에 신성한 성품에 동참하기 위해서는 애를 써서 주님께 나아와야만 하고 주님의 손길에 따라야 하며 자신의 의지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혹시라도 신성한 성품을 위해서 노력해본 사람들은 많은 어려움을 느끼게 되었고 이러한 삶의 변화에 대해서 말하고 격려하는 것은 힘들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에 대해서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모두가 스트레스를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당연한 이유는 삶의 변화가 당장 쉽게 나타나는 것이 아니어서 가시적인 성과도 없고 생각대로 쉽게 이루어지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 일을 이룸으로써 어떤 좋은 점이 있는지가 언급되어야 합니다. 또한 그것이 묵상되어야 합니다. 무작정 좋으니까 해야만 한다는 식이 아니고 그렇다고 온전히 이룰 수 없으니 미리 포기한다는 식도 아닌 분명한 신앙의 이유와 목표를 가지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행하는 노력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도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게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완성한다는 것이 아니라 참여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변화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잘 보여주는 것이 10절 말씀입니다.

  

“[벧후]1:10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하리라

  

베드로는 형제들에게 힘써 노력해서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믿음에 덕을, 지식을, 절제를, 인내를, 경건과 우애와 사랑을 잘 공급하면서 노력하면 하나님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렇게 행할 때 언제든지 실족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10절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깨닫는 것은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것이 중요하고 필요한 이유는 그것으로 인해서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렇게 할 때 실족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것만으로도 우리가 신성한 성품을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러한 일을 이루게 하시도록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또한 우리를 택하셨습니다. 그 귀한 부르심과 택하심이 우리가 어떤 성품의 사람이 되는가로 나타납니다. 그러니 이일을 결코 소홀히 여겨서는 안됩니다. 새로운 사람이 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영광스럽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에 더해서 신성한 성품이 중요한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바로 11절에 그 내용이 나타납니다.

  

“[벧후]1:11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

  

이렇게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성품을 갖게 된다는 것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하신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구원의 기준은 아닌 것입니다. 하지만 특별히 넉넉히 받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이 넉넉히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때 우리는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성품에 대해서 잘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넉넉히는 헬라어로 ‘πλουσίως’ 이고 영어로는 ‘abundantly, richly’ 입니다. ‘풍성하게, 분명하게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주 풍성하고 분명하게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로 그러한 넉넉히 들어감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이 말은 천국에 어떻게 들어가느냐를 보여줍니다. 넉넉하게 들어간다고 한다면 반대로 아슬아슬하게 들어가는 것도 있습니다. 그렇게 들어가는 천국에 들어가는 과정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 천국이 어떠한가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성도들은 이와 연관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공평한가 공평하지 않은가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에 대해서는 당연히 공평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공평하지 않음이 슬픔과 괴로움을 만들어내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공평하지는 않지만 슬픔이 없습니다. 또한 기쁨과 즐거움이 있지만 분명한 차등이 있습니다. 어떻게 이 둘이 공존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은 애초에 공평하지 않음과 차등이 있음이 고통과 괴로움과 슬픔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맨 처음에 창조하신 세계인 에덴동산을 보십시오. 그곳에 공평하지 않음과 차등이 있었습니까? 그렇습니다. 그곳에 공평하지 않음과 차등이 있었습니다. 인간이 만물을 다스리게 하셨던 것입니다. 또한 생육하게 하셨기 때문에 역시 부모 자녀라는 차등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에덴동산에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닙니다. 에덴동산에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담과 하와의 욕심 때문이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 밖으로 쫓겨나갔을 때에도 그들이 차등과 다름 때문에 고통받은 것이 아니라 세상의 척박함과 노동의 고통, 출산의 고통 때문에 고통받았습니다. 그것이 맨 처음 인간의 슬픔이자 괴로움이었습니다. 자기 욕심의 결과를 얻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천국은 그 모든 욕심의 결과가 용서받고 심판 받는 곳이기 때문에 에덴의 시기로 복귀됩니다. 그러면서도 인간은 단순한 피조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재창조의 상태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천국은 차등과 구별이 있지만 기쁨과 즐거움과 감사가 넘치는 곳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천국에 대해서 설명을 할 수 있는데 그와 별개로 천국에 들어가는 것에도 넉넉히 들어감과 간신히 들어감이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418절을 봅니다.

