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장한 서정성과 풍자, 불의와 관습에 대한 고뇌와 저항으로 유명한 영국 시인 바이런이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수학할 때의 이야기. 종교학 시험을 앞둔
강의실은 무거운 침묵에 싸여 있었다. 시험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와 포도주의
관계에 담겨 있는 영성을 서술하는 것이었다. 다른 학생들이 열심히 답안을
작성하고 있는데 바이런은 두 시간 내내 창밖만 바라보며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시험 종료 시간이 다 되어간다는 경고에도 아랑곳없이 그는
우두커니 앉아 있기만 했다. 처음부터 그를 눈여겨보던 감독 교수가 바이런에게 다가와 말했다. “자네, 지금 답안은 작성하지 않고 뭘 하고 있는가? 서둘러
쓰도록 하게.” 교수가 심각하게 충고했지만 바이런은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교수님, 저는 지금 머릿속으로 가장 적절한 답안을 생각하고 있는 중입니다.
이 구상이 끝나는 대로 곧 답안을 작성하겠습니다.” 하지만 종료시간을 앞두고도 그는 답안을 쓰기는커녕 하염없이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시험 종료를 알리는 신호가 울리자 교수는 그 괴상한 학생에게로 걸어갔다. 그리고는 여전히 백지인 그의 시험지를 보고는 한 줄이라도 쓴다면 낙제를 면하게 해주겠다고 말했다.
그래도 바이런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자네, 아직도 이 답안을 구상 중인가?”
그러자 바이런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이제 다 되었습니다.”
말을 마친 바이런은 펜을 들어 다음과 같이 한 문장을 써내려갔다.
“물이 그 주인을 만나자 얼굴이 붉어졌다.” 바이런은 그 종교학 과목에서
최고 학점을 받았다고 전해진다.