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계획] 56딛 1; 10-16 불순종하며 속이는 자들의 존재Loading the player... Loading the player... []
56딛 1; 10-16 불순종하며 속이는 자들의 존재_1
2018. 9. 16. 주. 주일오전.
*개요: 변화의 필요성, 3관점, 51계획, 6서신서 [딛]1:10 불순종하고 헛된 말을 하며 속이는 자가 많은 중 할례파 가운데 특히 그러하니 [딛]1:11 그들의 입을 막을 것이라 이런 자들이 더러운 이득을 취하려고 마땅하지 아니한 것을 가르쳐 가정들을 온통 무너뜨리는도다 [딛]1:12 그레데인 중의 어떤 선지자가 말하되 그레데인들은 항상 거짓말쟁이며 악한 짐승이며 배만 위하는 게으름뱅이라 하니 [딛]1:13 이 증언이 참되도다 그러므로 네가 그들을 엄히 꾸짖으라 이는 그들로 하여금 믿음을 온전하게 하고 [딛]1:14 유대인의 허탄한 이야기와 진리를 배반하는 사람들의 명령을 따르지 않게 하려 함이라 [딛]1:15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나 더럽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아무 것도 깨끗한 것이 없고 오직 그들의 마음과 양심이 더러운지라 [딛]1:16 그들이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
은혜를 받고 그 결과로 변화의 삶을 살아가는 것은 온전히 은혜를 받은 성도들의 모범적인 모습입니다. 이렇게 변화를 이루며 살아갈 때 어떤 문제도 잘 해결해 나갈 수 있고 어떤 목표도 잘 이루어 나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은혜를 받았어도 변화의 삶을 살지 않거나 은혜를 받지 못해서 변화의 삶을 살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변화의 삶이 없을 때에는 은혜를 받아도 그 은혜가 무의미해짐을 알아야 하고 은혜가 없으면 은혜를 얻는 것이 필요함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못하고 변화의 삶이 없는 상태로 오랜 시간이 지나가게 되면 결국에는 은혜를 거부하고 은혜가 필요하다는 것도 잊어버리고 그 모습이 매우 심각한 상태가 되어 버립니다. 지금도 우리는 주일에 교회에 모여서 함께 예배를 드리지만 평일에는 서로가 어떻게 사는지 잘 모릅니다. 주일에는 가장 선량해 보여도 평일에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는지 알 수 없습니다. 교회에서는 열심이 있는 것 같아도 가정이나 사회에서는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가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다른 영역에서의 삶을 추적하거나 다 개방하는 것도 쉽지는 않습니다. 결국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는 어떤 영역이든지 존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질적으로 자기 자신이 자신을 돌아보는 수 밖에 없습니다. 나 자신을 외적인 조건과 환경과 상황으로 판단하지 말고 정말 내 자신은 어떤 사람인가를 끊임없이 돌아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럴 때 자신의 진정한 상태를 파악하고 변화를 위한 필요한 조치를 취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변화를 위하여 살아가면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은혜를 잘 채워갈 수 있습니다. 오늘 성경말씀은 변화를 거부하는 모습에 대해서 보여주면서 어떤 사람들이 언급되는데 그들은 할례파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변화를 거부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그들과 비슷해지거나 혹은 그들을 본받아서는 안된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변화를 이루고자 할 때 변화를 거부하며 살아가는 자들을 닮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제 그 할례파 유대인들의 모습이 어떤지를 살펴봅니다. 그들은 ‘불순종하며 헛된 말을 하며 속이는 자’들이었습니다. “[딛]1:10 불순종하고 헛된 말을 하며 속이는 자가 많은 중 할례파 가운데 특히 그러하니 [딛]1:11 그들의 입을 막을 것이라 이런 자들이 더러운 이득을 취하려고 마땅하지 아니한 것을 가르쳐 가정들을 온통 무너뜨리는도다” 그들은 할례파 중에서 특히 불순종하고 헛된 말을 하며 속이는 자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할례파는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유대인들을 의미했습니다. 그들은 교회 안에 들어와 있기는 했지만 할례파였기 때문에 사실 할례를 받지 않았고 또한 이방인인 헬라인이기도 하였던 디도에게 너무나 골치아픈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잘못된 생각을 계속 고집하면서 마땅하지 않은 것을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가정들을 무너뜨리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더러운 이득을 취하려고 하는 악한 의도에 근거했습니다. 그러한 자들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디도가 올바르게 알고 그들에게 흔들리지 않고 그들로부터 오는 악한 영향들을 대적하여 온전한 성도의 모습을 만들어 갈 수 있도록 권면하였습니다. 이것이 우리들에게도 중요한 것은 할례파 유대인들이 보여주었던 불순종과 헛된 말과 속이는 말은 지금도 우리 주변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그러한 자들이 되지 않도록 노력할 때에 비로소 그러한 사람들과 달라지면서 온전히 가정과 교회와 삶을 세워가는 성도들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불순종하고 헛된 말을 하며 속이는 데에는 어떤 이유가 있습니다. 또한 순종하지 않거나 유익하고 진실한 말을 하지 않고 마땅하지 않은 것을 가르쳐서 자기 가정 뿐만 아니라 다른 가정들도 온통 무너뜨리는 데에도 다 이유가 있습니다. 과연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더러운 이득을 취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변화를 위한 그 어떤 시도도 거부하는 것입니다. 