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계획] 50빌 1; 27-30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사람들Loading the player... Loading the player... [pdf]
50빌 1; 27-30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사람들_1
2018. 4. 22. 주. 주일 오전
*개요: 하나님의 자녀들의 할 일, 51계획, 6서신서, 3관점 [빌]1:27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에게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빌]1:28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증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증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 [빌]1:29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빌]1:30 너희에게도 그와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
이전에 우리는 그리스도가 전파되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들의 기쁨이 될 수 있다는 말씀을 보았습니다. 그것이 정말 기쁨이 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겠지만 여전히 어떻게 그것이 기쁨이 될 수 있을지를 의아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기쁨의 요소의 차이는 취향의 차이이며 관점의 차이이며 입장의 차이입니다. 우리는 일상생활 속에서 그러한 기쁨의 요소가 다른 상황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과학에 관심이 있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아이가 있습니다. 최근 유초등부에서는 과천 과학관의 곤충전시회에 갔었는데 관심있게 살펴보는 아이가 있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아이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차이는 주변에서 쉽게 살펴볼 수 있습니다. 또한 연령대 별로 관심의 차이가 있기도 합니다. 요즘 유행하는 랩에 젊은이들이 열광하지만 장년들은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또한 심지어 안좋게 보기도 합니다. 이렇게 좋아하는 분야가 다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좋아하는 정도가 다를 수 있습니다. 비 오는 날 축구를 하는 사람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얼마나 축구를 좋아하는 것입니까! 또는 좋아하는 이유가 다를 수 있습니다. 야구장에 가도 정말 야구를 좋아하는 이유는 전혀 의외의 내용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야구 그 자체보다 응원단을 좋아해서 야구장에 가는 경우도 있고 아니면 단순히 야구장의 분위기가 좋아서 야구를 좋아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렇듯 사람마다 기쁨의 요소가 각기 다른데 그와 같이 신앙에 대해서도 기쁨의 요소가 다릅니다. 신앙에 대해서 그것이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가 아니라면 별로 좋게 생각되지 않을 것입니다. 신앙에 대해서 좋아하는 정도가 그리 크지 않다면 역시 심드렁할 것입니다. 또한 신앙에 대해서 좋아하는 이유가 남다른 것이 있다면 그 역시 공통의 기쁨에는 참여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기쁨의 차이 속에서 우리가 오늘 보려고 하는 것은 신앙이 기쁨이 되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왜 기쁨이 되는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별로 재미없어 보이는데 왜 그것이 기쁨이 되는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듣는다면 점차 그 기쁨이 무엇인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 속에서 여러분 자신도 그 기쁨에 동참할 수 있게 된다면 너무나 좋겠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 나중을 위해서 그것이 왜 기쁨이 되는지를 알아 두는 것은 언젠가 미래에 진정한 기쁨을 알게 되기 위한 하나의 초석이 될 것입니다.
이제 함께 보는 27절 말씀에 그리스도가 전파되는 것을 기뻐한다면 그 기쁨의 이유가 무엇인가가 나옵니다. “[빌]1:27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에게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여기에 그리스도가 전파되는 것을 기뻐하는 기쁨의 이유가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기쁜 이유가 나타나 있는 어구가 있습니다. 그것은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입니다. 복음의 신앙을 위해서 협력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전파되는 것을 기뻐합니다. 그 속에 기쁨의 요소가 있습니다. 협력하고 도움을 주고 도울 수 있기 때문에 기쁜 것입니다. 도울 수 있다는 것이 왜 기쁜 일인가 하면 그 협력은 복음의 신앙을 위한 협력이었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믿게 하기 위해서 협력한 것입니다. 복음을 믿게 되기를 바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한 사람의 구원받음에 대해서 협력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협력하였기 때문에 누군가 한 사람이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한 사람의 구원받음이 감사하고 기쁜 일이기도 합니다. 