  

“[벧전]4:18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받으면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은 어디에 서리요”  

  

여기서 겨우는 헬라어로 ‘μόλις’ 이고 영어로는 ‘hardly, not easily’ 해석은 힘들게, 간신히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구원을 얻는 과정이 아주 힘들게 얻는 사람이 있고 그 과정이 아주 넉넉하게 얻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그 양쪽 극단 사이에 있습니다. 어쩔 수 없이 힘들게 구원을 얻게 되는 것보다 넉넉하게 구원을 얻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성품에 참여함으로 넉넉한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을 준비해야만 합니다.

  

열차를 타고 가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열차가 출발하기 전에 미리 와서 자기 좌석에 올라타서 느긋하게 출발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출발할 때 맞춰서 간신히 열차를 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한 비행기를 탈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미리 와서 자리에 앉아 느긋하게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고 급하게 방송으로 부르고 직원들이 뛰어다니면서 찾아서 비행기에 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신앙에서도 넉넉히 얻는 구원이 있고 간신히 얻는 구원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열차나 비행기는 제 때에 못 타면 다음 것을 타면 되지만 구원의 과정에서는 다음 구원이란 없습니다. 한번 죽으면 그 살았을 때의 결정을 돌릴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아슬아슬하게 구원을 받는 것보다 넉넉하게 미리미리 구원을 얻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신성한 성품이 준비되어야 합니다. 그 성품에 참여해야 합니다. 그 삶의 모습이 존재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믿음은 늘 흔들리고 취약한 상태 속에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실족해서 자신의 믿음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더욱 주의깊게 준비해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믿음은 한번 갖게 되면 영원히 유지되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가 믿음을 갖는다는 것이 그렇게 취약하고 흔들릴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까? 개혁주의 신앙의 근간인 성도의 견인은 한번 선택받은 성도는 반드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인데 한번 믿음을 가진 성도는 어떻게 타락을 해도 반드시 구원을 받을 것이 아닙니까?

  

이러한 고민에 대해서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바는 하나님의 선택은 정말로 그렇지만 실제로 우리가 하나님의 선택을 알 수는 없기 때문에 우리의 믿음은 항상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이 항구적이라는 말이지 우리의 믿음이 항구적이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고린도전서 9:27절에 나온 대로 그 스스로 버림이 될까 두려워하면서 자신을 쳐 복종시켰습니다.

  

“[고전]9: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믿음을 끝까지 유지하고 천국에 넉넉히 들어가기 위해서 우리는 믿음에 신성한 성품을 더욱 공급하라고 하신 말씀의 의미를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방종에 빠지고 하나님 안에서 마땅히 해야할 바를 하지 않는 일을 행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도의 견인을 믿는 이유는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고 의지하기 때문이지 하나님을 저버리고 그 부르심을 무의미하게 생각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온전히 따르려고 할 때 우리의 구원도 넉넉하게 이루어지고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뜻도 온전히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아슬아슬하게라도 구원을 받을 수만 있다면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인간의 편에서의 생각입니다. 하나님 편에서는 그렇게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그렇게 되기까지의 기다리심과 부르심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구원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야 말할 수 없는 기쁨이지만 넉넉하게 구원을 받을 수 있었던 상황이 간신히 구원을 얻는 상황으로 전락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베드로사도는 이것을 성도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벧후]1:12         그러므로 너희가 이것을 알고 이미 있는 진리에 서 있으나 내가 항상 너희에게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

  

이미 알고 있지만 더욱 항상 생각나게 하도록 베드로사도는 또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이것을 또 한번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두 가지 필요성으로 인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신성한 성품에 참여할 의지를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부르심과 택하심입니다. 그 부르심과 택하심의 귀중함을 생각할 때 더욱 힘써 거룩한 성품에 참여할 것을 다짐할 수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넉넉히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간신히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넉넉하게 구원을 얻기를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믿음에 신성한 성품을 공급함으로 준비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둘 중 어느 것이 더 마음에 와닿으십니까? 어떤 것이든지 잘 기억하셔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영광스럽게 하거나 혹은 넉넉히 구원을 받은 자의 기쁨이 우리에게 넘칠 것입니다. 이러한 새로운 삶에 대한 결심이 삶 속에 넘치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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