변화를 위한 열매보다 현재 변화하지 않으면서 얻을 수 있는 이득이 더 크기 때문에 자기도 망하고 다른 사람도 망합니다. 이러한 자들의 모습이 바로 불순종하며 헛된 말을 하며 속이는 자들이었습니다. 디도에게는 그들이 헬라파 유대인으로 명확하게 지칭되어 있었지만 오늘날에 그러한 자들은 명확하게 지칭되지 않습니다. 다만 ‘불순종하며 헛된 말을 하며 속이는 자들’일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이 시대에 찾아볼 때에 진리를 추구하지 않으며 말씀을 삶 속에 적용시키려 하지 않고 오직 자기가 살아온 경험과 주장대로 살고자 하는 자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교회 생활을 하면서 눈살을 찌푸리게 되던 사람들이 바로 그런 자들입니다. 지난 주에는 우리 교회가 속한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측의 전체 총회가 있었습니다. 총회에는 전국에서 합동측에 속한 교회의 대표들이 모여서 회의를 합니다. 중요한 안건들이 다루어지고 중요한 결의들이 진행됩니다. 그럴 때 그 많은 결의들 중에는 단순히 목표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문제거리들입니다. 현재 전국에서 진행되고 있는 교회, 목사, 장로, 성도의 문제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애초에 그런 불미스러운 문제들이 왜 생겼는가를 생각해보면 그들이 말씀에 대해서 불순종하며 헛된 말을 하며 속이는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순종하며 진실하며 충성하였다면 그런 문제가 생길 수 있었겠습니까? 하지만 그렇지 않았기에 여러 문제들이 생겼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과 힘든 과정이 뒤따르게 된 것입니다. 그들이 더러운 이익을 따랐기 대문에 그렇게 불순종하며 문제를 일으키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변화를 이루어야 하는 중요한 이유는 그럴 때 자기 자신이 악한 사람들처럼 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늘 변화되면서 자기 자신을 말씀 앞에 내려놓고 순종하며 진실한 말을 하며 충성하면서 살려고 하지 않는다면 어느새 다른 사람들에게 불순종하며 헛된 말을 하며 속이는 자로 설 수 있습니다. 더러운 이익을 추구하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하지만 자신의 실수의 가능성을 인정하며 새로워지려고 한다면 계속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후보자가 인사청문회에서 자신의 잘못이 드러나 수치를 당하는 것을 보면 다음 후보자가 되려는 사람은 그렇게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음주단속에서 음주운전으로 면허가 취소되는 것을 보면 자신은 그러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교통법규를 어겨서 범칙금을 부과 받게 되면 앞으로 그런 행동을 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이 그런 사람들에 비해 달라지고자 하지 않는다면 이 모든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여전히 불법은 성행하고 여전히 잘못된 행위는 고쳐지지 않습니다. 문제는 내가 어떻게 되려고 하느냐입니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고 할 때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우리가 이러한 변화를 이루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그런 악한 사람들이 되지 않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변화가 필요한 자를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변화될 수 있는 자들이 변화를 이루지 못하고 악인으로 떨어지게 되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그 변화를 이루도록 강력하게 밀어 붙이십니다. 그런 변화를 촉구하시며 변화에 대한 피할 수 없는 상황들을 허락하시기도 합니다. 디도에게 주어진 권면은 바로 이러한 변화를 이루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보여줍니다. “[딛]1:12 그레데인 중의 어떤 선지자가 말하되 그레데인들은 항상 거짓말쟁이며 악한 짐승이며 배만 위하는 게으름뱅이라 하니 [딛]1:13 이 증언이 참되도다 그러므로 네가 그들을 엄히 꾸짖으라 이는 그들로 하여금 믿음을 온전하게 하고 [딛]1:14 유대인의 허탄한 이야기와 진리를 배반하는 사람들의 명령을 따르지 않게 하려 함이라” 이 말은 기원전 6세기경에 그레데 섬에 살았던 에피메니데스라는 철학자이자 시인이 한 말입니다. 그는 ‘모든 그레데인들은 거짓말장이다’라는 명제를 남겼습니다. 바울은 구약의 선지자가 아니라 헬라인 철학자이며 시인였던 사람의 말을 인용하여 그레데인들을 평가하였습니다. 선지자라는 헬라어(프로페테스, προφήτης)가 이러한 시인을 의미하는 말이기도 하였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바울은 그들에게 그레데인이기 때문에 그럴 수 있지만 그러나 그러한 성품을 그냥 내버려두지 말고 그들을 엄히 꾸짖어서 안좋은 모습을 바로 잡게 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믿음이 온전하게 되고 유대인의 허탄한 이야기나 진리를 배반하는 자들의 명령을 따르지 않게 하려 함이었습니다. 이는 그 불순종하는 자들이 아무런 변화를 이루지 못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더 악하고 대적하는 자들이었던 유대인과 진리를 배반하는 사람들의 허탄한 이야기나 명령에 흔들리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변질되지 않고 오히려 변화될 수 있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분명한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불순종하고 헛된 말을 하며 속이는 자들이 비록 그레데인이라서 태생적으로 안좋은 모습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냥 내버려두지 말고 변화되는 사람들이 되도록 꾸짖고 가르치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어떤 사람들이든지 현재의 모습에 머물러 있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성격이나 성품이나 성향에 대해서만 그렇게 생각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애초에 우리는 그런 인격적인 부분은 고사하고 우리의 본질 자체가 악하여서 죄로 인해 죽을 수 밖에 없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죄악된 우리들을 하나님께서는 살리셨습니다. 