한 영혼을 구원할 수 있었다는 것은 얼마나 큰 보람과 가치입니까! 그런데 여기서 설명하고 있는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의 의미는 그 앞서 나온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와 관계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한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한 것이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또한 기쁜 일이 됩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에 부족하거나 부끄럽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복음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명령을 믿는 자들에게 주셨습니다. “[행]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우리는 성령의 임하심을 통해 그리스도인이 되었기 때문에 현재 있는 곳을 의미하는 예루살렘이나 멀리 있는 곳을 의미하는 땅 끝까지 이르러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분명하게 증거해 주셨기 때문에 믿는 자들에게는 분명한 사명과 부르심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명과 부르심을 실천하고 완수하며 살아가는 것은 복음을 맡은 자들의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앙의 기쁨은 일반적인 생활의 기쁨과 성격이 다릅니다. 신앙의 기쁨은 주어진 일을 끝냈을 때의 기쁨입니다. 생활에서의 기쁨은 그 때 그 때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는 기쁨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앙의 기쁨은 복음에 합당하게 살고 복음의 전파에 협력을 하는 구체적인 실천이 먼저 있은 다음에 기쁨을 얻는 것이지만 생활의 기쁨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지금 당장 실현함으로서 기쁨을 얻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의 기쁨은 조금 후에 얻는 것이고 생활의 기쁨은 지금 당장 얻게 됩니다. 그러나 생활의 기쁨은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지만 신앙의 기쁨은 그로 인해 더 좋은 것을 얻는 결실이 있고 열매가 있는 기쁨입니다. 명절 때마다 우리 교회 앞에는 우체국 집배원들이 명절 선물을 한아름 쌓아두고 배송하는 일을 합니다. 그럴 때 집배원 아저씨들은 열심히 택배를 배송합니다. 그 일이 힘들어 보이기는 하지만 그 선물들이 받아야 할 사람에게 안전하게 전달될 때 집배원 아저씨들은 자신의 맡은 책임을 다합니다. 만약 그분들이 그것이 자기 일인데 놀고 있거나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거나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자신이 맡은 일에 대해서 징계를 받을 것입니다. 또한 한쪽에서 열심히 택배를 배송하는 동안 다른 일을 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것은 집배원들이 택배 물품을 배송하러 간 동안에 남아있는 물품들을 지키는 일입니다. 간단해 보여도 한 곳에 꾸준히 머물러서 날씨가 춥거나 덥거나 집배원들의 배송 업무의 일이 다 끝나기 까지 견딘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바로 그렇게 하면서 그분은 우체국에서 하는 일에 협력한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그가 얻게 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수고에 보답을 받게 됩니다. 복음의 신앙을 위해서 협력한다는 것이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열심히 직분을 맡은 자들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애를 쓸 때에 지켜야 할 것을 지켜만 줘도 큰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복음의 전파에 협력하는 것은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협력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협력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상을 주십니다. 그 상이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그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음성을 우리는 마태복음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마]25:34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오른 편에 있는 자들이 적은 소자에게 먹을 것을 주고 마시게 하고 영접하고 옷을 입히고 돌보고 와서 살펴보았던 자들인데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복음의 전파에 협력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마]25: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마]25:36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그리고 그렇게 열심히 행한 일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예비된 나라와 상급을 허락해 주십니다. 하루 일을 하면 하루 치 급료를 받고 한 달 일하면 한 달 치 봉급을 받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 충성 되어서 복음의 전파에 협력한 일에 대한 상급은 길게 보면100년 일하고 영원토록 누리는 것으로 받게 되니 이 얼마나 획기적인 상급이겠습니까? 또한 이것은 얼마나 영광스럽고 기쁜 일이겠습니까?