그것은 온전한 사랑으로 이루어진 일이었습니다. 에베소서는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잘 말하고 있습니다. “[엡]2: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엡]2:4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엡]2: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이렇게 그 큰 사랑을 인하여 인간을 구원하신 하나님께서는 단지 구원하시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그 사랑으로 인해서 온전한 변화를 이루어서 하나님의 귀한 자녀로 행하게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한 모습은 이전에 어떤 악한 모습이나 불완전한 성품을 가지고 있든지 상관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2장 10절 에는 이러한 변화의 계획이 나타납니다. “[엡]2:10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러한 놀라운 계획을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 어떤 사람이든지 그리스도를 믿고 그 안에 들어온 사람이라면 그에 대한 놀라운 변화의 계획을 이루어 주십니다. 그 한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자 하십니다. 그래서 비록 그레데인이라도 혹은 헬라파 유대인이라도 돌이켜서 믿음을 온전하게 하고 악한 자들의 명령을 따르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불순종하며 속이는 자들은 자꾸만 유대인의 허탄한 이야기와 진리를 배반하는 사람들의 명령에 귀를 기울입니다. 그래서 그 악한 이야기에 악한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사탄은 지금도 믿음을 가지고 있는 자들을 유혹합니다. 그들은 구원과 상관없고 믿음과 상관없는 이야기를 통해서 한 사람이라도 더 신앙 안에서 떨어뜨리고자 합니다. 그러다 보니 그런 일에 가장 영향을 받는 사람들은 바로 마음과 양심이 더러운 자들입니다. 마음과 양심이 깨끗한 자들은 아예 유대인의 허탄한 이야기나 진리를 배반하는 사람들의 명령은 귀담아 듣지도 않는데 꼭 불순종하며 헛된 말을 좋아하며 속이는 자들이 그런 악한 말에 영향을 받아서 결국은 믿음에 있어서 파선을 하게 됩니다. 15절을 보십시오. “[딛]1:15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나 더럽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아무 것도 깨끗한 것이 없고 오직 그들의 마음과 양심이 더러운지라” 이것은 걸릴 돌에 부딪히는 것입니다. 삶이 온전하지 않을 때에는 믿음도 온전하게 지킬 수가 없습니다. 마음과 양심이 더러워져서 삶 속에 신실한 믿음과 상관없이 살아갈 때에는 그 악한 마음과 양심으로 인해 허탄한 이야기나 진리를 배반하라는 명령에 쉽게 응답해 버립니다. 우리는 이러한 유혹이 있음을 깨닫고 그 유혹에 들어가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해야 하는 것은 삶 속에서 믿음을 어떻게 나타낼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불순종하며 헛된 말을 하며 속이는 자들’은 애초부터 이러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던 자들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악한 자들의 유혹에 취약해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의 모습을 16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딛]1:16 그들이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 입으로는 하나님을 시인했지만 행위로는 부인했을 때 표리부동하기 때문에 가증한 자가 되었고 진리에 대해서 복종하지 않는 자가 되었고 모든 선한 일을 버리고 따르지 않는 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자들이 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그와 달라져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변화를 거부하지 말아야 합니다. 믿음은 그 모든 변화를 이루기 위해서 필요한 준비입니다. 그 준비만 잔뜩 하고 실제로 그런 변화를 이루지 않는다면 실행은 하지 않은 것입니다. 공부할 준비를 잔뜩하지만 공부를 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일할 준비는 다 마쳤지만 실제 일은 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이제 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을 시인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는 진실한 자요 순종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따르는 자입니다.
예배가 끝나고 우리는 다시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 다음에 어떻게 사느냐는 것은 여러분 자신의 몫입니다. 뿌린 대로 거두리라는 말씀을 기억하면서 변화를 향해 나아가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는 불순종하고 헛된 말을 하며 속이는 자들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시인하지만 행위로는 부인하는 자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이러한 진실한 자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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