자, 이것이 하나님의 일을 기뻐하는 자들이 갖는 기쁨입니다. 이 신령한 기쁨을 가지고 살아가는 자들은 세상의 기쁨을 가지고 살아가는 자들과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원하는 분야와 원하는 수준과 원하는 이유의 기쁨을 가지고 살아가지만 신앙의 기쁨은 그 어떤 기쁨과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보상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가장 기쁘고 기쁜 것입니다. 이러한 기쁨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그 반대에 있는 사람들이 나타납니다. 신앙의 기쁨의 영광과 감사를 생각하면 할수록 그 반대에서 세속의 기쁨을 누리는 사람들의 수치와 고통을 보게 됩니다. 28절을 보십시오. “[빌]1:28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증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증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 합력하는 자들이 있으면 대적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 때문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고 또한 두려워하지 않아야 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은 그러면 그럴수록 멸망의 증거를 쌓아가는 것이고 믿는 자들은 구원의 증거를 쌓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멸망의 증거는 그들이 멸망을 받을 수 밖에 없는 그리스도께 대한 대적함과 악한 행동을 의미합니다. 반대로 구원의 증거는 믿는 자들이 복음을 위해서 행한 그 모든 일들이 전부 그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믿음의 증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되는데 그 믿음에 대해서 우리는 증거가 필요합니다. 그 믿음의 증거가 바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순종의 믿음이 있고 그 믿음이 진실하다면 왜 복음의 전파를 위해서 협력하지 않겠습니까? 오히려 그러한 믿음이 없고 복음의 전파에 대한 의지가 없을 때에는 복음의 전파에 대해서 무관심하며 소홀하고 외면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사람에게는 구원의 증거는 하나도 찾을 수가 없고 멸망의 증거만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에는 하나님의 일을 기뻐한 것이 아니라 사람의 일을 기뻐하며 하나님 나라의 일에 협력한 것이 아니라 세상 나라에 협력하게 됩니다. 그러한 자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심판을 보십시오. “[마]25:41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그들은 마귀와 그 사자들이 하는 일을 따라한 자들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대적하고 훼방하며 무관심하고 외면했던 것입니다. “[마]25:42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마]25:43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그러니 창세 이래로 끊임없이 하나님의 사역을 훼방했던 마귀와 그 사자들이 심판을 받아 영원한 불에 들어갈 때 함께 저주를 받고 따라 들어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멸망의 증거를 가져야 할지 구원의 증거를 가져야 할지는 너무나 분명합니다. 우리는 구원의 증거를 가져야만 합니다. 그럴 때 모든 멸망 받을 자들 중에서 구원받을 자로 우뚝 설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의 선택 속에 있습니다. 그것은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사람들이 될 것인가 아니면 복음의 신앙에 대해서 대적하는 자들이 될 것인가 입니다. 우리가 협력하는 자가 되고자 한다면 그 속에 그렇게 되는 것에 대한 분명한 기쁨이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분명한 하나님의 상급과 칭찬이 있습니다. 구원의 증거가 틀림없이 생기게 됩니다. 그것을 교회와 성도들이 증거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복음의 신앙을 위해서 어떻게 협력했는지 하나님이 모르실 리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협력의 순간순간 속에서 하나님께서 그러한 마음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 구원의 증거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도 모르고 장로도 모르고 권사도 모르고 성도들은 아무도 몰라도 하나님은 아십니다. 그 귀한 수고와 손길을 하나님은 기억하십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따르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분명한 결단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하나님의 힘주심이 있고 인도하심이 있을 때 그것을 온전히 붙들기 위해서 우리는 고난을 감수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빌]1:29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빌]1:30 너희에게도 그와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를 받으면서 우리는 단지 믿을 뿐만 아니라 고난도 감수하게 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단순히 사도 바울의 권면만이 아닙니다. 이 말씀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격려하십니다. 우리는 편하게 믿기만 하지 않고 틀림없이 고난도 감수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고난은 결코 무의미한 고난이 아닙니다. 분명 놀라운 열매와 결실을 얻게 하는 기쁨의 고난입니다.
얼마전 헐리우드 영화배우들이 내한했습니다. 내한한 배우들을 보려고 팬들은 밤새 줄을 섰고 야외 노숙을 했으며 마침내 그 다음날 도착한 배우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 때 그들은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자신들이 간절히 기다리고 정말 보고 싶어하던 배우들을 만났던 것입니다. 여기 그 배우들보다도 비교할 수 없으신 예수님이 계십니다. 그분을 만날 날이 다가옵니다. 그분의 전파를 기뻐하였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온 힘을 다해서 복음에 헌신하였고 빌립보 교회도 그래서 그 복음의 전파에 협력했습니다. 그분을 기뻐하면서 협력하는 자들이 됩시다. 그래서 그분을 만나는 것이 진정한 기쁨이 되는 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하나님이 주시는 새로운 마음으로 충만하게 되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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